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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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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1>

'가야 불교'라는 미스터리

'신비의 나라'.
가야를 그렇게 일컫는 경우가 있다. 가야라는 나라가 '알 수 없는',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나라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나라보다 가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이른바 정사(正史)로 불리우는 『삼국사기』가 가야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외면으로 망각의 늪에 빠져들 뻔했던 가야의 역사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조가 그 대강의 줄거리를 전해 줌으로써 천행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선사시대도 아닌 역사시대에, 500여년 세월 동안 한반도 남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 왔던 나라가 역사에서 누락되었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미스터리이며 신비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신비한' 역사에 가야 불교라는 것이 또 하나의 미스터리로 보태어진다. 가야, 엄밀하게는 가락 즉, 금관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를 두고 1세기 경이라는 설과 5세기 경이라는 설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에 관해서는 『삼국사기』보다 훨씬 관대한 『삼국유사』조차 '흥법'편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불교 전래 과정만 순서대로 다루고 있을 뿐 가야에의 불교 전래는 언급조차 않고 있다. 대신 탑상편 '금관성 파사석탑'조에서 불교 전래 문제를 간단히 서술하고 있는데, 그마저 엇갈리는 듯한 대목들이 있어 가야 불교는 역사의 미아가 된 듯한 느낌도 든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금관성 파사석탑'조에서, 동한 건무 25년 무신(48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올 때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 이 땅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신봉하는 일이 없었으니 대체로 상교(像敎)가 들어오지 못하여 이 땅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기(本記)에도 절을 세웠다는 기사가 없다.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지금까지 여기서 복을 빌고 있다."

이 기록을 믿는다면 허황옥이 파사석탑을 싣고 왔던 48년에는 아직 불교가 들어오지 않았으며, 그 4백여 년 후인 452년에야 절들이 세워져, 불교가 전래된 셈이 된다. 그러나 김해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는다. 이들은, 허황옥이 파사석탑을 싣고 왔을 때 이미 불교가 함께 들어왔다고 믿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탑이란 것이 애시당초 불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탑이 왔다면 부처가 온 것이고 따라서 불교가 왔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다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뱃길로 왔다는 점에서, 불교 또한 해로를 통해 인도에서 가야로 왔으리라는 불교남래설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가야 불교가 허황옥과 함께 왔다고 믿는 쪽에서는 『삼국유사』에, '파사석탑'조 이외에도 가락국 초기에 불교가 들어왔음을 말해주는 대목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첫째는 수로왕이 서울의 터를 잡는 대목이다. 수로왕이 대궐 남쪽 신답평으로 거동하여 "이 땅이 여뀌잎 만하게 좁고 작지만 땅이 청수하고 범상치 않으니 16나한 부처님이 머물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칠성(七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16나한'이라든가, 칠불(七佛)을 의미하는 '칠성'이라는 말이 불교용어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삼국유사』 탑상편 '어산불영'조의 기록이다. 가락국 인근 만어산(萬魚山)에 옥지(玉池)가 있고 그 속에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는데 만어산에 있는 나찰녀(羅刹女) 다섯이 독룡과 왕래하면서 사귄 탓으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익지 못했다. 이에 "수로왕이 주문(呪文)으로도 이를 금할 수 없게 되자,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한 뒤에 나찰녀가 오계를 받아 그 후로는 재앙이 없어졌다."는 대목에서 수로왕이 부처의 힘에 기댔다는 것은 이때에 불교가 이미 전래된 증거라는 것이다.

