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주거지역들을 돌아보면 특징적인 색깔이 배어 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잿빛이다. 유대인 정착촌들의 현대적이고 산뜻한 건물들과는 다르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보다 더 긴 기간을 이스라엘 무단통치 아래 보내야 했던 팔레스타인의 가난과 좌절을 상징하는 그런 회색지대에 선거혁명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1.25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민초들은 부패하고 외세(미국과 이스라엘)에 타협적인 모습을 보이는 정치세력보다는 하마스(Hamas)를 택했다.
***피억압자에 희망 주는 이원적 조직**
문제는 하마스가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테러집단'으로 낙인찍힌 정치조직이란 점이다. 미 국무부는 해마다 펴내는 테러관련 보고서에서 하마스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해 왔다. 그러나 이는 한 부문만을 비춘 평가다. 하마스는 무장투쟁 부문(알 카삼 여단)과 정치사회 부문으로 나뉜 이원조직이다.
2000년 9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봉기)가 일어난 뒤 네 차례에 걸친 팔레스타인 현지취재과정에서 "하마스의 정치사회 부문은 테러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확인했다. 하마스는 이슬람 형제주의에 바탕을 두고 학교와 병원들을 세워 피억압자들에게 희망을 주어 왔다.
(사진설명) 서안지구 정치중심도시 라말라에서 만난 하마스 대원은 "미국이 유대인의 배후"라며 반미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김재명)
부시 행정부는 1.25 총선 판세가 하마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마스의 정적들에게 200만 달러의 돈다발을 건네며 선거에 개입했다. 그러나 그런 개입이 오히려 유권자들의 반발을 낳는 역효과를 냈다. 하마스의 등장은 부시 행정부의 잘못된 중동정책이 낳은 정치적 귀결이자, 미 외교정책의 실패를 뜻한다. 요점은 두 가지다.
첫째, 부시 행정부의 이중 잣대.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동석유 지배전략을 뒷받침하는 교두보이자 전진기지다. 그렇기에 미국은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외교정책을 펴 왔다. 이스라엘이 대량살상무기인 핵무기를 개발ㆍ보유하고 있어도 미국은 모른 체 했다. 부시 행정부 들어 이중잣대는 노골화됐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한다는 혐의를 걸어 유엔과 국제법을 어기며 침공했고, 시리아와 이란을 위협 중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초들에게 가하는 집단적 징벌에 대해선 못 본 체 해 왔다.
둘째, 부시 행정부의 허구적인 중동민주화론. 9.11 뒤 부시는 중동민주화론을 내걸었다. 민주주의를 수출하겠다는 명분 아래, 아프간 탈레반 정권과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슬람 독재자들 가운데 친미노선을 걷는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같은 나라들의 독재에 대해선 먼 산 바라보듯 해 왔다.
***이슬람민족주의와 결합한 이슬람근본주의**
이런 미국의 이중적 중동정책은 당연히 이슬람권의 반미감정을 증폭시켰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통치를 비롯한 이슬람 민초들의 고통엔 아랑곳없이, 친미 이슬람 독재정치를 비호하면서 석유이권 챙기기에 열심인 미국의 중동정책은 21세기 들어 이슬람민족주의와 결합한 이슬람근본주의 운동의 발흥이란 반작용을 낳는 중이다.
지난해 6월 레바논 총선에서 레바논 시아파를 대변하는 헤즈볼라가 약진했고, 이란 보수강경파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대통령에 뽑혔다. 12월에 최종집계가 끝난 이집트 총선에서 이슬람 형제단이 의회 교두보 마련에 성공했다. 하마스의 승리도 이런 정치적 현상들과 맥을 같이한다.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은 2004년 3월 이스라엘 헬기 미사일에 맞아 숨을 거둔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다. 중동 현지취재 때 가자 시내에서 야신을 두 번 만났었다. 그는 부시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알다시피 미국은 해마다 20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원조를 하고 있다. F-16 전폭기를 비롯해 미국이 건네준 무기로 이스라엘은 우리 동포들을 죽이는 상황이다. 그러면서 미국이 중동평화를 말할 수 있겠는가."
반미 성향의 하마스가 승리하자 부시는 "하마스와는 대화할 수 없다"고 서둘러 선을 그었다. 올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건넬 참이던 1억5000만 달러 규모의 원조를 중단하리란 소식도 들린다.
***남미의 좌경화 뿌리는...**
현대사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총선에서 승리한 반미 정치세력을 인정하는 데에 미국이 인색한 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1970년 칠레에서 선거로써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이 출범하자, 미국은 칠레 민주화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피노체트 장군의 군부 쿠데타를 뒤에서 부추겼다. 중남미를 미국의 뒤뜰로 잡아두려고 군사독재정권을 비호하던 잘못된 정책은 오늘날 중남미 곳곳에 좌파정권들을 출현시키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하마스의 정치적 약진도 미국으로선 자업자득이다.
이스라엘도 3.28 총선을 앞두고 있다. 하마스 승리의 반작용으로 강경파인 리쿠드당이 이긴다면, 중동의 긴장도는 더욱 높아갈 것이다. 부시의 친이스라엘 일방정책으로 말미암아 중동평화의 불꽃이 다시 지펴질 날은 멀어만 보인다.
*위의 글은 한겨레신문 1월31일자에 실린 글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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