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은, 동진호가 납북된 지 꼭 19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백령도 부근에서 조업을 하던 우리어선 동진호가 납북된 지 19년이 되던 날, 동진호의 어로장 최종석씨의 딸인, 우영씨가 노무현 대통령께 편지를 보냈는데요. 올해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19년 동안 못 달아드린 카네이션을 아버지 가슴에 달아드리고 싶다..납북자들이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11월, 동진호 선원 정일남씨가 금강산 이산가족면회 때, 남쪽의 어머니를 상봉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동진호 선원들이 돌아올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19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동진호 선원 가족들은 어떻게 보냈으며, 가족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납북자가족협의회〉최우영 회장과 함께 합니다.
1987년 1월 15일, 서해 백령도 서북쪽 28마일 공해상에서 조업을 하던 〈동진호〉가 북한 무장경비정에 의해 납치됐습니다. 그날 이후 19년 동안, 선장 김순근씨와 어로장 최종석씨 등 선원 12명은 아직도 억류되어 있습니다. 동진호가 납북되던 당시 17세 고등학생이었던 최종석씨의 딸 우영씨는 어느새 30대 중반의 나이가 됐고, 동진호의 어로장이었던 아버지 최종석씨는 환갑이 됐습니다.. 최종석씨의 딸 우영씨는 현재 〈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동진호 선원들이 귀향할 수 있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박인규 : 안녕하십니까?
최우영 회장 :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일요일 1월 15일이 동진호가 납북된 지 19년이 되는 날인데 그 날 노무현대통령께 이런 편지를 보내셨어요. 제가 읽어 보자면, "17살 고등학교 1학년 소녀가 36세 나이가 되도록 변함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다시 한번 대통령께 호소 드립니다. 적어도 납북자의 딸의 호소에 북한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국민 최종석을 잊지 않고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올해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제게도 19년 동안 달아드리지 못한 카네이션을 아버지 가슴에 달아드릴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이 깃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이런 내용이었는데요. 어떻게 해서 대통령께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하셨는지 말씀해 주시죠?
최우영 회장 : 네. 아버님이 납북되신 이후로 어느새 제 아버님은 환갑을 맞이하셨고..환갑을 맞이했지만 딸로서 아버님께 잔칫상 한 번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 답답한 심정을 김정일 국방위원장께 공개편지를 통해서 얘기했지만 북한으로부터 들려온 답은 남북자가 없다..라는 공허한 메아리였습니다.
박인규 : 북한의 김정일위원장에게는 작년 10월에 보내셨다고 하셨죠?
최우영 회장 : 네.
박인규 : 말하자면 회답이 온 겁니까?
최우영 회장 : 회답이 공식적으로 온 것은 아니지만 북한측에서 다시 한 번 납북자가 없다라고 강조를 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 가족들은 또 다시 피눈물을 흘리는 거죠.
박인규 : 이번 편지는 청와대 게시판에 올리신 거죠?
최우영 회장 : 네. 올리고 그 다음에 우편으로 편지를 보낼 생각입니다.
박인규 : 일단 청와대에서는 최우영회장이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알기는 아시겠죠?
최우영 회장 : 그럼요.(웃음) 여러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아마도 노무현대통령께서 꼼꼼히 읽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혹시 청와대에서 언론을 통해서나마 답변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최우영 회장 : 아직 없었습니다.
박인규 : 대통령께 편지를 보내신 것이 처음입니까? 지난 19년동안..?
최우영 회장 : 아닙니다. 2000년도에 남북자 가족협의회를 결성하면서 김대중전대통령께 저희들도 햇볕정책의 수해자이고 싶다는 탄원서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최우영 회장 : 그 당시에는 비전향 장기수 송환에 최선을 다하셨고, 납북자 문제는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조금 참아달라는..그런 요구가 있었습니다.
박인규 : 1987년 1월 15일에 동진호가 백령도 근해에서 납북이 됐는데요. 아버님이 납북되셨다는 사실을 언제 아셨어요?
최우영 회장 : 아버님께서 납북되신 날은 저희 할아버님 제삿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을 뺀 모든가족들과 친척들이 모여서 제사 준비를 할 때, 제 동생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아버님의 납북소식을 알렸었습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텔레비전의 속보를 통해서 아버님이 납치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가 87년 1월이면 그해 봄, 여름이 상당히 복잡하던 때였는데 그 당시 보도로는 한,두달 후에..2월에 돌려 보내겠다는 북한측의 반응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19년동안 못 오시게 된 겁니까?
