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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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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8>

『삼국유사』에서 '서울'을 발견하다 - 장의사(壯義寺)터 당간지주

『삼국유사』의 현장들은 옛 신라 땅에 편재(偏在)되어 있다. 경주 지역에서 최고의 밀집도를 보이는 그 현장들은, 경남북 일원으로 퍼져가면서 밀집도가 낮아지다가 영남 지역을 벗어나서는 그 분포도가 매우 성글어진다. 강원도 영동(嶺東) 지방, 충남의 공주 부여 일대 등에만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정도이다. 나머지 지역에는 『삼국유사』 현장이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한데 이 점, 『삼국유사』의 한계라면 한계이다.

그러니 서울에서 『삼국유사』의 현장과 마주친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에서도 박물관 같은 데에서는『삼국유사』의 흔적들을 더러 마주칠 수 있다. 국립박물관 소장품 중에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물들이 있기도 한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유물들은 원래 있던 현장을 떠나 박물관으로 옮겨진 것들이어서 현장감은 전혀 주지 못한다. 이런 마당에 전혀 뜻밖으로, 조용히 숨어 있다시피 한 『삼국유사』 현장 유적이 하나, 서울의 구석진 곳에 있다. 종로구 세검정의 세검정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는 장의사(壯義寺) 터 당간지주가 그것이다. 『삼국유사』 기이편 '장춘랑 파랑(長春郞 波浪)'조에 그 사연이 있다.

"처음에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장춘랑과 파랑이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 후 백제를 칠 때 그들이 태종(太宗)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우리는 예전에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데, 백골이 되어서도 나라를 끝까지 지키고자 부지런히 종군하였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위엄에 눌려서 남의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우리에게 얼마간 군사를 주십시오.' 태종은 놀랍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을 위하여 하룻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을 설하고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를 세워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장의사를 창건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6년 조에도 나오는데, 절이 세워지게 된 내력은 전혀 다르다. 내용인즉, 겨울 10월에 태종이 당 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데 대한 회보가 없음을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장춘랑과 파랑이 왕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그 전날 당나라에 갔다가 당 황제가 소정방 등에게 이듬해 5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백제를 치도록 명령한 것을 알았다면서, 왕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린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왕이 크게 놀라고 이상히 여겨, 두 집안 자손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한산주에 장의사를 지어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는 것이다.

장의사 창건의 계기가 어느 쪽이 옳은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는 장의사가 왜 이곳에 세워졌는지에 관해서도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장의사가 세워졌던 한산주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5월 9일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 장군 생해(生偕)와 군사를 합쳐 ……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포차를 벌여놓고 돌을 날려보냈고 그 돌에 맞은 담장과 집은 번번히 무너졌다.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은 성 밖에 마름쇠를 던져 놓아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또한 안양사(安養寺) 창고를 헐어 그 재목을 가져다가 성 안의 무너진 곳마다 망루를 만들었다. …… 이 당시 성안의 남녀가 2천8백명 뿐이었는데 동타천이 어린이와 힘 못 쓰는 자들까지도 격려하여 20여 일 동안이나 버텼으나 식량이 떨어지고 힘이 다했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자 돌연 큰 별이 적진에 떨어지고 우레가 울리고 비가 오면서 천지가 진동하였고 적들은 겁이 나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왕은 동타천을 가상하게 여기고 대나마(大奈麻)로 발탁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이편 '태종춘추공'조에, 경주에 있던 김유신이 북한산성의 소식을 듣고 '성부산(星浮山)에 단(壇)을 모으고 신술(神術)을 쓰니 갑자기 큰 독만한 광채가 단 위에서 나오더니 별이 북쪽으로 날아갔다.'라고 되어 있는 점이 『삼국사기』와 다소 다르다. 지명 표기에 있어서도 『삼국사기』가 '북한산성'이라고 한 것을 『삼국유사』는 '한산성(漢山城)'이라고 달리 부르고 있는 것을, 학자들은 모두 한산주(漢山州)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위의 기사들에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삼국시대 말기 한산주가 신라의 중요한 요충이었다는 점이며, 한산주의 위치가 장의사 터가 있는, 현재의 창의문 밖 세검정 일대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산주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옛기록에 나오는 지명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고심할 때가 많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읽다보면 지명의 비정(比定)이 어려운 경우가 숱하다. 대개의 경우, 『고려사』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종 지지(地誌) 등 기본적인 자료들을 섭렵한 후에 현지 답사를 나가지만, 현지에서 이를 뒷받침해줄 물증을 찾지 못하면 연구가 막힐 수밖에 없다. 심증만으로는 논리를 전개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세검정초등학교 마당 한 쪽에 서 있는 장의사 터 당간지주는, 그 일대가 삼국시대 말기 신라의 한산주였으며 이는 또 한산성, 북한산성 등으로 불리웠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확실한 물증이 되고 있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날 서울이 위치하고 있는 한강 유역은 고대 이래로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였다. 우리가 역사 시대의 서울을 기록하려 한다면 그 첫머리는 백제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서울이 있는 한강 유역은 백제 역사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백제가 한성에 도읍했던 기간은 493년으로, 678년의 백제 역사 중 웅진에 도읍했던 63년과 부여에 도읍했던 122년을 합친 기간보다 훨씬 더 길다. 그럼에도 한성 백제의 유적은 영성(零星)하기 짝이 없다. 부여와 공주 지역에는 절터, 석탑 등 남아 있는 유적들도 많을 뿐 아니라, 공주 무령왕릉 출토유물, 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향로 등 이따금 출토되는 유물들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가 5백년 가까이 도읍했던 서울에서 한성 백제의 흔적이라고는 송파구의 풍납, 몽촌 두 토성과 방이동, 석천동의 고분 몇 기에 그치고 있으니, 백제라는 이름의 울림이 애잔할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는 백제본기 '온조왕'조에서 백제가 서울을 도읍으로 삼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漢山)에 도착하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곳을 찾았다. ……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서기전 18년)이었다. ……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여기에 나오는 한산(漢山)은 북한산이라는 설이 유력하고, 하남위례성은 현재의 서울 송파구 소재 풍납토성이라는 설과 광주 춘궁리와 남한산성 일대라는 설로 크게 나뉘어 있다. 백제는 이렇게 한강 유역에 정착한 뒤, 남진정책을 취하는 고구려와 쟁투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백제가 도읍을 옮겼다든가, 성을 새로 쌓았다든가 하는 기사가 드문드문 나타나는데 그 위치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아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런 기록들이 나온다. "온조 13년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14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가을 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았다. 그곳에 한성(漢城)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개루왕 5년 봄 2월, 북한산성을 쌓았다." "책계왕 원년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동성왕 4년 가을 9월,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무녕왕 23년 봄 2월, 왕이 한성으로 가서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에게 명령하여 15세 이상 되는 한수 이북 주, 군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게 하였다."