수로왕 재위 중에 불교가 들어왔다면, 가야는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가 된다. 한반도를 통틀어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진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 372년이니, 가야는 고구려보다 320여 년을 앞서 불교를 받아들인 셈이다. 그러나 가야사 연구자들은 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를 5세기 경으로 보고 있다. 기본적으로, 수로왕과 허황옥의 시대에는 가야 소국 또는 가야 연맹체의 국가형성기에 해당되는 시기여서 불교를 받아들일 만한 사회적 여건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질지왕 2년 임진(서기 452년)에 이르러 절을 설치하고 또 왕후사를 세웠다"는 『삼국유사』 '파사석탑'조 및 '가락국기'조의 기사를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그리고 왕후사가 세워진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가 세워지면서 장유사 경내에 있던 왕후사가 혁파되어 장유사의 고방으로, 외양간으로 쓰여지게 되었다는 '가락국기'의 기사가 사실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우, 금관가야가 532년 신라 법흥왕에 항복했으므로, 왕후사가 가야의 절로서 존속했던 기간은 불과 80년에 지나지 않으며 그후 신라, 고려 왕조를 거치며 500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다가 장유사가 세워지면서 없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삼국유사』의 가야 관계 기록도, 불교적 윤색이 가해졌을 가능성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데 이 점에서는, 근래 김해 인근 지역에서 많은 발굴조사에서 불교 관련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확인된 바가 없다는 사실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김해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은, 불교가 가락국 초기에 전래되었다는 설을 굽히지 않는다. 굽히기는커녕 나름대로 몇 가지 전거들을 앞세워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전거들이란, 1708년 명월사(明月寺)의 승려가 찬술했다는 '명월사 사적비문(史蹟碑文)'과 1812년에 쓰여졌다는 김해 신어산 은하사의 '취운루 중수기(翠雲樓 重修記)' 현판 그리고 1915년 김해시 장유면 장유사에 세워진 '가락국사 장유화상 기적비문(駕洛國師 長遊和尙 紀蹟碑文)'이 그것이다.

'명월사 사적비문'에는 수로왕이 김해 남쪽의 명월산에 자신과 왕비, 세자를 위해 각각 흥국사, 진국사, 신국사의 세 절을 세웠으며, 장유화상이 서역으로부터 불법을 전하였다고 하여 가야 불교 초전자로 장유화상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에는 장유화상이 허황옥의 오빠로 수로왕의 명을 받아 명월사와 은하사를 창건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가락국사 장유화상 기적비문'에 이르러서는, 장유화상의 속명이 허보옥으로 허황옥의 남동생이며, 장유산에 연화도량을 열어 불법을 전하다가 만년에 김수로왕의 아들 7형제와 함께 지리산 칠불암에 들어가 입적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장유화상 관련 전승(傳承)들에 대해 가야사 연구자들은 우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장유화상에 대한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1708년의 '명월사 사적비문'에서 불교 초전자로 등장했던 장유화상이 허황옥의 동생 또는 오빠라는 남매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을, '가락국기' 이후에 생겨난 장유화상 전승이 조선 후기에 허황옥 도래 설화와 결합되는, 일종의 부회(府會)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장유화상이 만년에 김수로왕의 아들 7형제와 함께 지리산 칠불암에서 입적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가락국이 지리산과 역사적으로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학계의 견해를 아랑곳 않고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가락국기'의 내용이 희락사모지사(戱樂思慕之事)로 연희됨으로써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오려 하듯이, 가야 불교 관련 전승들도 곳곳에서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허황옥이 바다를 무사히 건너왔음에 감사한다는 뜻이 김해 분산 정상에 해은암(海恩庵)이라는 암자의 형식으로 구현되어 있다든가, 가락국 2대 거등왕이 부친 수로왕과 모친 허황옥을 기리기 위해 낙동강 북쪽 천태산에 부은암(父恩庵)을, 남쪽 무척산에 모은암(母恩庵)을 세우고, 또 자암산에 자은암(子恩庵)을 세웠다는 사실도 그러한 경우로 보인다.

그리고 전승이 그 흔적을 남기는 것은 사찰 같은 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장유화상이 김수로왕의 아들 일곱 형제를 데리고 들어가 성불했다는 칠불암의 경우, 수로왕과 허황후가 아들들을 만나러 이곳에 왔다는 전설이 칠불암 인근에 범왕촌(梵王村), 대비촌(大妃村) 등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기도 한 것이다.

김해시 남쪽의 흥국사에 세워져 있는 '가락국 태조왕 영후유허비(迎后遺墟碑)'나, 김해시 장유면 장유암에 세워져 있는 '가락국사 장유화상 기적비'와 '장유화상 부도탑' 또한, 이들 기념물들이 지닌 각자의 전승을 기정사실화 함으로써 그것을 후대에 전하려는 의도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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