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개봉된 영화 〈청연〉은 '조선 최초의 민간인 여류비행사 박경원'이라는 색다른 소재로 화려하게 비상하고자 한 '여배우 원톱 블록버스터'였다.
그러나 총제작비 120억 원에 3년여의 제작기간이 소요된 이 영화는 '개봉 2주차 50만 명'이라는 싸늘한 반응 속에 소리 소문없이 추락하고 있다.
〈청연〉은 시사회 후 꿈과 현실의 간극에 직면한 인간 존재의 조건과 그로 인한 번민을 식민지 여성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오마이뉴스〉의 '제국주의의 치어걸' 기사가 촉발시킨 친일논란이 '〈청연〉 안 보기 서명운동'으로 이어지면서 흥행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청연〉은 '인간의 존재조건'을 그린 영화"**
그러나 영화 주간지 〈필름 2.0〉은 16일자 기사 '친일논란 〈청연〉을 변호한다'에서 "정말 친일영화라면 영화를 본 후 일본에 우호적 감정을 느껴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러나 이 영화를 본 뒤 남는 건 절망감뿐"이라며 "감독이 그린 박경원은 시대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를 벗어나려 했으나 그것에 의해 괴멸된 인물"이라고 옹호하고 나섰다.
〈청연〉의 주인공은 어려서는 나라를 빼앗겼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녀였고 어른이 되어서는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망 외엔 다른 욕망을 품어본 적이 없으나, 곧 시대의 질곡들과 대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꿈이 곧 죽음으로 내몰리는 길임을 알게 된다.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박경원을 그리면서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건 실제의 친일 여부나 친일에 대한 미화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존재조건에 대한 자문에 가깝다.
'식민지 시기 인간이라고 민족적 열망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들 역시 이분법으로 재단되지 않는 복잡한 권력과 욕망의 뒤얽힘 속에 존재했으며 그래서 겪어야 했던 내면의 번민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영화 〈청연〉은 '명백한 악인인 타자' 대 '선한 나 혹은 우리'라는 도식에 충실한 여느 블록버스터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식민지 시기 여성'을 소재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고자 했던 〈청연〉이 과연 이렇게 매몰차게 우리 사회에서 거부당할 만한 영화인지 의문이 들던 참에, '친일/반일'의 해묵은 대립구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조선영화-소리의 도입에서 친일영화까지〉(책세상 펴냄)가 나왔다.
***'유성영화의 등장'을 기회로 뜨고 싶었던 이들**
현재 연세대 국문과 강사인 저자 이화진 씨는 "1930년대 중반은 소리가 도입된 토키(talkie) 영화의 등장으로 세계 영화사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 시기였다. 토키 영화의 등장은 당시 열악했던 제작환경 속에서 분투하던 조선 영화인들에게도 '영화의 발전과 산업화'라는 꿈을 심어주었고, 문화 엘리트인 문학인들의 위세에 눌려 있던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여보고자 하는 열망에 들뜨게 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책에서 "이전의 한국 영화사가 '나운규의 아리랑은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적 감수성을 보여준다'는 등의 서술이 보여주듯 당시 영화인들의 열망을 민족주의적인 것으로만 귀결시키면서 다양한 욕망의 색깔들이 사장됐다"고 주장한다.
초기 조선 영화들은 대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춘향전〉, 〈심청전〉등을 영화화했으나, 점차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농촌과 가난을 소재로 택하게 된다. '저항의 가능성'은 철저히 거세된 '비참'이 일종의 숙명론적인 신파로 표현되는 〈고향은 눈물이냐〉, 〈나그네 설움〉, 〈불효자는 웁니다〉는 1930년대 중반 도시화가 한창 진행 중인 경성에서 큰 호응을 얻는다.
저자에 의하면, 1930년대만큼 영화가 '조선적인 것'을 추구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한반도뿐 아니라 만주와 일본에까지 넓어진 영화시장에서 '조선적인 볼 거리'로 관심을 끌 수 있고, 조선에서도 '애족 마케팅'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적인 것으로 농촌을 영상화한 것은 낙후된 제작환경에서 최소 비용으로 최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로서는 가장 사실적인 현실재현 방식이기도 했다.
당시 〈아리랑〉, 〈나그네〉, 〈임자 없는 나룻배〉등은 '가난한 농촌 남성들이 겁탈당할 위기에 처한 아내와 딸,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한다'는 식의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가난과 무기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식민지 남성의 울분과 비애를 대변하고 있다.
