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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피고석엔 피고의 아내들이 앉아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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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8명의 피고석엔 피고의 아내들이 앉아있고..."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03/22]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심 이끌어낸 김형태 변호사

우리 현대사의 오점이자, 가장 충격적인 "사법 살인"이었던, "인혁당 사건"의 재심 공판이, 지난 월요일 32년 만에 열렸습니다. 3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혁당 사건은, 유신정권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의 사례로 손꼽히고 있는데요. 인혁당 사건이 다시 한 번 법의 심판을 받게 되기까지,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이 사람의 노력 역시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인혁당 사건 재심 공판이 열리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이번에, 변호인단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집중인터뷰 오늘은, 우리사회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손꼽히는 김형태 변호사와 함께, 인혁당 재심 공판이 32년 만에 열리게 된 의미, 그리고 굵직굵직한 시국사건들을 통해서 올곶은 목소리를 내온 김형태 변호사의 소신에 대한 이야기..함께 합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김형태 변호사입니다.

김형태 변호사는, 83년 사법연수원 수료한 뒤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의 모임〉의 창립 멤버였고, 주요 시국사건 변호인으로 참여했으며 헌법재판관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는데요. 특히, 송두율 교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변호인과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 특별 검사보를 맡은바 있으며, 현재, 법무법인 덕수 소속 변호사로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발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김형태 변호사님, 안녕하십니까?

김형태 변호사 : 네. 안녕하세요.

박인규 : 지난 월요일이었죠? 서울 중앙지법에서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에 대한 재심 첫 번째 공판이 열렸습니다. 그날 재판장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김형태 변호사 : 피고인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 피고인석에 그분들의 부인들이 대신 앉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숙연했고 그 다음에 피고인들 없이 재판하는 모양이 굉장히 재판부에도 특별한 느낌이 있었을 거고요. 지난 번 재심 개시 결정 때도 재판부가 그런 얘기를 했죠.

박인규 : 인혁당 사건으로 돌아가신 여덟분들의 부인들이 피고석에 대신 앉았다..그런데 32년 동안 워낙 가슴에 한이라고 할까, 응어리를 품고 사셔서 그날 부인들께서 거의 말씀을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형태 변호사 : 그 중에는 아버지가 소위 말하는 빨갱이로 죽었기 때문에 서너 살짜리 아이를 목에 새끼줄을 매어서 동네 아이들이 "빨갱이다!"라고 하면서 끌고 다닌 적도 있었답니다. 그 정도로 고충을 겪었기 때문에 그분들의 감회가 아마 굉장했을 겁니다.

박인규 : 김형태 변호사께서도 이 재심을 위해서 상당히 오랫동안 노력을 해 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변호사로서도 상당히 감회가 깊었겠습니다?

김형태 변호사 : 네. 제가 사실 인혁당 사건 때 고등학교 3년이었는데 그때 인혁당..죽었다는 소식을 제가 신문에서 봤었어요. 그리고 지금 그 변론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는데요. 그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좀 있었거든요.

박인규 : 저도 그때 고3이었습니다.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그 사건을 보면서 박정희 정권이 여러 가지 산업화를 했지만 참 이 부분은 용서받기 힘들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정말 이쯤에서 그러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무엇인지, 제가 알기로는 64년도에 인혁당 사건이 한 번 있었고,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이 무엇인지 한 번 설명을 해 주시죠? 사건의 개요를..

김형태 변호사 : 64년도에 박정희 정권이 집권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이거든요. 그러니까 자신들의 집권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말하자면 대상이 있어야 하거든요. 위협적인 요소가 있다..그런 것들이 있어야만 국민들이 응집을 하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혁신계가 우리 해방 이후부터 계속 있었죠. 혁신계들을 하여튼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64년도에 도예종씨와 겹쳐있는데요. 인혁당과.. 도예종씨를 비롯한 여러분을 10여명 이상을 잡아서 김형욱씨 회고록에 나오는 얘기인데 말하자면 공산 세력을 남쪽에다가도 공산 세력을 건설한다..이렇게 공포를 해서 잡았죠.

박인규 : 정확하게 명칭이 인민혁명당이죠?

