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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 아동에게 이래도 되나?

['성폭력', 제대로 이야기하기·④] 성폭력 피해자 상처 헤집는 '객관성의 덫'

나주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아동성폭력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조두순 사건에 이어 또다시 끔찍한 일이 발생하자 분노 여론은 한층 거세졌다. 경찰과 국회는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김기용 경찰청장은 지난 3일 성폭력 전담부서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국회는 '아동·여성 성폭력특별대책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온 사회가 아동성폭력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하지만 모든 아동성폭력 피해자에게 이처럼 많은 우군(友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사실을 오랜 기간 숨기다 뒤늦게 털어놓기도 한다. 이 경우 외상 흔적 과 같은 '물증'은 이미 사라진 뒤다. 수사·재판은 양측의 엇갈리는 진술만으로 진행된다. 결국 피해사실 입증은 오롯이 피해아동의 몫으로 남는다.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시작한 재판은 어느새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따지는 싸움터로 변한다.
▲ ⓒ뉴시스

"아빠가 해코지할까봐 법원에서 제대로 말할 수 없었어요"

지난달 27일 만난 지연 양(가명·13)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지연 양은 친부로부터 2년 여간 지속해서 성폭행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뒤늦게 피해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남편 A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재판 과정은 끔찍했다. 지연 양을 둘러싸고 어른들은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피해 날짜, 기간, 횟수, 장소, 성폭력 방식, 가해자의 언행, 가해자 신체의 특징, 여태껏 침묵한 이유 등 질문 리스트는 끝없이 이어졌다. 모두 지연 양 주장이 믿을 만한지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지연 양은 저편에 묻어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차 떠올리고 입 밖으로 꺼내야 했다.

하지만 지연 양은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지연 양은 성폭행 기간과 횟수를 하나 둘 추가해 나갔다. 피해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신체 특징을 묘사하라는 요구에는 고개를 숙였다.

재판부는 지연 양의 '오락가락'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충격적이었을 성폭행 경험을 진술하면서 피해 기간이나 횟수를 번복하는 것은 단순한 착오라고 볼 수 없어 신빙성이 낮다"고 밝혔다.

이 같은 진술번복에 대해 지연 양은 처음부터 피해 사실을 전부 말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한다. 가해자로 지목된 A씨가 자신과 엄마를 해코지 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진술번복? "<도가니> 아이들도 번복하지 않았나"

영화<도가니>의 배경이 된 인화학교 피해자도 지연 양처럼 가해자의 해코지가 두려워 2005년 초기 수사 당시 진술을 번복했었다. 그해 6월 인화학교 사건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자 가해자인 C씨는 피해자 B양의 상담소 피해 진술을 번복시키기 위해 평소 B양이 두려워하는 D양에게 진술번복을 사주했다. 지시를 받은 D양은 야간시간에 세탁기를 이용해 B양을 폭행했다. 결국 2006년 검찰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없고 목격자가 없다는 이유로 C씨를 무혐의 처분했다.

아동성폭력 피해자가 진술을 번복하는 이유는 이 외에도 다양하다. 정말로 당시 상황을 잘 기억나지 않았다고 호소하는 피해자도 있다. 또 재판에서 피해사실 여부를 의심받을 것이 두려워 사건을 과장,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고 알려진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이경환 변호사는 지난해 11월 여성가족부가 주최한 '성폭력 처벌, 법·제도 개선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충격으로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안정되면서 구체적인 정황이 기억나기도 한다"며 피해사실 진술이 추가, 확대될 수 있음을 설명했다.

이 변호사는 또 "가해자는 당연히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쉽게 예상하지만, 피해자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이 있다"며 "하지만 피해자도 자신에게 가해질지 모르는 비판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사실을 과장하거나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일부 진술이 일관되지 못하거나 거짓말을 한 경우라도, 동의 없이 성관계가 진행됐다는 일관된 진술이 있다면 전체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법정 모습 ⓒ연합뉴스

'신빙성' 거론하며 "구체적 묘사" 요구하는 사법체계

사법체계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피해 아동에게 2차 피해를 남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2008년 7월 대법원은 어린아이는 외부로부터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피해아동의 진술은 엄격히 해석해야 한다는 판례를 남겼다.

대법원 형사 3부(주심 김영란 대법관)는 판결문을 통해 "아동은 피암시성이 강하고, 상상과 현실을 혼동하거나 기억내용에 대한 출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며 "피해 사실에 관한 세부내용 묘사가 풍부한지, 사건·사물·가해자에 대한 특징적인 묘사가 있는지 등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활동가는 이 판례를 두고 "상담 현장에서 만난 많은 피해자들은 성폭행 당시 가해자를 일절 쳐다보지 않거나 눈을 아예 감고 있었다"고 꼬집었다. 성폭력 피해 경험을 재판부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단 얘기다.

상담활동가는 "잘못된 판례가 대법원에서 한 번 나오면 하급심에 곧바로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사법체계가 성폭력을 묵인·조장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비판했다.

법은 객관적이다? "남성 중심 문화에 젖은 법조인들"

성폭력 피해자들이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곳은 사법부다. 피해자는 사법부가 피해 사실을 경청하고 가해자를 처벌함으로써 안전한 생활로 복귀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한국 사법체계와 법조인들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시각을 가지며, 성폭력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활동가는 "믿었던 법원에서마저 피해 사실 자체를 의심받고 제2의 고통을 받고 있는 피해자들은 상담현장에서 많이 보았다"고 전했다.

2003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실시한 '법조인의 성별의식 연구'를 보면 법조인들의 사고가 남성 중심적인 사회 문화에 상당한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에 따라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의 경험과 의식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 상담활동가는 "법원이 성폭력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피해여성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며 "그동안 우리의 법체계가 성폭력 피의자(피고인)를 중심으로 고려했다면, 이제 피해자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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