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전 총리와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편치 않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다음 약속도 잡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관심 속에 만난 두 사람의 12일 오찬 회동 결과는 '역시나'였다. 두 사람은 13일에는 보란 듯이 '독자행보'를 재촉했다. 고 전 총리와 정 의장 사이에 본격적인 경쟁 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양상이다.
***고건 "시스템 고장 난 현 정치는 위기상황"**
고 전 총리는 이날 자신의 '대권 공부방' 격인 〈미래와 경제 포럼〉 창립 토론회에 참석했다. 전날 정동영 의장과의 회동에 관한 질문에 "오늘은 토론회 자리니 토론회에 대한 얘기만을 하겠다"며 입을 닫았다.
고 전 총리는 대신 "지금의 정치 시스템은 고장이 나, 시대의 과제와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며 현 정권을 포함한 현실 정치 전체를 싸잡아 비판했다. 그는 "현재가 위기 상황이라는 진단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만연된 사회 분열과 갈등, 경제 침체, 냉소주의가 그 증후군"이라고 말했다.
고 전 총리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사회 발전의 큰 기회라고 확신한다"며 "지금의 위기를 잘 극복하면 우리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고 통합적 리더십이 그 열쇠"라고 자신의 '역할론'을 적극 부각했다.
이날 〈미래와 경제 포럼〉 총회를 겸한 토론회에는 '고건 사단'으로 분류되는 정ㆍ관계, 학계 인사들이 중심이 된 발기인 152명을 포함한 회원 4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3시간 여의 토론회를 지켜본 고 전 총리는 "공부방이라 할 만큼 많은 공부가 됐다"고 흡족해 했다.
***정동영 "이젠 스스로 강해져야"**
정동영 의장도 고 전 총리와의 연대 불발이 그다지 아쉽지 않은 표정이다. 정 의장은 "참여정부의 문을 함께 열었던 분으로서 한나라당과 함께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거듭거듭 말씀을 드렸지만 아쉽게도 분명한 답변은 없었다"고 '무성과'를 재확인했다.
그 말에 이어 정 의장은 곧바로 '선(先) 자강론', '선(先) 중심강화론'을 꺼내들었다. "우리 스스로가 실수하지 않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당으로 거듭 태어날 때 우리가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요컨대 정 의장의 발언에는 열린우리당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했고 고 전 총리가 거부 의사를 확실히 한 만큼 우리당은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확연했다. 한걸음 나아가 지방선거 후 집권 시나리오의 형태로 재등장할 수 있는 '고건 연대론'을 사전에 차단코자 하는 뜻으로도 풀이됐다.
***지방선거 뒤에 맞춰진 고건의 노림수는?**
두 사람의 '마이웨이'는 예정된 수순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정치권에선 같은 전북 출신의 고 전 총리와 정 의장이 지방선거 전에 손을 잡을 가능성에 가중치를 둔 시각이 드물었다. 양측이 연대할 경우 지방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대권 주자로서 성과와 책임을 함께 나눠야 하는 계산법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 전 총리가 현실 정치세력 중 가장 덩치가 큰 열린우리당의 제안을 얼버무림 없이 단박에 거부한 것도 모종의 셈법이 작동한 결과로 풀이된다.
대권을 바라보는 그의 입장에선 우리당이 대선까지 지금의 덩치를 유지해내지 못하거나, 적어도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인 셈이다. 이는 '열린우리당의 지방선거 패배'를, 구체적으로는 '정동영 의장의 구심력 상실'을 전제한 계산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지방선거 이후에 꽂힌 고 전 총리의 시선은 여권발(發) 정치권 '빅뱅'의 예고편으로 받아들여진다.
기실 정 의장과의 회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고 전 총리의 발언은 "중도실용주의 세력의 통합연대"를 강조한 대목이었다. 그는 "제 정당과 정파를 초월해 국가적 차원에서 창조적 실용주의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폭넓게 협조해야 한다"고 했다. 지방선거 후 정계개편을 당연한 수순으로 내다본 발언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고 전 총리의 '몸값'은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국민중심당이 호남과 충청권에서 얼마나 선전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여권이 선거 패배 시 총체적으로 맞게 될 분열의 강도에 따라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국민중심당의 선전과 여권의 혼란은 고 전 총리에게는 최상의 기회가 되는 셈이다.
다만 지방선거에서 때를 묻히지 않고 과실에 접근하려는 듯 비쳐지는 고 전 총리의 이런 태도는 '무임승차'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동영 의장이 지방선거를 혼자 힘으로 치러야 하는 부담이 생긴 만큼 고 전 총리도 '지방선거 불개입'에 따라 치러야 할 대가가 반드시 생긴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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