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쟁은 객관적 정보평가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중동지역을 친미지역화하려는 부시행정부의 야망이 촉발한 전쟁이었다.'
지난 2003년 이라크전쟁 개전 당시 중앙정보국(CIA)에서 중동지역에 대한 정보분석 책임자로 일했던 한 인사가 부시행정부의 정보 왜곡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미국의 대표적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발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CIA '근동 및 남아시아 담당' 선임 정보분석관으로 일했던 폴 필라는 〈포린 어페어즈〉 3ㆍ4월호에 발표한 '정보, 정책, 그리고 이라크전쟁(Intelligence, Policy, and the War in Iraq)'에서 '이라크전쟁은 이라크의 대미(對美) 안보위협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중동지역을 친미지역화하려는 부시행정부의 야망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포린 어페어즈〉는 미국 정계, 재계, 학계 등 제도권의 오피니언리더들이 즐겨 보는 외교전문지라는 점에서 필라의 문제제기가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주목된다.
현재 조지타운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필라는 이 글에서 부시행정부가 현지상황에 대한 객관적 정보평가를 참고조차 하지 않은 채 이라크 침공을 강행했으며, 이의를 제기하는 정보관리들은 배신자로 몰아붙이고, 정보기관의 정보 중 일부는 자신들의 입맛대로 왜곡을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이라크전쟁이 일어나면서 국가안보상의 가장 중요한 결정에서조차 공식 정보분석은 활용되지 않았으며, 이미 내려진 결정들을 합리화하는 데만 악용됐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클린턴행정부와 외국 정부들도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비축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이들은 대량살상무기의 위협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경제제재와 무기사찰을 선택했다.
그러나 부시행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선택한 것은 다른 동기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중동지역의 세력판도를 뒤흔들어 "이 지역에 대한 자유주의적 정치와 경제의 확산'을 촉진시킨다는 것이었다
필라는 부시행정부가 "정보를 의사결정의 자료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했다"면서 "이라크 상황에 관한 그 어떤 전략적 차원의 정보평가를 거치기는커녕 그러한 정보평가를 요구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전쟁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필라 자신이 이라크에 관한 정보평가를 종합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뒤까지도 행정부로터 이라크 상황에 관한 정보평가 요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필라는 특히 이라크에 대한 미 정보기관의 정보평가는 정확했다고 밝혔다.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 이전,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이라크의 민주주의 확립 과정은 "길고, 어려우며, 혼란에 가득찰 것"이고,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종파간 갈등이 있을 것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보전문가들은 또한 후세인 타도 직후 "안보기구들을 확립하고 이라크 국민들을 번영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점령군은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서는 이라크가 핵무기를 손에 넣으려면 수 년이 걸릴 것이며, 특히 이라크가 결정적 궁지에 몰리지 않는 한 미국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필라에 따르면 미 정보기관의 판단과 부시행정부의 공적인 발언 사이에 가장 큰 차이가 드러난 것은 후세인과 알카에다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후세인과 알카에다 간의 연계 가능성에 대해 방대하고 치밀한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부시행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두 세력 사이의 '동맹'이라고 할 만한 조짐이나 징후는 전혀 없었다."
필라는 결국 "부시행정부는 9.11 이후 미국의 호전적 분위기에 편승하고 미 국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악용해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이라크 원정을 단행하려 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나아가 이라크전쟁 개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정보분석가들은 대통령의 정책을 거부하려 한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의 흉흉한 분위기는 정보기관들이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계획에 대한 행정부의 일치된 견해에 도전하고 있다는 편견을 강화시켰다. 행정부의 일치된 견해에 어떠한 이견 제시도 정보기관이 행정부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다는 기존 편견을 강화시킬 뿐이었다."
한편 필라는 9.11사태 이후 미국의 정보능력을 강화시킨다는 명분 아래 지난 2004년 12월 단행된 정보기구 재편에 대해 이는 정보기구의 수장들로 하여금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도록 했을 뿐이라고 혹평하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정보기관에 보다 폭넓은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 의회와 미국 국민들이 "미국 정보기관의 쇄신"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미국 대외정책의 건강성, 그리고 미국의 안보증진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 아래 결정되는 정책들이 과연 어떤 근거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국민들이 제대로 알 수 있는지는 바로 이 정보기관의 쇄신 여부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필라는 그러나 "현재의 (행정부와 정보기관 간의) 반목이 치유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랭글리(워싱턴 근교 CIA본부가 있는 곳)는 적의 영토'라는 정보기관에 대한 현 정책결정자들의 편견이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비관적 전망을 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