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조직적 도감청이 있었다는 국가정보원의 발표는 한나라당의 유력 대권주자인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서울시장 측의 표정에도 미묘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간 "호남이 없으면 대권도 없다"는 기치 아래 소위 '서진(西進)정책'을 추진해 온 박 대표측은 'DJ 때리기' 국면이 부담스런 눈치다. 반면 신행정도시 건설 논란을 거치며 서부벨트를 포기하는 대신 '영남권+수도권'을 근거지로 집권 구상을 전개해 온 이 시장측은 한결 여유로워 보인다.
***박근혜 "국정원 개혁해야…" DJ에는 '침묵' **
국정원의 중간발표 직후인 5일 오전 열린 한나라당 지도부의 긴급 대책회의에 박근혜 대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북 수해현장을 방문 중이었기 때문. 발표를 전해들은 박 대표는 현장에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정원이 국가이익을 위해서만 일하고, 본연의 사명에만 충실하게 일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확실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한나라당은 입법을 통해서 국정원이 정치에 필요 없이 관여하지 않게 하고, 권력남용을 하지 않고, 불필요한 불법도청을 할 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확실하게 이번 국회에서 입법화 하고자 한다"며 '국정원 개혁'만을 역설했다.
국정원 발표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DJ 정권의 도감청'에 맞춰졌으나, 정작 박 대표는 이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다. 물 만난 고기처럼 DJ에 대한 총공세에 나선 다른 지도부들과도 사뭇 다른 태도다.
박 대표의 이 같은 조심스런 행보에는 'DJ 때리기'를 선도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그간 대권전략 차원에서 추진해왔던 '서진정책'이 한 순간에 '도로아미타불'로 끝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밉지만 박근혜는 괜찮다'는 식으로 조금씩 열려 왔던 호남민심도 DJ와 멀어지면 단번에 물 건너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발전특위 "도청은 묵과할 수 없으나 공적까지 폄하하진 않는다" **
이에 따라 지난 6월 김 전대통령의 하의도 생가를 단체 방문하는 등 한나라당의 '서진정책'을 집행해 온 '지역화합발전특위'도 난감해졌다. 이들은 직접적인 'DJ 때리기'보다는 노무현 정부에 초점을 맞춘 비판이 주종이다.
특위 간사인 이정현 부대변인은 "DJ 정권의 도청 사실을 묵과할 수는 없지만 그간 한나라당이 호남 민심을 얻으려고 쏟았던 노력에 다소간의 손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도청 하나로 남북관계 등에 대한 DJ의 공적까지 폄하할 생각은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부대변인은 특히 "이번 사건으로 DJ가 불명예의 아픔을 얻게 된다면 호남은 노무현 대통령을 원망할 일이지 한나라당을 욕할 일이 아니다"며 "DJ 쪽까지 적극 공개하라고 지시한 것은 결국 노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박 대표가 이렇다 할 언급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는 "아직 소소한 내용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되지 않아 신중한 것일 뿐"이라며 "월요일까지는 당의 방향에 대한 언급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박 대표가 DJ에게 초점이 맞춰진 불법 도청 사태의 새로운 국면전개에서 보여줄 태도에 관심이 쏠린다.
***김문수-이재오 "DJ, 도청피해자 강조하더니…" 비난 **
반면 한나라당 내에서 이명박 서울시장계로 분류되는 의원들은 마음 놓고 김 전대통령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
김문수 의원은 한나라당 홈페이지에 쓴 '아! 슬프다! 노벨평화상이여! 인권대통령이여!'라는 글을 통해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되도다! 아! 노벨상이여! 민주화운동이여! 인권이여! 그리고 거짓말이여!"라고 통탄해, 도청사건을 김대중 정권 전체의 도덕성 문제로 확대하려는 속내를 분명히 했다.
김 의원은 "제왕적 대통령의 하수기관으로서 제왕도 망치고 자신도 망치는 권력의 독소를 개혁해야만 국정원도 민주화시대에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국정원의 수사권 폐지를 비롯한 대대적인 국정원 개혁을 주장했다.
이재오 의원도 이에 질세라 한나라당 홈페이지의 <의원발언대>를 통해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군사독재시절 도청의 최대 피해자였음을 스스로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김대중 정부 하에서도 불법도청이 무차별로 이루어졌음이 드러났고, 그 불법 도청의 주범들이 그것을 갖고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는 실정이니 어찌 경악하지 않겠는가"라며 공세에 가세했다.
이 의원은 "더욱이 그 불법 도청을 미끼로 거래를 하려고 했던 사실에 대하여 민주와 인권을 주장했던 김대중 정부가 국민들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정말 기가 막힌 일"이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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