김형태 변호사 : 인민혁명당이죠. 잡았는데 그때 수사 검사들이.. 중정 작품이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 수사, 검사들이 들여다 보니까 도저히 이것이 사건으로서 혁명당이 있으려면 조직이나, 강령이나,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그런 것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검사들이 '이 사건은 도저히 기소 못한다.' 그래서 네 명중에 세 명이 아예 사표까지 던졌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고검에서 다시 수사를 해서 국가보안법 상의 반국가단체혐의는 빼고 인민 혁명당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라는 것을 자기들이 자인를 하고 그리고 이적표현물 소지, 고무 찬양 이런 것들만 해서 거의 다 대부분 풀어주고 모두 무죄가 났고요. 1심에서는 모두 무죄가 났습니다. 그런데 2심에서 약간 유죄로 집행유예도 나왔는데 하여튼 그런 조직은 없다..라는 것으로 중정이나 김형욱 회고록에도 자기들이 실수했다는 회고록이 나옵니다. 그것이 1차 인혁당 사건이죠.

박인규 : 그것이 74년도에 재건위 사건이 되고 민청학련에 엮어지게 되는 거군요?

김형태 변호사 : 그래서 73년, 74년도가 10월 유신을 하고 나갔고 굉장히 72년에 억눌려있다가 73년 말부터 학생 운동이 굉장히 활발해 졌거든요. 그래서 시위도 많아지고 심지어는 고등학생까지 나올 준비가 되어 있고..그러다 보니까 이것을 또 하나 만들어야 한다..해서 하다 보니까 처음에 인혁당이라는 말이 없었다는 겁니다. 수사관들 조차도 나중에 발표한 것을 보니까 '어, 인혁당?' 이렇게 들었다는 수사관의 진술도 있거든요. 그 정도로 학생들을 잡기 위해서 민청학련을 만들고 그 배경으로 누군가를 끌어 넣어야 하는데 그때 사실은 지도자들이 대개 명망가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외국과도 연결이 되어 있고 하니까 그렇게 엮어다가는 안 되겠으니까..조금 혁신계 중에서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대구 쪽을 중심으로 잡아다가 뒤에 배경으로 사실 세운 것이 인혁당 재건이죠. 정확히 말하면..

박인규 : 그 사건을 이번에..

김형태 변호사 : 그렇습니다. 재건위 사건..

박인규 : 그 당시에 이분들이 사형판결을 받은 바로 다음 날 24시간도 되지 않아서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사법살인이라는 말도 나오고..

김형태 변호사 : 네. 74년에 구속되어서 75년 4월 7일에 사형선고가 확정이 됐고요. 4월 8일 새벽에 집행이 됐는데 저희가 확인한 서류에 보면 사형선고가 확정되기 이전에 이미 사형집행 문서가 교도소로 내려왔다는 것이죠.

박인규 : 그런데 이번에 재심을 하게 된 것은 그 재판 자체가 좀 틀렸다, 다시 한번 심의를 해 달라는 것인데..재심 공판을 하시게 되면서 어떤 부분을 밝히고 싶으신 겁니까?

김형태 변호사 : 크게 나누면 조직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인민 혁명당 재건이라는 것이 있었는지가 첫째 문제이고요. 그런데 그것이 없었다는 것은 명백한..사실 저희들은 확신을 하고 있고요. 무죄가 나올 것으로..그 다음에 그분들이 민청학련을 지원했다..그것이 긴급조치 위반이거든요. 그런데 지원한 사실은 없고요. 그것도 이철, 유인태 두 분을 만나 보니까 처음에는 여정남씨가 연결 고리인데 '여정남씨를 너희들이 지도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계속 수사를 하다가 여정남씨가 선배이거든요. '어떻게 우리가 선배를 지도합니까?' 그러니까 '그럼 거꾸로 너희들이 지도를 받았구나..' 이렇게 바꾼 겁니다. 그래서 민청학련을 과연 이분들이 지도를 했는지..그것도 전혀 아니고요.

박인규 : 말하자면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의 배후 세력인지?

김형태 변호사 : 네. 그 부분이 있고 이분들이 실제로 긴급조치를 위반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긴급조치 헌법을 개헌하자고 하면 잡아 넣었거든요. 그때..실제로 헌법이 잘못됐다라는 이분들의 소신이 분명히 있고 이분들이 대구를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은 분명히 있고요. 그래서 그 부분은 아마 긴급조치 위반은 법이 위헌이 아닌 한 일단은 인정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부분이 있고요. 마지막으로 이제 반공법에 관련해서 한 두 분 정도가 북한 방송을 청취한 것이 있어요. 그런데 그 부분은 그분들이 통일과 관련해서 북한의 입장이 무엇인지 들어 보려고 개인적으로 청취했던 것..