***전시체제의 '선택'에 직면한 조선 영화인들**
이렇게 영화가 영향력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조선의 영화인들도 일본의 전시체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들은 급기야 1940년에 구체적인 통제방침을 밝힌 총독부의 조선영화령 앞에서 협력해 살아남을 것인가, 거부해 낙오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저자는 "이들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욕망(입신양명, 일확천금, 예술적 성취 등)을 복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부딪힌 점은 이들의 욕망이 1937년 이후 전시체제의 제국과 공모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의 문제였다"고 토로했다. 당시 영화인들에게는 일제의 '영화령'이 탄압보다는 기회인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영화인들은 흥행자본이 다시 제작자본으로 투자되지 않는 '1사1편 제작관행'을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하며 '영화 기업화론'을 선도했는데, 이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와 연동해 영화산업의 구조를 개혁하려는 당국의 영화정책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일제의 영화령은 오랫동안 방황한 영화인들이 필요로 했던 안락한 시스템에 대한 약속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인정을 받아 문학인들에 의해 폄하당하면서 갖게 된 사무친 원한을 단숨에 풀어낼 기회이기도 했다.
저자는 "물론 협력 영화인들이 아무런 고민과 죄책감 없이 쉽게 자신의 진로를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이 새로운 국면에서 그들 내부의 갈등과 균열은 절대 드러날 수 없었다. 오직 들리는 것은 제국에 협력하는 발언뿐"이라며 "발성영화 전환기에 이들에겐 굉장한 자본과 기술력, 인적 구성이 필요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그 간극에서 그들은 결국 국가로 접수돼버렸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협력을 거부한 이들의 선택이 '침묵'뿐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러나 그들이 견뎌낸 침묵의 무게와 의미가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낙오의 불안과 생존에 대한 갈망과 싸워야 했던 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저항의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았다. 막대한 자본과 기술이 필요한 집단작업인 영화는 혼자 힘으로 제작이 불가능할 뿐더러 설사 제작했더라도 배급과 상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면죄부'와 '윤리적 단죄'를 넘어**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친일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여론은 "그 당시엔 누구나 그랬다"며 쉽게 면죄부를 주거나 "시대가 그랬어도 그러면 안 되지"라는 윤리적 단죄의 극단적 대립이 반복되는 양상으로 전개돼 왔다.
저자는 우선 "그 두 가지가 유일한 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첫 번째 작업이었다"고 한다.
단답형 밑에 숨겨진 메커니즘을 되묻는 것은 결국 오늘날 우리의 욕구에 대한 질문이다. 타인에게 심판의 딱지를 붙인 뒤 자신은 안전하고 싶은 욕구를 넘어서야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성찰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제 역사는 더이상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현재가 과거를 재료로 재구성한 현재의 이야기, 즉 '현재와 현재의 대화'일 수도 있다.
곳곳에서 제기되는 이러한 '새로운 인식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출세의 욕망과 연동된 '영화(매체)와 국가 사이의 달콤한 동반자 관계'는 과연 그때 그 사람들만의 이야기인가?
***1930년대 '토키 영화'의 등장에 몰락한 '변사'**〈박스기사〉
1930년대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의 이행시기에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변사의 몰락'이다.
이들은 무성영화 시대의 영화관람의 중개자로서 "변사 보는 재미에 극장 간다"는 말까지 들으며 초기 영화의 유통과 소비에 영향을 끼쳤다. 당시 스타였던 이들은 '기술의 발전' 앞에 일대 위기를 맞았다.
더구나 이 시기는 발성영화뿐 아니라 라디오의 등장, 유성기의 출현 등 '미디어 환경'이 급변한 시기였고, 대중은 점점 육성이 아니라 매체를 통한 '듣기'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만 해도 영사기를 도입할 수 있는 극장이 적었던 데다가 '자막의 도입'이 일반화되지 않았고, 자막이 있다 하더라도 일본어 자막이라 변사의 '중개'는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일본어 식자층이 늘어나고 외래 영화의 원음을 그대로 듣고 싶어하는 감식안의 변화 등 대중의 취향이 변하면서 변사 집단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경영, 배급 쪽으로 업종을 옮기거나 경성 변두리의 무성영화 상영관 운영, 전국순회 이야기 공연 등으로 살아남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스러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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