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31일 싱가포르의 펑톈웨이와 벌인 단식 8강전에서 김경아가 상대의 공격을 커트하고 있다. 이 경기에서 김경아는 세트스코어 1-3으로 패배해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연합뉴스 |
올림픽이 끝날 때마다 은퇴를 생각했지만
김경아에게 런던올림픽은 세 번째 올림픽이다. 첫 올림픽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었다. 당시 스물여덟(한국 나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대표팀에 발탁됐고 단식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아테네올림픽이 끝난 직후 그는 대표팀 은퇴를 생각했다. 4년 후에 열릴 베이징올림픽 때는 서른을 넘긴 나이가 되기 때문이었다. 선수들이 대개 서른을 넘기지 않고 은퇴하는 것을 보면, 김경아가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일반적인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는 은퇴를 미루고 서른둘의 나이로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리고 단체전에서 또 하나의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베이징올림픽이 끝나고 체력과 기술에서 모두 한계가 왔다고 느낀 그는 이번에는 정말로 대표선수 생활을 정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중국 프로리그에서 3년간 뛰면서 중국 선수들을 가까이에서 파악했고 넘지 못할 벽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결국 세 번째 올림픽 출전을 준비했다.
메달 전망을 밝게 했던 두 번의 우승
김경아는 런던올림픽 3개월 전에 열렸던 스페인오픈과 칠레오픈에서 우승했다. 스페인오픈에서는 단식뿐만 아니라 박미영과 짝을 이룬 복식에서도 우승하며 2관왕에 올랐다. 이어 열린 칠레오픈에서는 결승에서 싱가포르의 리쟈웨이를 물리치며 우승했다. 연속 2개 대회 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두며 단식에서 메달 전망을 밝게 했다.
김경아가 올해 2개 대회를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기 스타일의 변화였다. 그는 그동안 세계 최고의 수비수로 명성을 쌓았다. '깎신'이라는 별명도 상대의 공격을 커트하는 수비기술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커트 기술은 공격형 선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력한 무기였다. 여기에 올해는 포핸드 드라이브를 추가했다. 수비를 철저히 하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드라이브를 거는 기술로 김경아의 수비 탁구는 한층 진화했다.
2개 대회 연속 우승으로 7월 기준 김경아의 세계 랭킹은 5위까지 치솟았다. 작년 2월 세계랭킹 4위까지 오른 이후 최고의 순위였다. 올림픽 단식에서는 세계 7위까지 시드가 배정되는데 그는 3번 시드를 받았다. 준결승까지 올라가야 비로소 중국 선수를 만나는 대진표였다. 4강부터는 경기를 풀어나가는 순간순간이 중요했기 때문에, 경기 경험이 많은 김경아에게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였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단식 8강까지 김경아는 순조로운 경기를 펼쳤다. 8강 상대는 싱가포르의 펑톈웨이. 랭킹도 앞서고 상대 전적에서도 4승 1패로 우위를 보였기 때문에 김경아의 승리가 예상됐다. 하지만 1, 2세트에서 역전을 허용하며 힘들게 경기를 끌고 갔다. 6세트에서 9-6까지 앞서며 7세트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결국 10-12로 세트를 내주며 경기를 끝냈다.
단체전에서도 김경아는 펑톈웨이에게 무릎을 꿇었다. 현정화 감독은 단체전 경기 직후 공동취재구역에서 "김경아 선수의 자신 있는 커트가 나오지 않았다"며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팍팍 때리질 못하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김경아 역시 "마지막 올림픽이라 잘하고 그만두자는 생각이 강했다.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이 부담으로 작용한 것 같다. 사실 부담은 늘 있지만 이번에는 극복이 안 됐다"며 눈물을 닦았다.
▲ 김경아와 현정화 감독. 둘은 대표팀에서 가장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춘 사제지간이다. ⓒ연합뉴스 |
김경아의 마지막 올림픽은 단식 8강, 단체전 4강으로 막을 내렸다. 올림픽에 3번 출전한 노련한 선수였지만, 마지막 올림픽이라는 생각이 그를 위축시켰다. 하지만 현 감독은 서른여섯의 나이에 대표팀을 책임지고 한국 여자 탁구의 에이스로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잘 버텨준 것이라며 김경아를 위로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묵묵히, 그리고 든든하게 대표팀을 지켜온 후배에 대한 선배의 진심 어린 위로였다.
김경아와 함께한 그들
단체전에서 김경아와 함께 뛴 당예서와 석하정은 모두 중국에서 귀화한 선수들이다. 당예서는 2001년 대한항공 팀의 훈련 파트너로 처음 한국 탁구와 인연을 맺었다. 중국에서 전국청소년선수권을 우승하고 대표팀에도 몸담았던 그의 기량은 의심할 여지없이 뛰어났다. 단,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의 어떤 대회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귀화를 위해서는 5년간 한국에 머물러야 하고 귀화 시험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알았다. 한국 국적 취득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며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자, 한국에 계속 남아야 할지 중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며 마음고생을 했다.
▲ 김경아와 단체전에서 호흡을 맞춘 당예서(좌)와 석하정(우) ⓒ뉴시스 |
그가 흔들릴 때 곁에서 붙잡아준 이는 강희찬 대한항공 감독이었다. 강 감독은 훈련뿐만 아니라 귀화 시험도 도와주며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했다. 결국 2007년 10월 국적을 획득하여 2008년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갈 수 있었다. 치열한 경쟁 끝에 베이징올림픽 한국 대표로 선발됐다. 베이징올림픽에서 당예서는 김경아, 박미영과 함께 단체전 동메달을 땄다. 귀화 선수 최초로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석하정 역시 2000년 연습생 신분으로 한국에 왔다. 랴오닝성(요녕성) 출신인 그는 2007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하지만 바로 대표팀에 발탁되진 못했다. 국적 취득 3년 후인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당시 선발전 1위로 대표팀에 합류하여 양하은 선수와 함께 복식경기, 단식, 단체전 등에 출전했다. 석하정은 제2의 당예서로 주목받으며 런던에서도 대표팀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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