박인규 : 이철, 유인태 이분들이 그 당시 말하자면 민청학련의 주범이었는데 이분들도 증인으로 나오십니까?

김형태 변호사 : 네. 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분들도 흔쾌히 승낙을 했고요.

박인규 : 검찰은 지금 이번 재심에 관해서 어떤 입장이던가요?

김형태 변호사 : 그날 모두 검찰 진술을 하는데 첫째 발언이 자기들이 수사해서 기소한 사건이 아니다..그러니까 이것은 군법회의가 특별법인 긴급조치 2호에 의해서..

박인규 : 그 당시 군법회의였군요?

김형태 변호사 : 군법회의가 만들어졌거든요. 그 사람들이 한 것이지 우리 검찰이 한 것은 아니다..이렇게 발뺌을 했고요. 그렇지만 공익의 대변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이 사건을 공소유지를 하겠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의나 인권도 중요한 검찰의 가치이기 때문에 그것도 열심히 같이 신경을 쓰겠다..이렇게 얘기를 했죠.

박인규 : 재심이라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법적 요건이 어려워서..그래서 인혁당재건위사건의 재심을 이끌어 내기까지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고 하던데 어떤 과정을 거쳤습니까?

김형태 변호사 : 우리나라 재심에 관한 법률이 새로운 증거..

박인규 : 재판 당시에는 없었던 새로운 증거가 나와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김형태 변호사 : 그렇죠. 새로운 증거가 나와야 하고 그것이 또 무죄를 인정할 정도의 명백한 것이어야 한다..그래서 신규명백성이라는 것을 법원이 요구하고 있는데 그 해석에 있어서 거의 새로운 범인이 잡혀야지만 재심이 통과될 정도로 엄격하게 지금 해석을 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거의 재심이라는 것이 인정이 안 되고요. 특히 인혁당의 경우에는 남북 대치상황이기 때문에 더더욱 더 아주 그런 우리 법원의 상태였는데 이것이 한 10년 정도 저희가 미리 준비를 해 왔고요.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인혁당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었습니다. 기록이 없다라고 공식으로 문의를 하면 없다라고 했는데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이 되어서 2000년도에 그 중에 한 분을 그곳에 진정을 해라..그래서 감옥에서 심하게 고문 받다가 죽은 분이 있거든요. 장석구씨라고..그래서 그 분을 대표적으로 하나 넣어서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그 사건을 조사를 하기 시작했죠. 아무래도 국가의 공권력이니까 위원회를 통해서 기록을 찾은 것이 가장 큰 소득이고요.

박인규 : 그렇다면 그 기록이라는 것이 고문에 관한 기록입니까?

김형태 변호사 : 아닙니다. 재판에 관한 기록입니다. 특이한 사건이죠. 심지어는 판결문도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판결문도 작년에 법원에서 대법원이 처음으로 인터넷으로 올렸죠. 그래서 기록 자체를 찾는 것이 어려웠고요. 그 다음에 기록을 찾고 나니까 그 기록에 보면 변호인들이나 또 수사관들이나 또 교도관들 그 다음에 생존자들..이런 분들을 진상위원회에서 조사를 모두 했어요. 그랬더니 극심한 고문이 있었고 그리고 조서도 위조가 됐고 이런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재심의 터전이 생겼죠.

박인규 : 이번에 변호인단들은 주로 어떤 분들이 참여하시고 계십니까?

김형태 변호사 : 그때 민청학련 재판하다가 잡혀 가신 강신옥 변호사님..그분도 초기에 좀 많이 나오셨고요. 그 다음에 변론했던 이돈명 변호사님, 과거의 그 사건의 연결이죠. 말하자면..그리고 80년대에 들어와서 민주화를 만들면서 참여했던 변호사들..이렇게 주축이 되고 있죠.

박인규 : 재심이 다시 이뤄질 수 있겠다는 이런 것이 이른바 법과 정의, 또 진실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김형태 변호사 :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국제 사법협회가 거의 사법살인이고, 암흑의 날이라고 선포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조작사건이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나라 스스로 풀지 못한다고 하면 형식적 민주주의는 굉장히 발전했거든요. 과거의 그런 사건들을 정리 해야 될 상황인데 아주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래서 그 첫 단추를 끼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이런 생각이 들죠.

