지난 2003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안은 과연 제대로 법제화될 수 있을까.
인권위가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듣기 위해 28일 서울 중구 인권위 배움터에서 주최한 공청회는 차별금지법안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을 예고했다.
이날 공청회에서 노동계와 재계는 격렬한 찬반 논쟁을 벌였고, 장애인 단체는 이 법안이 "대부분의 장애인 차별을 구제할 수 없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차별행위에 대해 시정명령과 이행강제금 부과도 가능**
인권위가 추진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안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피해를 구제하며, 차별을 예방한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모두 44개 조로 구성된 차별금지법안은 성별, 장애, 출신국가, 출신지역, 종교, 사상, 인종, 피부색, 학력, 전과, 고용형태, 성적취향 등을 이유로 개인이나 집단을 배제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차별'이라고 정의하고 △고용 △재화, 용역, 교통수단, 상업시설 등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의 기회와 내용 등에서 차별을 금지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성별, 장애 등을 이유로 재화, 용역의 이용 등을 제한하거나 교통수단 이용을 거부하면 차별금지법을 위반하는 행위가 된다. 또 교육기관이 입학, 편입, 지원 등을 제한하거나 교육내용 및 교과과정 편성을 달리해도 법위반이다.
또 성희롱과 장애 및 인종을 이유로 한 괴롭힘(harassment)도 차별의 범주로 보되, 차별 시정을 위한 적극적 조치에 대해서는 차별의 예외로 명시했다.
인권위의 권리구제 수단도 바뀐다. 차별행위에 대해 인권위는 일반적인 권리구제 수단인 조정 및 시정권고를 할 수 있으며, 특별한 권리구제 조치로서 제한적 범위에서 시정명령권을 발동하거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중대한 차별행위로 인정된 사건에 대해 피해자의 소송을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차별행위에 관한 소송에서 가해자에게 입증책임을 부여해 차별이 없었다는 점을 밝히도록 했으며,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 차별행위가 악의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법원에서 통상적인 재산상 손해액 이외에 별도의 배상금(손해액의 2~5배)을 지급하도록 하는 판결을 가능하게 했다.
***재계 "사용자의 재산권과 자율경영 등을 침해할 소지 있다"**
이 공청회에서 노동계와 재계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부분은 바로 '고용형태'가 차별의 종류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이형준 법제팀장은 "고용과 관련된 전 분야에서 차별금지를 목적으로 시정명령권, 징벌적 손해배상제, 소송지원 제도 등을 도입하는 것은 헌법이 명시한 사용자의 재산권과 자유시장 경제질서, 사기업의 자율경영 등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 팀장은 "고용상 차별 문제는 판단이 어려운 부분인데도 노사관계를 다루는 전문기관도 아닌 인권위가 차별의 정의부터 시정조치까지 전 과정을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 법은 기업의 인력운용에 악영향을 미쳐 노동시장을 경직시키고 국가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차별금지법 제정이 옴부즈만 성격을 지닌 인권위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회사가 문을 닫는 경우도 생기는데 이렇게 되면 한 사람의 인권을 구제하기 위해 다른 사랆의 일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다"며 "섣불리 도입하면 그 충격은 심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자는 항상 차별에 노출 … 강제력을 지난 차별금지법은 필수"**
이에 대해 민주노총 김태현 정책실장은 "채용과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가 상시적으로 차별에 노출돼 있지만 이런 차별을 현행 법으로 규제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차별금지법 제정은 불가피하다"고 반박했다.
김 실장은 "인권위의 권고에 대해 모 부처 장관이 '노동시장 선진화의 마지막 걸림돌'이라고 비꼬는 데서 보듯, 현재 옴부즈만으로서 인권위는 차별을 적극 시정할 실제적인 능력이 없다"며 차별금지법이 강제력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만 차별금지 규정을 위반하고도 정당한 사유 없이 권고 결정을 이행하지 않거나 차별의 행태가 심각해 공익에 미치는 영향이 클 때 시정명령권 등 강제수단을 도입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강제수단은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참여한 이찬진 제일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행위가 발생하는 대부분의 영역이 고용분야"라면서 "고용형태가 차별 사유로 명시돼야 함은 물론, 관련 조항이 입법적으로 관철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장애인 차별 구제 힘들어…독립적인 장애인차별 금리법 제정해야"**
장애인 단체도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안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배융호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정추진연대(장추련) 상임집행위원은 "구제방법 등에 있어 진일보한 법"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안으로는 포괄적인 장애인 차별을 구제하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그는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안은 고용, 이용권, 교육 분야에만 차별을 규정하고 있지만 장애인 차별금지법은 14가지 분야로 구체적인 차별영역을 제시하고 있다"면서 "독립적인 장애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인 차별 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차법)은 지난해 9월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입법 발의하여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상태다.
이날 장애인 단체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문제를 70% 이상이 노동차별에 중점을 둔 사회적 '차별금지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면서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독립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이 절실하다"고 기자회견을 가진 뒤 조영황 인권위원장실 점거농성을 시도했다.
장추련은 "독립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차별시정기구 설립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인권위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이어 장추련은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에 담긴 시정명령 제도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와 같은 권리구제 수단에 대해 "우리의 장차법과 비슷하거나 강화된 측면이 있어 반갑고 다행스럽다"며 "그러나 장애인과 관련된 차별은 전 생애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매우 포괄적이고 전문적이기에 독립된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차별시정기구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민주주의 확장과정… 자유주의와 배치되는 것 아니냐"**
한편 이날 토론에서 인하대 법대 이경주 교수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민주주의 확장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국가에 의한 자유와 평등이 반드시 자유주의와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찬진 변호사도 "우리 사회가 차이와 차별에 관한 감수성 훈련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현실에서 실정법을 만들어 차별을 막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라며 "이 법은 헌법상 평등권을 구체적인 인권인 '주관적 공권' 범주로 확대한 것으로 인권분야에서 혁명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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