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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t love dogs? 혹은 Because of do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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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t love dogs? 혹은 Because of dogs?

[오동진의 영화갤러리]

올해가 꼭 개의 해여서가 아니라 평소에도 강아지가 나오는 영화라면 사족을 못쓰는 편이다. 예컨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가 카를로 카를레이 감독의 〈플루크〉일 정도로. 이 영화는 아버지인 매튜 모딘이 개로 환생해서 가족을 지켜준다는 얘기다. 플루크는 이 강아지가 아빠인지 모르는 아이가 붙여준 이름이다. 아들을 지키려는 '플루크=아버지'의 노력이 얼마나 눈물겹던지 아마도 한 열 번쯤 영화를 봤으면서도 다시 볼 때마다 꼭 훌쩍대곤 한다.

개는 그런 존재다. 아니, 그렇게 얘기하면 안되겠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있어 개는 그런 존재다. 털 달린 동물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많으니까. 하지만 가깝게 지내는 친구 한 명처럼 사람들이 '개'를 접두어로 해서 만든 욕설조차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정도로 강아지만 보면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사람도 있다. '개'로 욕을 만들다니. 그건 개를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세상에 개만큼 착하고, 의리 있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동물이 어디 있을진대 인간들이 그런 어휘를 만들어 냈느냐는 것이다. 하기야, 지금은 뉴욕에 있는 딸과 함께 지내는 내 강아지 두 마리도 내가 뉴욕에 갈 때마다 만나니까 1년에 한번 볼까 말까 할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그곳 딸 집에 도착해서 택시에 내리는 순간, 벌써부터 창가에 찰싹 달라붙어 반갑게 짖어대곤 할 정도니까. 많은 사람들과 헤어졌고 또 서로 등을 돌렸으며, 세월이 가면서 서로들 저절로 잊으려 애쓰며 살아 가지만 이 강아지 두 마리만큼은 절대 그런 일이 없다. 언제 봐도 이들에게 있어 나는 반가운 존재다. 그래서 이 두 마리 강아지가 반갑게 품안에 뛰어들 때마다 감동을 받곤 한다. 세상을 살면 살아 갈수록 이런 감동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한다.

극장가에서는 완전히 버림받았거나 아예 극장에 내놓을 생각조차 못한 두 편의 영화 〈비밀과 거짓말의 차이〉와 〈웨인 왕의 윈 딕시〉같은 영화는 이 세상에는 개에 관한 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밀과 거짓말의 차이〉의 원제는 'Must love dogs'다. 주인공인 새러(다이안 레인)와 제이크(존 큐잭)는 각각 얼마 전 이혼해서 혼자 살아가는 남녀다. 두 사람은 주변의 등쌀에 못 이겨 천생연분닷컴이란 사이버 공간을 통해 결국 오프라인 만남까지 이루어지는데 이때 두 사람이 만나는 조건이 되는 것이 '머스트 러브 독스', 그러니까 개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 되는 것이다. 제목만으로도 나 같은 사람은 이 DVD를 냉큼 집어 들게 된다. 그래 맞다. '머스트 러브 독스'여야 한다. 지금의 세상이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로만 가득차 있다면 이렇게까지 개판이 돼있지 않았을 것이다. 윽, 실수했다. 개판이라니. 친구가 들으면 또또또, 라며 혀를 끌끌 찰 일이다.

〈웨인 왕의 윈 딕시〉는 오팔이라는 이름의 10살짜리 소녀와 윈 딕시라는 이름의 강아지와의 우정을 그린 내용의 영화다. 에구, 이런 식으로 영화 줄거리를 소개하는 건 매우 진부한 노릇일 터이다. 오팔은 세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플로리다주 시골의 한 작은 마을인 나오미란 곳에서 개척교회를 운영하는 목사다. 어머니가 없는 10살짜리 소녀의 일상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겠는가. 그러던 어느날 윈 딕시라는 이름의 슈퍼마켓에서 자기처럼 버림받은 개를 만나게 된다. 오팔은 이 개에게 단박에 슈퍼마켓의 이름을 붙인다. 나오미 마을은 이렇게저렇게 침체된, 우울한 마을이다. 사람들의 일상은 지루함과 무심함, 경계심과 불안감, 각박함으로 가득차 있다. 얼마 전 교도소에서 나와 펫 숍을 운영하고 있는 오티스(데이브 매튜스, 록그룹 데이브 매튜스 밴드의 바로 그 리드 보컬)도 그렇고 시력을 점점 잃어가며 고립돼 살아가는 흑인 노파 글로리아(시실리 타이슨)도 그렇다. 외롭게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 미스 프래니(에바 마리 세인트)의 삶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목사인 아빠(제프 다니엘스)의 삶도 독실한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늘 흔들거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팔과 윈 딕시는 삶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다. 사람들은 같이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살아갈 때 힘을 얻는다는 아주아주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진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미스 프래니가 오팔에게 나오미 마을의 옛 전설을 들려주는 대목은 이 영화가 어떤 진심을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마가렛 미쳴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대해 대화를 하던 중에 프래니 여사는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자신의 할아버지 얘기를 하게 된다. 그 할아버지는 전쟁 중에 지옥을 경험했고, 마을사람들의 슬픔이 너무 커서, 그들을 위로해 줄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사탕공장을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달콤한 사탕으로라도 고단한 삶을 잊게 하려는 마음에서다. 그런데 그 사탕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슬픈 마음이 배어 버리게 되서 사탕을 입에 넣으면 이상하게도 슬픔의 맛이 느껴지게 됐다는 것이다. 마치 판타지 동화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영화 속 프래니 여사의 이 얘기는 우리의 삶이 결코 쓴 맛 하나 혹은 단 맛 하나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그 모든 감성과 경험의 집합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프래니의 얘기를 들은 열 살짜리 소녀 오팔은 어느 비오는 날 집을 잃어버린 윈 딕시를 찾아 헤매면서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아빠의 얘기에 발끈하며 이렇게 얘기한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슬픔을 나누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그래서 결국엔 기쁨을 나누는 일조차 까맣게 잊고 살게 됐다고. 오 할렐루야.

〈웨인 왕의 윈 딕시〉의 원제는 〈Because of Winn-Dixie〉다. 직역하면 '윈 딕시 때문에'라는 얘기다. 사람들의 인생은 어떤 계기 때문에 변화를 겪게 된다. 그건 영화 한 편 때문일 수도 있고 사랑에 빠지게 된 상대방 때문일 수도 있으며, 갑자기 나타난 하나님 때문일 수도 있거나, 도스토예프스키나 혹은 폴 오스터 같은 작가의 소설책 한 권 때문일 수도 있다. 비커즈 오브 윈 딕시. 물론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인생관이 확 바뀌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다만 그 계기와 전환점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삶은 늘 그 깨달음이 문제다. 하지만 적어도 내 친구의 경우엔 이렇게 왕왕댈 것이다. 무슨 소릴! 강아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일상을 얼마나 바꾸는데! 그러니 당장이라도 강아지 한 마리 키워 볼 일이다. 그렇게 누군가와 나누는 삶을 한번 살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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