박인규 : 잘못된 법의 적용을 바로 잡는다? 제가 알기로는 재심을 기다리는 사건들이 꽤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형태 변호사 : 거의 재심 사건들이 이데올로기와 관련해서 조작된 사건들이 특히 80년대 전두환 정권 때에 일본 관련해서 간첩들을 많이 만들어 냈거든요. 일본에 친척이 있고, 일본에 갔다 오면 모두 잡아 넣었어요. 그래서 그런 사건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중에 몇 몇 사건들이 거의 재심으로 지금 갈 가능성이 높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박인규 : 혹시 김형태 변호사께서 인혁당사건 말고 또 재심을 위해서 준비하시고 있는 사건이 있습니까?

김형태 변호사 : 지금 일본 관련 조작 간첩이라고 했던 분들이요. 제주도에서 지금 강희철씨라고 심지어는 대법원에서 유죄 선고를 했던 대법관이 박우동 대법관이 자기 회고록을 쓰면서 이 사건은 두고두고 참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판결이다..그래서 그 사건이 아마 재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저희 프로그램에 한 번 강기훈씨가 나왔었는데 강기훈 유서대필사건도 상당히 의혹이 많은 사건이었거든요? 혹시 그 사건도 재심의 가능성이 있습니까?

김형태 변호사 : 그 문서 감정이 핵심이었는데 그 문서에 관해서 외국 사람들도 데려다가 감정 시키고 했었는데 그것을 받아주지 않았거든요.

박인규 : 법원에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김형태 변호사 : 그래서 신규명백한 증거가 역시 걸림돌이 되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지금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다시 인혁당 사건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에 여덟 분이 사형을 당했지만 생존한 피고인 열 세분이 또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분들은 앞으로 민사소송으로 간다는 말도 있던데요?

김형태 변호사 : 지금 변호인단은 꾸려 놓았고요. 그분들도 재심을 하려고 지금 준비 중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 여덟 분 돌아가신 분들이 끝날 무렵에 재심에 들어가려고 지금 준비 중이죠.

박인규 : 대략 재심의 기간 같은 것은 예상해 볼 수 있습니까?

김형태 변호사 : 사실은 우리 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할 때 굉장히 엄격하게 하거든요. 그래서 이번 판결을 재심 결정 할 때 이미 혐의가 없다는 것까지 거의 선언을 했어요.

박인규 : 재심이 이뤄졌다는 것은 상당히 좀..

김형태 변호사 : 네. 개시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 재심에 관한 판결까지 거의 났다고 저희는 보고 있고요. 다만 검찰에서 무언가 새로운 증거를 낼 수 있을지..그것이 문제인데 제가 보기에는 거의 없지 않을까..

박인규 : 만약에 상당부분 혐의가 없다라고 누명을 벗게 되면 다시 또 검찰에서 항소하거나 이런 것이 있습니까?

김형태 변호사 : 그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나 문익환 목사님 사건 때는 항소를 하지 않았죠. 그냥 그렇게 끝났습니다.

박인규 :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재심이 이분들의 어떤 용공조작혐의가 벗겨지면 끝나는 겁니까? 어떻습니까? 유족들은 어떤 것을 가장 바라고 계신가요?

김형태 변호사 : 거의 그분들의 평생이 여기서 망가졌기 때문에 아마 최종길 교수 사건 때도 그랬는데요. 이번에 항소하지 않았거든요 검찰이.. 가족들이 너무 허탈해서 거의 공황상태에 빠진 겁니다. 그러니까 수 십년 동안 그 고통을 겪어오다가 끝나고 나니까 오히려 허탈해져서 지금 아마 이 가족분들도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인규 : 하여튼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이 되어서 억울한 누명이라면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김형태 변호사 : 네.

박인규 : 지금부터는 김형태 변호사가 법조인으로서 걸어오신 길에 대해서 간단하게 여쭤볼까 합니다. 김 변호사는 23회 사시에 합격하셨는데 그때가 처음으로 300명을 뽑은 시대였고 상당히 개혁적이라고 할까요, 그런 분들이 많이 들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알기로는 일단 사법연수원만 나오면 판사나 검사를 하는데 바로 변호사를 하셨어요? 나름대로 뜻한 바가 있으셨습니까?

