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은 늘 소란스럽다. 정책결정 과정에서 이권관계에 있는 이들의 크고 작은 다툼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설사 결정이 내려진다 해도 장기간 큰 후유증을 남기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한약분쟁이나 의약분업분쟁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의 입장은 마치 소금장수 아들과 짚신장수 아들을 둔 동화 속 어머니의 처지와 비슷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고민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됐다. 정부가 올해 4월 '갈등관리'라는 조금은 낯선 개념 아래 도입했던 시범사업이 첫 성공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정부-한전-업계, '조정위원회' 통해 갈등 해소**
산업자원부는 12일 오후 과천 정부청사에서 정부-한전-업계 대표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자식 전력량계 검정유효기간 갈등조정'에 대한 최종 서명식과 평가토론회를 개최했다. 국내에서 정부정책 결정 이전에 민과 관의 관계자들이 사전에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 갈등요소를 제거하기는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이들 3자가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애초 한전 측은 원격검침 등 전자식 전력량계의 이점 때문에 보급 확대를 추진하면서 연간 500여억 원대의 교체수리비를 절감하고자 전자식 전력량계의 검정유효기간 연장을 강력히 희망했었다.
전자식 전력량계의 검정유효기간은 1993년 '계량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7년으로 규정돼 있었으나 그동안 전자기술 발전과 품질향상 등이 있었고, 더군다나 기계식 전력량계(유도형)는 검정유효기간이 15년으로 돼 있어 업계를 중심으로 불공정하다는 민원이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었다.
특히 전자·기계식 전력량계 생산업체들은 각각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이 길어져 장기적으로 매출이 감소된다" "전자식의 경제성이 향상되면 기계식의 시장점유율이 떨어진다"며 검정유효기간 연장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고, 수리업계 또한 교체수리 물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에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관련 시행규칙을 관장하는 산자부 입장에서는 검정유효기간 조정에 필요한 마땅한 근거자료가 없는데다 업종간은 물론 같은 업종 내에서도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려 통상적인 법규 개정절차로 추진하다가는 자칫 더 큰 갈등만 초래할 소지가 높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고민하던 정부는 올해 3월 국무총리실이 주관하는 갈등관리 시범사업으로 이를 지정해 본격적인 조정에 나섰다. 미 연방정부가 1984년 도입했던 '협상에 의한 법규 제정(Negotiated Rulemaking)' 프로그램을 본떠 관련 쟁점을 해소하고 갈등을 예방하는 절차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었다.
5월 들어 갈등영향 분석이 이뤄졌고, 같은 달 30일에는 '전자식 전력량계 검정유효기간 조정위원회(위원장 강영진·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겸임교수)'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조정위원회에는 산자부, 한전, 전자·기계식 생산업계, 수리업계 대표자 등 모두 14명이 참여했다. 업계는 이들 대표자들의 결정사항(위원회 최종합의)을 수용하기로 서약했다.
조정위는 그 뒤 6~9월 사이에 네 차례의 전체회의와 연구조사 작업을 거쳐 마침내 9월 28일 만장일치로 최종합의에 도달했다. 합의내용은 현행 7년으로 돼 있는 전자식 전력량계의 검정유효기간을 10년으로 연장하고, 산자부는 내년 상반기 계량법 시행규칙 개정 때 이 합의사항을 존중해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갈등영향분석에서 한전과 일부 전자식 업체는 검정유효기간의 연장(15년)을 강력히 원한 반면, 수리업계를 비롯한 대부분의 업체들은 현행유지 또는 하향조정(5년)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조정위 참석자들은 우선 전자식 전력량계의 예측수명(내구성)을 검정유효기간 조정의 주요 기준으로 삼기로 합의하고, 그 판단 기준과 근거자료의 수집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연구조사 결과, 전자식 전력량계의 평균수명은 14년으로 산정됐고(이론수명은 11.6년), 이를 토대로 전자식 검정유효기간은 10년이 적정선이라는 데 만장일치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었다.
***강영진 위원장 "갈등상황, 정부 주도보다 '협치(協治)'로 풀어야"**
강영진 위원장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와는 달리 근래에는 이해당사자들이 정부의 결정에 불만이 있을 때 집단행동 등으로 즉각 표출하는 상황이고, 이번 경우도 자칫 심각한 갈등양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며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쟁점사안에 대해 무리한 타협책을 짜내는 방식을 지양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당사자들이 함께 문제 해결의 기준을 정립하도록 한 것이 원만한 합의를 도출하게 된 성공요인이었다"고 평가했다.
강 위원장은 또 "이번 사례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법규를 제정 또는 개정하는 기존 방식에서 '정부-시장(기업)-시민사회' 3자가 협동적 관계로 갈등을 해결·예방하고 공익을 구현해가는 협치의 전형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며 "정부의 정책 또는 법규 제·개정을 둘러싼 갈등이 빈발하고 그에 따라 갈등예방적 접근법이 절실히 요청되는 현실에서 이러한 모델은 적용범위가 넓고 효용성이 클 뿐만 아니라 특히 산업 관련 정책과 제도를 관장하는 산자부에서 활용의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한편 정부는 지난 4월 '공공기관의 갈등관리에 관한 기본법(갈등관리법)'의 법안을 입법예고한 데 이어 5월 국회에 관련 법률안을 제출해 놓고 있다.
정부는 갈등관리법의 제정 취지와 관련해 "갈등은 민주화·다원화된 사회에서 일상화된 하나의 사회현상이 돼 가고 있다"며 "공공갈등이 소모적인 논쟁으로 전개될 경우 사회적 낭비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행정기관이 공공정책 등의 추진과정에서 적용할 갈등의 예방과 해결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갈등관리법에는 소관 행정기관 장의 책임 아래 △갈등영향 분석 실시 △갈등관리위원회 설치 △갈등조정회의 설치 등 행정기관이 갈등의 예방과 해결을 위해 거쳐야 하는 행정절차에 관한 사항이 담겨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