최우영 회장 : 아버님이 납북되신 직후에 북한으로부터 아버님을 송환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저희 가족들은 손꼽아 기다렸죠. 그리고 저희 정부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2월초에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당시 국내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그리고 김만철씨가 탈북하던 그 사건이 1월 15일 같은 날에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박인규 : 김만철씨의 탈북도 1월 15일인가요?
최우영 회장 : 네. 1월 15일에 탈북해서 대만으로 가 있었고, 국내에서는 박종철 치사사건에 대해서 은폐하고 조작하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들이 있었죠. 그 당시에 동진호 선원을 먼저 받고 김만철씨를 데리고 왔으면 됐을텐데..그 당시에 김만철씨가 돌아왔고 북한에서는 김만철씨와 동진호의 맞교환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거부했고, 북한은 이를 계기로 삼아서 선량한 동진호를 간첩선으로 발표했고..그 때 선장 김승근씨와 아버님 최종석씨를 간첩으로 몰았습니다.
박인규 : 지금 우영씨 생각은 그 당시에 먼저 김만철 그분들의 처리를 위해서 시간을 끌면서 해결을했으면 좋았을텐데..그 당시에 처음에는 간첩이 아니라고 말했다가 말하자면 우영씨 생각은 김만철씨를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보복인 거 같다?
최우영 회장 : 그것은 저의 생각 뿐 아니라 정부 공무원들, 관계자들도 그렇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증거자료들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도 뭐라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박인규 : 그러면 87년 1월이나 2월부터 계속 다음 달은 오시겠지..다음 주면 오시겠지..그런 기대를 상당히 오래 가지고 사셨겠네요?
최우영 회장 : 2월초에 정부로부터 통보를 받기를, 북한과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당분간 아버님을 모셔오기 힘들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러한 국내외적인 그런 상황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를 못했죠.
박인규 : 아버님의 규환이 19년이 되도록 안 될 것이다..라고 그때는 생각을 해 봤습니까?
최우영 회장 :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납북되셨을 때도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가장 큰 고통은 실감이 나지 않는 법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버님이 선물 꾸러미를 가지고 집으로 오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19년이 지났네요.
박인규 : 지금 북한에 계신 아버님이 살아 계시다면 정확하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최우영 회장 : 62세이십니다.
박인규 :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계신지는 알고 계십니까?
최우영 회장 : 저도 그것을 알지 못해서 지난 19년동안 많은 탄원서와 호소를 했는데 2000년 이전까지는 국가정보원의 발표에 의해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요. 그 이후로 국, 정부 관계자로부터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나오셨고 현재는 위독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인규 : 건강이 안 좋으신건가요?
최우영 회장 : 안 좋으시다고 하시더라고요.
박인규 : 지금 열 두분이 그 당시에 같이 납북됐는데 몇 분은 잠깐이지만 그래도 남북이산가족을 통해서 만나셨거든요. 그런데 최우영씨 아버님과는 그런 기회도 없었나요?
최우영 회장 : 네. 저희는 이산가족 신청 대상이 되진 못했는데요. 동진호 선원들 중에서는 사실은 김상섭씨라든가, 양용식씨, 정일남씨 강희근씨..이런 네 가족은 만나게 됐었고요. 나머지 김영현씨, 최종석씨 저의 아버님..임국재씨는 생사확인은 됐지만 나머지 다섯 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생사확인도 되지 않아서..그 가족들이 더 피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박인규 : 아버님께서 납북되셨을 때가 43세이시면 한참 원기 왕성하시고 하실 일이 많으실 텐데요. 가정을 이루시고 집안의 생계라든가 그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어떻게 정부에서 생계비 보조라든가 하는 것이 있었습니까?
최우영 회장 : 저희는 전혀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저희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가끔씩 국정원으로부터연락오는 감시전화가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비정기적으로 전화가 왔었어요. 어머니께 전화를 해서 잘 있는지..그리고 아버님에게 혹시 연락이 있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보셨다고 하니까요. 그런 것들이 보호이겠습니까?
