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파탄"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파탄"

김민웅의 세상읽기 〈179〉

〈절개된 라틴 아메리카의 정맥(Open Veins of Latin America)〉. 우루과이의 언론인이자 지식인인 에두아르도 갈레노가 쓴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입니다. "정맥이 절개되었다"라는 제목이 붙은 까닭은,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생명이 피를 흘려 온 지난 세월을 고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핏줄을 쪼개 열어젖혀 흡혈의 야만을 저질렀던 것은 유럽과 미국의 백인 제국주의였습니다.

그 찢겨나갔던 라틴 아메리카의 혈관이 다시 자신의 맥박에 따라 뛰고 있는 것을 우리는 최근 목격하고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좌파 정치집단의 집권은 다만 좌우로 나눌 수 있는 정치지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간 이 대륙이 백인 제국주의에 빼앗겼던 것을 되찾아오는 치열한 과정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분노의 그림자(Shadows of Tender Fury)〉는 멕시코 치아파스 농민 봉기의 선봉에 서 있는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편지와 각종 선언문의 모음집 제목입니다. 두건을 둘러써서 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멕시코 어느 대학의 교수 출신으로만 알려져 있는 이 게릴라 부대 지도자는 오늘날 멕시코 전역을 순회하면서 민중들과 만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정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그의 편지를 통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산이 우리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들으라.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자. 자유,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 만세!" 그는 지구촌 인류에게 부와 자유를 약속한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멕시코 농민들을 어떻게 빈곤으로 몰아넣었는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부한 자에게는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가난한 이들에게는 더욱 깊은 좌절과 절망을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결국 믿을 것은 이로 말미암아 피해를 보고 있는 민중들 자신들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연대와 결속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 힘을 창조한다는 믿음을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지치지 않고 맹렬히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뉴욕 시립대학의 교수이자 뛰어난 인문학자 데이빗 하비(David Harvey)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결국 지배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권력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한 전략"이라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한 탁월한 경제사가 칼 폴랴니는, "자유란 두 가지가 있다, 좋은 자유와 나쁜 자유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쁜 자유"란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합니다. "좋은 자유"는 "양심의 자유, 정의를 추구할 자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유"들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최근 정치적 변화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파탄에 이르고 있음을 말해주는 역사적 징후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어 왔던 민중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더 이상 불가피한 현실이 아님을 선언한 새로운 대안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권리를 봉쇄한 채, 강하고 부한 자들의 권력만을 보호하는 정치권력은 시대적 사망선고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정치와 권력은 분노와 좌절을 키우는 용광로가 됩니다. 목소리 큰 자들이 이기는 세상에서 진정한 희망은 질식합니다. 절개된 혈관을 수습하고, 분노의 그림자를 거두어내는 그런 우리의 선택과 의지가 절실한 요즈음입니다. 정치공학이 난무하는 시절이 하수상합니다. 그걸 주도하는 세력의 운명, 그 끝은 파탄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