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있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힘없는 여성, 아동, 장애인이 그 전형이다. 보호받아야 마땅한 순결한 이들을 타락한 '변태' 남성이 성폭행했다는 보도가 나오면 사람들은 극도로 분노한다. 이번 '나주 성폭력 사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성폭력이 언제나 이런 전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대개의 성폭력은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과 시선, 손발을 통해서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자극적인 대형사건에만 분노가 집중됨으로써 성폭력이 생기는 진짜 이유는 은폐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성추행, 성희롱, 스토킹, 음란물 배포 등도 '성폭력'
전문가들은 성폭력이란 왜곡된 성문화와 성별권력관계를 바탕으로 한 '여성 차별'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 순종해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 남성의 성적 쾌락을 위한 존재로 여기는 뿌리 깊은 여성 차별 인식이 성폭력으로 이어진단 설명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추행, 성희롱, 음란물 유포 등도 성폭력에 해당한다. 실제 성폭력 상담 현장을 들여다보면, '강간'만큼이나 '성추행·성희롱'등 다양한 층위의 성폭력도 많이 발생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낸 '2006~2010년 상담사례분석'을 보면, 전체 성폭력 상담 2949건 중 강간 피해 상담이 1207건(38.9%)로 가장 많았지만, 성추행 피해가 1117건(36%)으로 집계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이 외에도 스토킹 피해가 8.1%, 성희롱 피해가 7.5%를 차지했다.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한 성폭력 상담사례분석. 전체 성폭력 상담사례 1207건 중에서 강간 피해 상담이 1207건(38.9%)로 가장 많았지만, 성추행 피해가 1117건(36%)으로 집계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제공 |
이처럼 최근 언론에 등장하는 강력 성범죄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이임혜경 소장은 "최근 성폭력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커진 듯 보이지만, 이 관심이 강력 성범죄 이외의 다른 성폭력으로는 이어지지 않아 문제"라며 "이렇게 대형 사건만을 성폭력으로 규정함으로써 다른 성폭력에는 오히려 불감증이 생기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임윤경 연세대 문화학협동과정 교수는 "'성폭력=강간'이란 등식을 우선 깨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는 한쪽을 불편하게 하는 치근거림, 성적 농담에 대해 '애정표현'이라며 웃어넘기는 문화가 있다"며 "하지만 이런 성추행, 성희롱도 강력 성범죄와 같은 메커니즘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성폭력은 낯선 사람이 저지른다?…'직장 내 성폭력'이 가장 많아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고정관념도 비판의 대상이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2006~2010년 상담사례분석' 중 피해자-가해자 관계 현황을 보면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2297건으로 전체의 77.9%를 차지한다. 이 중 직장 내/거래처 관계에서 발생하는 피해가 546건(18.5%)로 가장 많았고, (전)데이트 관계 및 배우자에 의한 피해가 348건(11.8%)로 그 뒤를 이었다.
이 소장은 "성폭력은 낯선 사람에 의해 행해진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이라며 "실제로는 친근한 주변인에 의해서 성폭력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소위 '소시오패스'에 의한 강력 성범죄는 피해자가 신속히 신고를 접수하는 반면, 오히려 주변 사람에 의한 성폭력은 대응이 잘 이뤄지지 않아 문제"라고 말했다.
나 교수는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변변한 직장도 없는 사회낙오자란 생각은 고정관념"이라며 "실제로는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성폭력이 발생하냐"고 반문했다. 그는 "화이트칼라 남성이라고 해서 음란물을 보지 않는가"라고 되물으며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직업도 없이 방에 틀어박혀 음란물만 보는 사회부적응자란 생각은 틀렸다"고 지적했다.
"소도둑 되기 전에 바늘 도둑부터 잡아야"
<프레시안>이 만난 전문가들 대부분은 최근 성폭력에 관해 부쩍 늘어난 사회적 관심이 사회 전체가 반(反)성폭력 감수성을 키우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극악한 성폭력 사건에만 매서운 비판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성추행 등 성폭행에는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는 그대로다.
예컨대 회식 자리에서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직장 상사에게 문제제기를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여전히 "친근한 애정표현인데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구냐"는 식인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이에 나 교수는 "성추행에는 관대한 남성들이 극악 성범죄에 분노하는 것은 '나는 다르다'는 차별화 욕구"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실제로는 여성의 몸과 공간은 항상 허락 없이 침범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은 어디에나 깔려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어린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치는 '아이스 깨끼'에 대해서 우리는 분노하지 않는다"며 "엄밀하게 말하면 '아이스 깨끼'도 성추행"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아이스 깨끼와 아동성폭력은 타인의 몸을 침범한다는 측면에서 같은 폭력적 행동"이라며 "소도둑에게만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바늘 도둑에게도 따끔한 화를 내야 한다"고 전했다.
성폭력을 극악한 개인의 문제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이 소장은 "성폭력 예방과 근절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잘못된 성 인식과 성 문화를 바꾸는 것"이라며 "성폭력 발생 이유를 반사회적 남성의 억제할 수 없는 성욕으로 규정함으로써 일상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에는 더 관대한 사회분위기가 조성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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