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일본의 개화를 지배하고 있는 물결은 서양의 조류로서, 그 물결을 건너는 일본인은 서양인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물결이 다가올 때마다 자신이 그 가운데서 식객처럼 부자연스러운 듯한 기분이 됩니다."
일본 근대문학의 태두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가 1911년에 행한 강연의 한 대목입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새로운 파도는 방금 간신히 벗어난 옛 물결의 특질과 진상을 분별할 틈도 없는 사이에 이미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맛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밥상을 거둬가고 다시 새로 차려놓는 형국이라는 겁니다.
내부의 요구와 논리에 따라 차분하게 변화의 절차를 밟지 못하고, 밖에서 물밀 듯 밀려오는 상황을 대처하기에 급급했던 명치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 과정의 정신적 처지를 나츠메 소세키는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근대적 전환기에 일본의 내적 주체성은 과연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나츠메소세키의 대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바로 그 근대적 전환기에 나타난 어중간한 인간에 대해 고양이의 눈으로 본, 촌철살인(寸鐵殺人)적인 문명풍자라고 할 만합니다. 작품이 나온 시기가 1905년이니까 일본이 러-일 전쟁의 승리감에 도취하며 서양문명을 이겼다고 자만했던 분위기였습니다.
작품은 그런 정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양문명에 대한 숨겨진 열등감과, 문명적 자산을 모두 섭렵하고 끝냈다는 식의 허세를 지닌 당대 일본의 현실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중학교 영어선생 구샤미는 남들이 알기에는 대단한 지식인 듯싶지만, 서재에서 책을 베개 삼아 잠이나 자는 허장성세의 인물입니다.
고양이의 움직임은 워낙 은밀하고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나 들을 건 다 듣고 볼 건 다 봅니다.
구샤미의 친구 메이테이는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지적 포장을 하고 있는 이들을 독한 농담으로 골려주고, 간께스라는 젊은 물리학자의 박사논문은 "개구리 눈알의 전동작용에 대한 자외선의 역할"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쓰였다고는 믿기 어려운 근대적 문장의 간결함과 허를 찌르는 해학정신은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이 어째서 일본 근대문학의 중심에 서 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보다 더 중요하게 주목되는 것은, 모두가 정신없이 새로운 변화의 격랑에 휩쓸려가고 있을 때, 그는 자세를 가다듬었다는 점입니다.
동아시아의 근대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치러낸 과정이고 작업이었습니다.
루쉰은 중국 민중의 각성을 요구했고, 나츠메 소세키는 서양을 차분하게 점검할 것을 일깨웠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식민지가 되려는 위기를 막고, 개인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파행을 겪고 있는 한-미 FTA 공청회를 보면서, 루쉰과 나츠메 소세키를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무슨 밥상인지 모르고 있는 판국에 그냥 차려주면 먹기나 하라고 윽박지르는 이들이 있는 현실에서 나츠메 소세키의 문명론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정부와 FTA 협상단은 도대체 누구의 식단을 짜주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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