김형태 변호사 : 저는 그때 검사시보를 하는 동안에 노동 사건을 하나 맡았는데요. 노동자를 풀어주고 그 것을 탄압했던 회사의 높은 사람을 구속했더니 검사동일체의 원칙에 의해서 윗 분이 제 사건을 뺏어다가 노동자는 구속시키고 그 회사 전무는 다시 풀어줬어요. 그래서 저는 도저히 이 것은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요. 80년대에 아주 심했거든요.

박인규 : 그러니까 말하자면 초짜 검사가 한 것을 윗 분이 뒤집어 버린..?

김형태 변호사 : 완전히 뒤집어 버렸죠.

박인규 : 그런데 검사동일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김형태 변호사 : 어느 검사가 하든 그 사건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하던 것을 뺏어다가 다른 분이 할 수도 있고..

박인규 : 그런데 아랫사람이 윗사람 것을 뺏어 올 수는 없잖아요?

김형태 변호사 : 그런데 하여튼 그렇게 됐죠.(웃음) 그때 아마 택시였는데 택시기사들이 제 방에 거의 와서 진을 치고 살았는데 그때는 아마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 왜냐하면 공권력이 자기 편을 들어 준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는데..그랬는데 결국에 가서는 뒤집어지니까 역시나 하고 제가 실망을 오히려 그분들에게..

박인규 : 그 사건을 거치시면서 검사를 하지 말자..변호사를 하자라고 하셨군요?

김형태 변호사 : 네.

박인규 : 그 뒤로 시국사건 변호를 많이 하신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동안 많이 하셨겠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시국사건 변호가 있습니까?

김형태 변호사 : 임수경, 문규현 신부 사건이 굉장히 큰 사건이었는데요. 그때 문규현 신부 판문점 분단 선에 서서 휴전선에서 구호를 외치고 해서 천주교 전체가 빨갱이라고 사회에서 매도를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 이후에 평양에 여러 번 갔다 왔는데 북한 사람들이 천주교나, 신부나, 남한 사회에 대해서 엄청나게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이 그 사건이었어요. 그러니까 아마 백마디 말보다도 그렇게 가서 한 것들이 같은 동족이구나..이런 것들을 느꼈고, 꼭 이데올로기를 떠나서..그래서 그 사건이 가장 큰 남북화해의 큰 기여를 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박인규 : 상당히 민감한 사건들을 많이 맡으셨는데 예를 들면 2004년도에 송두율 교수..거물간첩, 북한 공산당 정치계라는 말도 있었고요. 어떻습니까? 일부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판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하실 말씀이 많이 있으실 것 같아요?

김형태 변호사 : 일부 무죄가 아니고요. 중요한 부분은 모두 무죄를 받았는데 사실은 언론이 너무 보도를 잘못해서 집행유예로 보도가 됐어요. 그런데 그 집행유예라는 것은 북한에 왔다, 갔다 한 것과 잠입탈출..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그것만 유죄를 받았고요. 제일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 최대 간첩사건이라고 해서 후보위원..후보위원라는 것이 삼부요인 정도 되는 것이거든요. 총리급들만 들어가는데 후보위원이라는 부분이 무죄를 받았거든요. 그 핵심은 후보위원이라는 것이었는데 그 부분은 무죄를 받고, 여러 가지 뒤에서 배후조정을 했다는 학생들..또 학자들을 뒤에서 조정했다는 점도 모두 무죄를 받고 그랬죠. 그러니까 그 부분을 처음에는 완전히 거짓말을 하고 정말 빨갱이..언론이 엄청나게 폭격을 하다가 실제로 결론이 날 때는 그 보도를 전혀 하지 않아서..

박인규 : 인혁당 사건이나, 임수경 방북이나, 송두율 교수 사건이나 말하자면 남북간의 상황에서 굉장히 민감한 이념적인 사건을 다루신 게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법의 적용이라든가, 언론의 이런 것들을 봤을 때 우리사회의 편견이랄지, 그런 것을 느끼셨던 게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김형태 변호사 : 사실 법이라는 것이 종이에 써 있는 법은 정의는 아니거든요. 그 시대 상황이 만들어 내는 것인데 그것이 헌법 같은 경우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악법을 떠나서 잘 된 법이 아니냐를 떠나서 해방 후에는 효용이 있었어요. 남쪽이 북한을 대치하기 때문에..그런데 그 시대가 바뀌면서 지금 3~40년, 50년이 됐는데 그 옛날 법을 계속 지금까지 유지시켜서 희생양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회가 앞으로 나가는데 법이 걸림돌이 되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송두율 교수 사건도 결정적으로 너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가는데 걸림돌로 작용했던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좀 들어요.

