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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우리말 사전'에 인생을 걸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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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우리말 사전'에 인생을 걸었나?"

[신간]'최초의 우리말 사전 탄생' 밝힌 <우리말의 탄생>

"이거…. 이러다가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것 아니야?"

해방 후 국어사전의 원고를 되찾는 일은 조선어학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돼 있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은 함흥 감옥에서 석방돼 8월 19일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경찰에 압수됐던 원고를 찾기 시작했다. 원고를 찾지 못하면 그동안 우리말 사전 발간을 위해 기울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일본 경찰이 버리고 간 '조선어사전 원고뭉치'**

그런데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13일 지금의 서울역인 경성역의 조선통운 창고에서 그 원고뭉치가 가까스로 되살아났다. 해방을 앞두고 화물을 정리하던 인부들 사이에서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적힌 상자 앞에 역장이 발길을 멈추었던 것이다. 그 역장이 건네준 2만6500여 장 분량의 조선어사전 원고뭉치. 그것은 조선어학회가 1929년부터 진행해 온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의 결실이었다.

원고뭉치가 일본 경찰의 손에 넘어간 지 3년 만에 조선어학회의 품으로 돌아온 이 순간 우리말 사전 발간작업은 순풍에 돛 단 듯했고, 1947년 10월 9일 마침내 20년 동안 민족적 사업으로 추진돼 온 <조선말 큰 사전>의 첫째 권이 출간됐다.

우리말 사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50년사'를 집중 조명한 <우리말의 탄생>(책과함께, 최경봉 지음)에는 사전 편찬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 등장한다.

근대적 소통구조 확립을 위한 모국어 정리사업의 역사는 식민지 시절에도 면면히 이어져 왔지만, 그 시절에는 나라 없는 백성의 모국어를 정리하는 작업이 순탄할 리 없었다. 그 길은 대단히 길고 험난했으며 곡절도 많았다.

***사전 편찬자들의 좌절과 고통, 희열과 기쁨**

그 무엇이 조선어학회 사람들로 하여금 옥고를 감내해 가면서까지 그 험난한 길에 발을 들여놓게 했으며, 그리고 다시 훗날 그 무엇이 그들의 후예들로 하여금 끝을 알 수 없는 사전 편찬의 길에 들어서게 했을까?

국문 정리의 방향을 잡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한 이봉운과 지석영, 근대 국어학의 대부 주시경, 직접 사전을 편찬한 조선어 교사 심의린, 평생 모은 사전 원고를 조선어학회에 기증한 이상춘, 일제 하에서 초토화된 조선어학회의 추락을 지켜보기 힘들어 자살한 신명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윤재….

원광대 국문학과에서 국어학을 가르치는 저자 최경봉 씨는 1907년 국문연구소 설립부터 1957년 조선어학회의 후신인 한글학회에서 <큰사전>이 발간되기까지 50년에 걸친 사전 편찬사를 이 책에 담았다. '힘들게 캐낸 원석을 가공해 아름다운 보석을 만드는 과정'을 거친 이들의 좌절과 고통, 완성의 희열과 기쁨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글날을 맞아 출간된 이 책은 '사전의 탄생', '길을 닦은 사람들', '사전의 모습', '좌절과 전진의 세월', '30년', '조선어학회 사람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보여주며, 조선어학회 사람들이 조선의 교사나 학생 같은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방언을 수집해 정리하던 일, '서울의 중류 계층에서 사용하는 말'이 표준어가 되기까지의 과정 등을 흥미롭게 풀어놓고 있다.

***꼭 '중류 계층의 말'이 표준어가 되어야 했을까?**

다양한 방언으로 이뤄진 모국어를 통일하는 것은 중앙집권적 통치형태를 가진 근대국가의 공통과제다. 해방 직후에 조선의 표준어는 조선시대 500년간 수도이자 문화의 진원지였던 서울의 말이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으나 '중류계층의 언어여야 한다'는 규정은 당시 사전 편찬자들을 상당히 괴롭혔던 문제다.

저자는 "중류계층의 언어 범위에 명확한 구분이 없을 뿐더러 노동자와 농민 계급의 말에 고유어가 많이 남아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중류계층'이라는 규정은 우리말을 살릴 의무가 있는 조선어학회의 자가당착이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정치ㆍ경제ㆍ문화적 영향력을 지닌 부르주아의 말이 근대 국가의 표준어가 되는 상황은 식민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표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어느 국가에서나 나타나는 일반적 어려움"이라며 "그럼에도 일제 치하에 조선어학회라는 한 학술단체가 모든 조선어를 대상으로 이러한 (표준어의) 선정 작업을 벌이고 발표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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