박인규 : 87년 이후에 민주화가 되어서 나아지기는 했는데요. 어떤 분들은 그 전에 납북되신 분 같은경우에는 말하자면 북한과 무슨 연결이 있는 것처럼 감시도 많이 받고..납북자 가족이라는 것이 피해자로서 사회의 동정이나 보호를 받기 보다는 감시와 비난의 대상 비슷하게 됐었는데요. 학교를 다니시거나 동네에서 생활하시기가 납북자 가족이라는 것이 상당한 불이익이나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최우영 회장 : 저희 아버님께서 납북되셨을 그 당시에는 저희 가족들조차도 아버님이 납북됐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에게 조차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지난 날 납북되시기 전에 아버님이 생활하셨던 그 일상생활의 모습을 친구들에게 얘기하면서, 상상의 아버지를 그리면서 그렇게 결손 가정이 아닌 것처럼 우리 가족들은 행동을 했고, 그리고 저희 가족들은 아버님이 납북됨으로서 저는 장자로서의 비록 딸이지만 장자로서 가장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제 동생은 비록 어렸지만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남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저희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가장을 생각을 하셨기 때문에 어느새 저희 집안에는 가장이 3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런 감시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 전에 어선 가족들을 보면 결혼을 할 때 그 딸의 결혼 비용이 어디서 나왔는지 수사를 하고 더 나아가서 조카들까지 전기고문을 당하는 그런 아픔을 겪었습니다.
박인규 :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님이 납북되셨기 때문에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실 텐데요. 최종석씨..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아버님과 생활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셨는지요?
최우영 회장 : 네. 저희 아버님은 아주 자유 분방하시고 호탕하셨어요. 그리고 위트가 넘치셨는데요.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납북되시기 전에 저희 가족들끼리 가족여행을 갔었어요. 그런 것들과..그리고 아버님께서 배를 타고 나가시기 때문에 매일매일 우리들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가끔씩 편지를 쓰셨어요. 그래서 그 편지는 아직까지도 제가 가지고 있는 보물 중에 제 1호로 가지고 있는데요. 편지를 늘 쓰셨고 가끔씩 전화도 해 주시고 그냥 평범하신.. 사랑하는 아버지예요.
박인규 : 작년에 최우영씨가 어머니와 함께 임진각 근처 소나무에 노란 손수건 400여장을 매달기도했다는데 원래 노란 손수건이라는 것이 그런 팝송도 있지만 귀환을 바라는 그런 뜻으로 하신 겁니까?
최우영 회장 : 네. 노란 손수건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고 언제까지 기다리겠다는 사랑의 메시지 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아버지를..아버지가 만약 38선을 건너서 오신다면 저희 가족들이 그동안..19년동안 아버지를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임진각 근처 소나무에 노란 손수건 400장을 가족들과 함께 걸게 되었습니다.
박인규 : 혹시 아버님께서 이 방송을 들으실지 가능성이 높지는 않겠지만 혹시 아버님께 이 말씀이 갈 수 있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고 싶으세요?
최우영 회장 : "사랑하는 아버지, 아빠를 모셔오기 위해서 딸이 노력을 하는데 너무 장벽이 많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아버님을 모셔오지 못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딸이기 때문에 그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끝까지 아버님을 모셔올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님도 희망을 잃지 마시고 꼭 살아만 계십시요. 부디 살아만 계신다면 이 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박인규 : 네. 살아만 계셨으면 좋겠네요.
박인규 : 지금부터는 납북자 가족의 단체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고, 무엇을 가장 원하고 있는지..이런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현재 납북자 가족협의회 회장이시죠?
최우영 회장 : 네.
박인규 : 본인이 직접 만드신 겁니까? 말하자면..
최우영 회장 : 네. 2000년 2월 28일에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박인규 : 어떤 계기로 하시게 됐어요?
최우영 회장 : 정부를 믿고 기다렸는데 98년도에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셨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더 이상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일본인 납치인 가족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국내에서도 저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서 호소를 하면 가족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2000년 2월 28일에 일곱 가족이 모여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구성원은 선원 가족들도 있고, 유학생 이재환씨 부모님들을 비롯해서 학생들..그런 다양한 가족들이 모여서 우리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죠.
박인규 : 지금은 몇 가족이 계십니까?
최우영 회장 : 지금 현재로서는 50여명의 가족이 저희 협의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저희 프로그램에 납북자 가족모임이라고 있더라고요? 최성룡회장이 한 번 나오신 적이 있거든요. 납북자 가족모임과 납북자 가족협의회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해 주시죠?
