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은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의 좌절이 서로 겹쳐 진행되는 국면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심화되면 그 절정에서 혁명이 일어난다고 여겼던 독일 일부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제국주의 체제가 가져온 모순이 혁명의 사회적 욕구를 폭발시킨다는 점에 대해 심각하게 눈길을 돌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반면,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내부에서는 독일 혁명의 발발이 세계사적 혁명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독일의 변화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 내부의 혁명적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제국주의 체제의 온전한 혁파가 불가능해지고, 러시아 혁명도 위협을 받아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일 혁명이 성공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 성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나 칼 리프크네히트 등의 인물이 활약했던 상황이 바로 이 독일혁명의 무대였습니다. 당대의 천재적인 사상가이자 혁명가로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혁명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 독일은 전쟁과 제국주의 세력에 휩싸여 야만의 시대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경고는 그대로 들어맞아 독일혁명의 실패는 파시즘의 도래와 직결되었고 그 결과 독일은 파시스트 국가가 되어 전란과 광기에 내몰리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독일 혁명이 좌절되면서 러시아 혁명도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스탈린에 의해 고도의 통제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역사는, 혁명이란 한 나라의 혁명으로 당대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1919년은 러시아 혁명만큼의 격동을 세계사에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당시 피압박 식민지 지역의 백성이 들고 일어났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식민주의 타파에 중대한 깃발을 올린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외로운 싸움이었고, 일본 내부의 혁명적 변혁이 함께 전개되지 않는 한 당시의 조건상 성공하기 힘든 거사였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자주 독립 투쟁과 우리를 지배한 일본 내부의 변혁은 맞물려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반대하고 저항했던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였고 그에 따른 식민지 체제였으며, 이를 주도하고 협력한 세력에 대한 투쟁이었습니다. 따라서 3.1 민족항쟁은 우리에게 남의 나라를 침략,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과 그에 의한 식민주의를 극복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역사의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3.1 민족항쟁은 그러나 다만 일본에 대한 질타로 그칠 뿐이지, 이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와 식민주의의 극복이라는 3.1 민족혁명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대한 반대로만 한정시키는 3.1 민족항쟁은 일본과의 집단적인 적대감만 조장할 뿐 정작 극복해야 할 바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3.1 민족운동의 계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강대국의 제국주의를 질타하고, 그에 의해 고통 받는 식민지 백성들과 연대하며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 내부의 진정한 변화도 함께 촉구하는 노력으로 귀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연례행사처럼 3.1 만세만 되풀이 합창하는 3.1절을 계속 지내게 될 뿐일 수 있습니다. 그건, 정신의 알맹이가 빠진 '국민 보건체조 따라 하기'처럼 보입니다. 반제 의식 없는 3.1 민족 항쟁 기념일은 이 나라의 식민주의적 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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