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겐 '수첩공주'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지난 연말 국가보안법 폐지안 등을 논의하기 위한 '4자회담'에서 "내내 수첩에 있는 말만 하더라"는 열린우리당 측 참석자의 전언이 '수첩공주' 별명의 기원이다. 여기에는 정치적 타협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원칙만 주장했던 박 대표에 대한 섭섭함과 함께 '무식하다'는 비아냥도 적잖이 녹아 있어 박 대표 측에서는 달가워할 리 없는 꼬리였다.
지난 7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회담 후 언론들은 일제히 박 대표가 드디어 '수첩공주 꼬리를 뗐다'고 선언했다. 회담을 위해 3장여의 메모를 준비해 온 노 대통령에 비해, 박 대표는 2시간여 회담 동안 수첩 없이도 경제지표와 세율 등 구체적 수치를 열거했다. 그 덕분에 이날 회담에서 '판정승'을 올린 박 대표의 성과에는 '수첩공주' 이미지를 깼다는 점도 주요하게 포함됐다.
14일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 참석한 박 대표의 손에도 수첩은 없었다. 인사말도 준비된 원고 대신 '애드리브'로 해 토론회 사회자가 "오늘은 수첩을 들고 오지 않으셨다"고 거듭 강조했을 정도다.
토론회 한 시간 동안 박 대표는 정말 메모 한 장 없이 8.31 부동산 대책, 감세 등 정확한 수치가 필요한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해 냈다. 토론회가 끝나자 한 당직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치를 좔좔 외워 전문가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줬던 것이 생각난다"며 개가(凱歌)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붙은 꼬리를 단박에 떼어내긴 쉽지 않은 모양이다. 박 대표가 정부의 보유세율 1% 인상을 비판하며 예로 들은 수치에 곧바로 '태클'이 걸렸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2억6000만 원짜리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24평형 아파트를 가정하며 "현재는 보유세를 26만 원 내지만 1%가 되면 260만 원을 내게 되며, 집주인의 소득이 연 3000만 원이라면 세금이 소득의 8%나 되고 다른 세금까지 합치면 10% 이상 된다"며 "(정부여당 방침대로) 부동산 보유세 실효세율을 1%로 올릴 경우 가장 피해를 보는 게 서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문석호 제3정조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보유세 실효세율 1%가 되면 모든 주택소유자의 세금이 10배 늘어난다는 박 대표의 주장은 세금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반박했다. 보유세(종합부동산세+재산세) 실효세율이 1%가 된다 하더라도 24평형 중소형 아파트에는 재산세만 부과되는 만큼 최고세율이 0.5%를 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문 위원장이 제시한 재정경제부측 계산에 의하면 2017년에 기준시가 2억6000만 원 짜리 아파트에 부과될 총보유세는 163만8000원으로 금년도 부과액 66만3천원의 2.47배 정도였다.
이어 문 위원장은 "박 대표가 잘못된 수치를 자랑스럽게 들고 나온 사례는 부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해 온 한나라당이 얼마나 무책임한 정치공세로 정부 정책을 발목 잡는지에 대한 명확한 확인"이라며 "특히 박 대표의 정치․경제․사회 현안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얼마나 저급한지를 잘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우리당 측의 반박에 한나라당 정책조정위원회가 "박 대표가 말한 것은 정부가 여당의 안대로 한다면 이렇게 늘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으로 문석호 위원장의 전제와는 다르다"고 해명했지만,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8.31 정책과는 다른 계산법으로 8.31 정책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박 대표의 과실을 완벽하게 가릴 수는 없었다.
어쨌든 노 대통령과 맞선 용기로 수첩 없이 대중 앞에 데뷔하려던 박 대표는 '스타일'을 구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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