이들 기사에는 한성, 북한산성, 한산성 등의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어느 경우 한성은 한강 남쪽의 하남위례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한강 북쪽에 있는 어떤 성(城)을 의미하기도 해 그곳이 정확히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설이 분분하여 아직 정설이 없다. 그렇지만 위의 기록에서, 백제 시대 한강 이북에도 한산성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강 유역을 에워싼 쟁투를 시기적으로 개관해 보면, 백제 근초고왕 때에는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우위를 점하기도 했지만 고구려 광개토왕 이후에 고구려가 월등 우세한 위치에 서게 되어 장수왕 때인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이 함락당하여 백제 개로왕이 사로잡혀 죽고 백제가 도읍을 웅진으로 옮겨가기에 이른다.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에도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는데 그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고구려의 남진에 같이 위협을 느낀 신라가 백제의 편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551년 백제,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군을 몰아내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신라 진흥왕이 553년 가을, 백제가 되찾은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그 2년 후에는 북한산을 순행하여 비봉에 올라 경계비를 세우기까지 하는데, 이 '신주'가 나중에 '한산성'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 한산성이 바로, 삼국시대 말기까지 잔존하면서, 장의사라는 절이 세워지고,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의 공격 표적이 되었던 한산주인 것이다. 신라가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우고, 고구려 말갈의 연합군이 북한산성을 공격했던 무열왕대의 상황은 서울, 나아가서는 한강 하류 유역을 에워싼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 간 쟁투의 가장 마지막 단계였다.

한강 유역의 땅이 신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때까지 서로 다투던 고구려와 백제가 양쪽에서 신라를 공격하는 형세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되자 백제, 고구려의 협공을 견디지 못한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여 결국은 당나라 군대가 출병하기에 이른다. 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당하고, 당나라 군대마저 신라에 의해 패강 이북으로 쫓겨난 다음에야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한강 유역에는 전쟁이 그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남위례성, 한산성, 한산주, 북한산성 등의 이름으로 역사에 빈번히 등장했던 서울이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를 이루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는 약 800년 동안 역사에서 잊혀지다시피 했던 서울 지역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1394년 조선 왕조가 한산의 남쪽, 한양(漢陽)을 수도로 삼게 되면서부터이다. 한양은 조선조 5백년 동안 다시 한반도의 중심으로 구실해 오면서 한양성을 비롯한 각종 유적, 유물들을 남겨놓기에 이르렀다.

10년쯤 전인가 서울시에서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벌인 적이 있었는데 이때 서울시는 '조선'의 정도에만 골몰하여 그보다 더 오랜 '백제'의 정도는 잊어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결과적으로 서울시가 기념했던 '정도 600년'은 '조선 정도 600년'이었다. 서울의 역사가 조선시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서울시는 기원 전 18년에 서울을 도읍으로 삼았던 '백제 정도 2,000년'을 먼저 기념했어야 했다. 나는 '백제 정도 2000년'이 '조선 정도 600년'에 못지 않은 역사적 비중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도 서울시청 홈페이지에 가 보면 '600년 고도(古都)'라는 표현이 보인다. 서울시가 이처럼 백제의 역사를 잊은 채, 조선의 역사만을 기억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역사에서 귀중한 1400년을 내팽개치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사진설명입니다.

사진 1, 2 : 세검정초등학교 교정의 장의사 터 당간지주@김대식
사진 3 : 창의문 쪽에서 바라본 세검정 일대. 배경 가운데 봉우리가 '진흥왕 순수비'가 서 있던 비봉이다.
사진 4 : 비봉 능선 위쪽에서 본 비봉 정상.봉우리 왼쪽 약간 튀어나온 부분이 '진흥왕 순수비' 이전 표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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