최우영 회장 :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단체가 납북자들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위해서 활동하는 단체들이고요. 차이를 둔다면 납북자 가족모임의 최성룡대표님은 탈북한 납북자들이든지, 국군포로까지 구출해 내는 그런 일을 하십니다.
박인규 : 중국에 들어가서 지낸다고 하시던데요?
최우영 회장 : 네. 그런 일을 하고 계시고 저희 협의회에서는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박인규 : 그렇다면 한국정부에 대해서 뭔가 촉구하는..?
최우영 회장 : 네. 국가가 정정당당하게 대한민국 국민들을 데려올 것을 촉구하는 그런 취지로 하고 있고, 또 하나는 저희는 일본과 연대를 좀 더 강화하고 그리고 미국이라든지..그리고 이 문제가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충분하면 좋은데 아직까지도 이 사회에서는 납북자 인권에 대한 인식이나 그리고 활동이 미약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국제적으로 함께 하는데 주력을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지금 일본에 납치자 가족 단체가..제가 알기로는 세군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와 연대라고 할까요? 협력을 하고 계십니까?
최우영 회장 : 네. 99년도부터 해마다 국민 대집회를 도쿄에서 하고 최근에는 12월 22일에 그때 갔었는데 레바논납치 가족들과 함께 납북자 송환을 위해서 국제 연대를 결의하고 왔습니다.
박인규 : 지난 2004년 4월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납북자 가족 인권침해에 관한 실태파악과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라는 권고안이 나왔습니다. 이 권고안을 낼 때까지 납북자 가족들이 상당히 힘을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인권위원회의 권고안이 지금 진척이 되고 있나요? 실태파악이라든가, 송환을 위한 노력이 있습니까? 정부차원에서?
최우영 회장 : 참 너무 안타까운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이러한 인권침해에 대한 실태파악을 하고 권고안을 끌어 냈다고 하는데 의미가 있죠. 역사적으로요. 그 실태파악의 내용을 보면 실태파악을 할 수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실태파악이 어렵다고 나와 있고..
박인규 : 북한의 비협조인가요?
최우영 회장 : 아니요. 납북자 가족의 현 상황에 대해서 파악이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박인규 : 한국에 있는 납북자 가족들이 얼마나 있는지 아직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됩니까?
최우영 회장 : 파악을 잘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대략은 할 수 있는데 대략의 추측은 지난 2000년도에도 충분히 가능했던 사항이고 지금 세월이 2006년을 접어드는 이 상황에서 485명이 납치됐다는 것은 알고 있고..그런데 그 가족에 대해서 전반적인 정확한 납북자 가족들의 인적이 사항이 나와 있지 않은 상황이예요. 그래서 저희 가족단체에서 그 동안에 납치 피해 사례를 적어서 전달했던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그런 사항들을 토대로 해서 국가 권고안을 냈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저희들에게 다시 추가될 수 있는 내용이 있는가에 대해서 다시 돌아오는 상황을 보면서 아직도 이 문제가 참으로 어렵구나..왜 피해자 가족들이 일상의 직업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고, 저희들은 NGO단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피해자가족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국가가 나서서 그 가족들의 피해 사례를 본격적으로 알아낼 수 없는 상황..그리고 그런 것들이 안 된다고 하면 법 제정이라도 되어야 하는데 2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죠. 납북자 문제는 남북간의 협상의 카드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어려운 난항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를 하고 예측을 할 수 있지만 납북자 가족의 문제는 국내의 인권의 문제란 말입니다.
박인규 : 납북자 송환은 나중에 하더라도 국내에 있는 납북자 가족들이 몇 분이나 계시고 어떤 상태에 계신지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냐..그런데 보시기에 국회나 정부나 모두 좀 열성적이지 않은 거 같다?
최우영 회장 : 네. 왜냐하면 열성적으로 하시고 그 지난날 김대중 정권보다는 훨씬 더 노력을 많이 하시지만 실질적으로 납북자 가족들이 혜택을 많이 받거나, 그 생활이 바뀌거나 그런 것들이 구체적으로는 나오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좀 더 내실 있는 성과를 바랍니다.