박인규 : 국가보안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김형태 변호사 : 네.

박인규 : MBC의 소유주라고 할 수 있는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이시면서 최근에 황우석 교수 사건에서 MBC와 황우석 교수가 대립각을 세웠는데 어떻게 보면 황우석 교수를 위한 법적 대리인 역할도 하시면서 상당히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그 당시에? 어떻게 해서 그런 역할을 맡게 되신 겁니까?

김형태 변호사 : 황우석 교수나 그 주변분들과 제가 친분이 개인적으로 있었고요. 그래서 지금 억울하게 본인들이 언론에 의한 피해를 보고 있다..그런 호소가 와서 '그럼 도와주마..' 그랬더니 MBC 쪽에서도 '좋다, 중재를 한 번 서봐라..' 그렇게 양쪽을 심판관 비슷하게 무엇이 옳은 진실인지 무엇인지 밝혀보자, 내가 중간에서 심판을 해 보마..'이렇게 해서 그 세포들도 저희가 받아들여서..아직까지도 냉장고에 있어요. 저희 사무실에..(웃음)

박인규 : 이른바 줄기세포?

김형태 변호사 : 네. 영롱이 세포도 있고 다 있는데..하다 보니까 그분이 진실을 잘 얘기를 안하고 어떻게 보면 처음에는 저를 믿고 저에게 맡긴 사건이었는데 진실이라는 것은 편과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에 편과 진실이 약간 어긋나더라고요. 할 수 없이..그래도 무엇이 진실인지는 얘기를 하는 것이 낫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하다 보니까 그분에게는 상당히 섭섭하게 되는..지지자들의 비난을 많이 받았죠.

박인규 : 제가 듣기로는 김형태 변호사께서 현 노무현 정부의 고위층과도 가까우시고 그래서 그 당시에 조작됐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청와대 측에 알려줬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어떻습니까?

김형태 변호사 : 정권과 가까워서 알려준 것은 아니고요. 만나기 쉬웠던 측면은 있는데 이 사건 자체가 노무현 정권의 책임이 좀 있죠. 왜냐하면 너무 국가주의나, 애국주의 이런 것으로 많이 밀어줬기 때문에 이것을 빨리 정권 차원에서 자기가 뿌린 씨를 거둬야 한다는 측면에서 높은 분을 만나서 정책실장을 만나서 얘기를 했는데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더라고요. 그 사실 지금도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 있지 않죠.

박인규 : 황우석 교수 사태를 거치면서 좀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에 어떤 진실에 관한 감각이라고 할까요, 법에 관한 감각이랄까요, 어떤 느낌을 받으셨어요?

김형태 변호사 : 저는 송두율 교수 사건, 문규현 신부 사건, 치과의사 모녀 살인 사건 때 무죄를 받았는데요. 그때 사건..그 다음에 이번 황우석 교수 사건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언론이 제일 큰 문제이다..언론이 사건을 아주 흥미위주로 내지는 그런 쪽으로만 끌고 가서 사건을 오히려 만들어요. 만들어서 그것을 나중에 뒷 수습은 하지 않고, 책임은 지지 않고 언론이 첫째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박인규 :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반성하겠습니다. 상당히 공부를 많이 하시는 법조인이시라는 말씀을 들었는데요. 앞으로 어떤 활동 계획이랄지, 어떤 법조인이 되시고 싶으신지 마무리 말씀으로 부탁 드리겠습니다.

김형태 변호사 :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진보, 보수로 싸우고 있는데 사실 진정한 진보나 보수는 찾기 어렵다..합리적이지 않아요. 양쪽 모두..그래서 우리 사회가 합리적으로 가는 것이 첫째이다..라는 생각이 들고요. 합리적이 된 다음에는 진보, 보수가 서로 상대방을 인정해야 하거든요. 화해하는 것이 필요하거든요. 우리 사회가 안보 문제도 있고요. 그 부분에 관한 노력을 하고 싶습니다.

박인규 : 합리적인 보수, 합리적 진보, 합리적 사회를 위해서 계속 노력해 주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 드립니다.

김형태 변호사 : 네.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에서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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