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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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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9>

역사와 동거하는 신화 - '가락국기(駕洛國記)'와 수로왕

오는 10월 경남 김해에서 '가야세계문화축전'이 열린다. 가야(加耶), 자칫 잊혀질 뻔했던 이름. '가야세계문화축전'은 그, 잊혀져 사라질 뻔했던 이름을 다시금 기리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신라, 고구려, 백제의 세 나라 역사만으로 꾸미면서 가야는 역사의 미아(迷兒)가 될 위기에 처했다. 그런 '가야'를 구해 준 것이 『삼국유사』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역사' 부분이랄 수 있는 '기이편'의 끄트머리에, 고려 문종 때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가 지은 글을 간략하게 줄여서 '가락국기'라는 이름으로 싣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연이 책 제목을 『사국(四國)유사』라고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가야는 『삼국유사』에서도 역시, '3국'의 부록으로 취급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6백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면서, 지역적으로 경남 대부분과 경북, 전북의 일부를 아우르며 김해, 부산, 함안, 고령, 상주, 남원 등지에 유적들을 남기고 있는 나라가 『삼국유사』의 기사 한 꼭지에 의지하여 간신히 그 이름을 보전해 오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어렵사리 역사에 실리게 된 '가락국기'는 그러나 신화 연구자들로부터 우리나라 고대 신화 연구에 있어 가장 귀중한 자료로 아낌을 받고 있다. 인제대 김열규 교수는, '가락국기'가 한국 상고대 신화의 총체적인 결구를 갖추면서 동시에 천강(天降), 난생(卵生), 혼인(婚姻), 등극(登極)의 네 가지 화소에 걸쳐서 고루 진술하고 있는 신화라고 말한다. 나아가 '가락국기'가 고조선, 고구려 그리고 신라의 신화 등 다른 어떤 상고대 왕권신화보다도 '신이(神異)'에 관해서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과 '가락국기' 중 '명(銘)'의 첫부분에 보이는 개벽의식이 신화의 진술양식으로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천지가 비로소 개벽할 제 해와 달이 처음으로 밝아졌도다.
사람들의 관계는 생겼지만 임금의 자리는 잡지 못했네.
…………………………………………………………………
산 속에 알이 내려 탄강하시매, 안개 속에 그 형체 가리었도다.
그 안이 아직도 막막하올 제, 그 바깥 역시나 캄캄하올 뿐.
바라보아 형상은 없는 듯한데, 소리만 있어서 들리옵니다."

'가락국기' 총론에 나오는 명(銘)의 첫머리이다. '가락국기' 본문에서는 이 부분이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천지개벽 후에 이 땅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고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있다는 것이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 있었으니 이들이 추장(酋長)이 되어 백성들을 통솔했으며 호수는 100호(戶)로 7만 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저마다 산과 들에 모여서 살면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3월 계욕일(禊浴日)에 북쪽 구지(龜旨)에서 무엇을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나서 2, 3백 명 되는 무리가 모였더니 사람 목소리 같은 소리가 나는데 형체는 감추고 소리만 내서 물었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구지입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아니 내밀면 불에 구워먹겠다,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그것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노는 것이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고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렇게 탄강이 이루어지고 이어서, 수로왕이 알에서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진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수없이 절을 하고 얼마 후에 다시 알을 싸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 위에 놓아두고는 각자 흩어졌다. 그후 12일이 지난 다음날 아침에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었더니 알 여섯 개는 사내아이로 화하였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무리들이 절하고 하례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같았다. 눈썹이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唐)나라 고조(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나라 순(舜)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여기까지가 수로왕 신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니라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일'이라는, 연월일까지 명기된 절대연대가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건무 18년은 기원 42년이다. 이런 식으로 절대연대가 표기된다는 것은 이 기록이 신화에서 벗어나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명(銘)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지가 비로소 개벽할 때 해와 달이 처음으로 밝아졌고…… 안개 속에 그 형체 가리워지고 그 안이 아직도 막막하고, 그 바깥 역시 캄캄했던", 창세기를 연상시키는 그 시간이 기원 42년으로 편년(編年)되고 만다.