박인규 : 지금 김대중 정부부터 햇볕정책이라고 해서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이런 많은 움직임이 있거든요. 그러면서 아마 역대 정부에서는 납북자 문제보다는 남북간의 화해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냐..라고 해서 약간은 작은 문제로 치부하려는 것 같은데요. 그런 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우영 회장 : 비전향 장기수 송환을 할 당시에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를 상징이 비전향 장기수 송환이었습니다. 그런 연장선에서 본다면 이 문제도 정치적인 사안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권의 문제,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아주 그야말로 이러한 지난날에 풀리지 못했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이고 그리고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정부측에서도 이해를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인규 : 그 북한 출신 장기수이면서도 아직 전향 장기수이기 때문에 북한에 돌아가지 못한 김영식씨라는 72세의 할아버님께서 최우영씨에게 편지를 보내서 "나도 딸이 북한에 있다. 당신이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간다."라는 편지를 전하셨다고 하는데요. 말하자면 최우영씨는 북에 아버지를 두고 있는 딸이고, 김영식씨는 북에 딸을 두고 있는 아버지인데 두 분이 만나려고 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김영식께서 못 만나겠다고 하셨다는데요. 왜 그렇게 된 겁니까?
최우영 회장 : 글쎄요. 조금 부담스러웠던 부분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그 딸을 북에 두고 와서 제가 노란 손수건을 다는 모습을 보시고 많이 우셨대요. 그런 상황을 보면서 이런 비극들이 모두 없어져야 한다는 마음..그런 심적인 이해를 하게 됐어요. 다만 우리 정부가 제가 바라는 것은 비전향 장기수에게 최선을 다했듯이 그 이상..우리 가족이니까..우리 가족이니까..납북자 가족들을 좀 더 챙겨준다면 그들에게 좀 더 따뜻한 호응이 들어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박인규 : 최우영씨는 비전향 장기수를 보고 북으로 보내는 것에 대한 자체를 말하자면 유감이 없으시다..그런 겁니까?
최우영 회장 : 네. 유감은 없는데..
박인규 : 비전향 장기수를 우리는 보냈는데..동진호 선원 같은 경우는 지금 북한에서는 간첩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거죠?
최우영 회장 : 네.
박인규 : 그런 부분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건데..많은 국민들이나 가족들에 입장에서는 피해자라고 보시는 건데요. 왜 이것이 잘 안 되고 있는 걸까요? 어떤 수순으로 풀려가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최우영 회장 : 두 가지로 축약할 수가 있는데요. 첫 째는 북한이 우리를 진정한 한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왜냐하면 가깝고도 먼 일본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송환해 준 선례가 있고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민족, 한겨레인 한국의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남북자가 없다는 말만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이 문제가 있든지, 두 번째로 북한에도 비전향 장기수를 송환했고 그리고 고이즈미 총재도 일본인 납치 가족들을 데리고 왔어요.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왜 그것을 하지 못하는가? 북한보다 못하고 일본보다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이 납북자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금방 해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아주 일부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어류 작업을 하시다가 말하자면 간첩임무를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받으신 분도 계시고 또 우리 쪽에서 북한의 인사를 남북이 아니라 남한의 경우도 있고..그런데 우리가 우리 쪽의 어떤 그런 뭐라고 할까요? 잘못이라고 할까요? 그런 부분을 밝히지 않고 있다..말하자면 남북한 정부가 서로 약점이 많아서..일반 국민들이고 별로 힘이 없는 사람들이니까..우선 순위에서 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이런 말들도 하더라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요?
최우영 회장 : 여러 가지 과거사들이 있고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있는데 분명한 것은 동진호가 북한에 존재하고 그리고 희영호, 오대양호 그 선원들이 사진에 찍혀 있고 묘향산에서 찍은 사진이 발견이 되고 그리고 KAL기 납치된 가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로 이해를 한다면 그 당시의 어떤 영역에 대한 문제라든지..그런 것들은 넘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납북자 가족 입장에서는 사실 정치, 이념, 체제..이런 것들을 떠나서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만나는 것이 최대의 소망이겠죠? 그것을 위해서 지금 남과 북의 정부에 대해서 납북자 가족을 대표해서 말씀해 주시죠?
최우영 회장 : 지난 날에는 남북한 최고 지도자급에서 비전향 장기수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는 남북한 최고 지도자급에서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해 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그리고 두 분만이 이 문제에 대해서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남의 노무현 대통령이나 북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최우영씨 말씀을 듣게 되실 기회가 있고 인권차원에서 가족을 찾으시는 좋은 결과가 되도록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최우영 회장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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