'건무 18년 임인'이라는 절대연대의 표기에서 나는 문득, 독일의 시인·극작가·연출가였던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주장한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브레히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극에 반하여 서사극을 주창하면서, 관중이 극에 몰입하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소격효과'에 의해 관중으로 하여금 거리를 두고 극을 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수로왕 신화 중에 일연이 삽입한 '건무 18년 임인'이라는 절대연대와 마주쳐서, 신화에 몰입할 것이 아니라 신화와 거리를 두고 볼 것을 요구받았음을 느꼈던 것이다. 브레히트 식으로 수로왕 신화를, 거리를 두고 다시 읽다보면 천강, 난생, 등극, 혼인 등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에서 틈새가 보이기도 하고, 수로왕과 석탈해의 '둔갑 겨루기'가 느닷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수로왕과 허황옥과의 혼인 대목에서는 그것이 신(神)들의 혼인인 신성혼(神聖婚)으로 보이기보다는 역사 속의 세속적 혼인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몇몇 연구자들은, 수로왕의 탄강, 난생, 등극에 이어지는 수로왕과 석탈해의 '둔갑 겨루기'와 그리고 허황옥과의 혼인 부분이 그 앞 부분과는 '서사적 층위'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 수로왕 신화가 '서로 다른 시기에 이루어진 별개의 여러 사건이 복합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둔갑 겨루기'와 수로왕의 혼인 부분은 각각 석탈해 신화와 허황옥 설화로 따로 구분해서 접근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도 있다. 이렇게 되면 수로왕과 허황옥의 혼인 이야기가 신화에서 역사로 끌어내려져야 할지도 모르게 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일연은 다시 한번, '건무 24년(기원 48년) 무신 7월 27일'이라는 또다른 절대연대를 우리에게 들이댄다. 이는 어쩌면 '혼인' 대목을 신화가 아닌 역사로 취급하기 위한 일연 나름의 전략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연은 두 번씩이나 제시한 절대연대를 신화와 역사를 다리놓는 장치로 의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가락국기'에 기록된 수로왕과 허황옥의 혼인 장면을 꼼꼼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건무 24년 무신(戊申)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수로왕에게 배필을 구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수로왕은 "천명(天命)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대답한다. 그러던 어느 날 허황옥을 태운 배가, 붉은 돛에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바다 서쪽으로부터 온다. 수로왕이 마중을 나가, 대궐 서남쪽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린다. 허황옥은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친다. 허황옥이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수로왕이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간다. 수로왕이 허황옥과 함께 침전에 들었을 때 허황옥은 자신이 아유타국(阿踰陁國) 공주이며 나이는 16세라고 밝힌다. 그리하여 수로왕은 허황옥과 함께 두 밤, 하루 낮을 지낸 후, 8월 1일 한 수레를 타고 대궐로 들어오는데 오정(午正)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때 허황옥을 배종(陪從)한 사람으로 신보(申輔)·조광(趙匡)과 그들의 아내 두 사람에,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이 있었으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허황옥이 타고 온 배를 본국으로 돌려보낼 때에는 뱃사공 15명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었으며, 수로왕 부부가 대궐로 돌아올 때, 허황옥이 가져온 중국 상점의 각종 물화[漢肆雜物]도 모두 수레에 싣고 왔다.

이 혼인은, 수로왕 쪽에서는 천명(天命)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허황옥 쪽에서도 그 부모가 꿈에 상제(上帝)로부터 명을 받았던, 말하자면 신성혼이었다. 그러나 혼례의 진행 절차라든가, 허황옥을 배종한 두 부부와 노비 그리고 뱃사공 등의 등장인물, 혼례에 쓰여진 물목(物目) 등등을 살펴보면 혼인의 모습이 너무나 세속적이다. 다시 말해 이 혼인에서 신화적인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가락국기'의 기록을 보면, 이후 수로왕은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정돈하고,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명령이 그리 야단스럽지 않아도 위엄이 있었고 정치가 그리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고 되어 있다. 이와 별도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102년) 조에 "8월 음즙벌국(音汁伐國)이 실직곡국(悉直谷國)과 땅의 경계를 다투어 신라왕에게 와서 재결(裁決)을 청하므로, 왕이 이를 난처하게 여기다가, 금관국 수로왕이 연로하고 지식이 많다 하여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입의(立議)하여 서로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는 이런 기록들에서 수로왕이 어느 사이엔가 역사 속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허왕후는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에 157세로 죽어 구지봉 동북쪽 둔덕에 묻혔다. 그 25년 후인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에 수로왕이 죽자 사람들은 대궐 동북쪽에 장사하였다. 수로왕은 죽음에 있어, 박혁거세처럼 죽어서 하늘로 올라갔다가 이레만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든가, 주몽처럼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지 않는다든가 하는 그런 신이(神異)를 보이지 않았다. 수로왕의 삶이, 능(陵)에 매장되어 제향(祭享)을 받는, 평범한 죽음으로 마감된 점으로 보면, 신화로 시작된 그의 삶이 종국에는 역사 속에 묻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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