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태공 춘추공'조의 기사는 『삼국유사』 전편을 통해서도 매우 특이한 축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기사의 분량이 많을 뿐 아니라 내용이 다채롭고 또 기사의 출처도 매우 다양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사는 『삼국사기』의 관련 기사를 뼈대로 삼으면서 일연 나름으로 수집한 신라별기(新羅別記), 고기(古記), 백제고기(百濟古記), 신라고전(新羅古傳) 등의 각종 기록들을 인용하며 기록해 나가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으로 편집하고 있다.
예컨대 무열왕에 대해 설명하면서 『삼국사기』 무열왕 조의 기사만 쓰는 것이 아니라 문무왕조의 기사를 비롯, 백제본기의 기사도 활용하고 있다. 무열왕의 결혼 문제를 언급하면서는 『삼국사기』 '문무왕 상'의 첫 대목을 끌어와 쓰고 있고,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받은 의자왕의 대책회의 대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를 끌어와 쓰고 있는 것 등이 그 예다.
또 '태공 춘추공'조 기사의 특장으로, 제목이 말해 주는 태종 김춘추에 관한 기사보다는 백제의 멸망에 관한 기사가 훨씬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대목에서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 중 백제 말기의 망국 조짐과 관련된 기사가 원용되고 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연대순으로 나열되고 있는 망조(亡兆) 기사가 『삼국유사』에서는 '태공 춘추공'조 중의 한 곳에 모여 있다. 기사는 다음과 같다.
"현경(現慶) 4년 기미(己未, 659년)에 백제 오회사(烏會寺; 오합사烏合寺라고도 한다)에 크고 붉은 말 한 마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아다녔다.
2월에 여우 여러 마리가 의자왕(義慈王)의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좌평(佐平)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 태자궁(太子宮) 안에서 암탉과 작은 참새가 교미했다.
5월에 사비수(泗沘水) 강둑에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세 발이나 되었으며 이것을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 궁중에 있는 홰나무가 마치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5년 경신(庚申, 660년) 봄 2월에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쪽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들이 나와서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루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또 사비수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4월에 왕머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 저자 사람들이 까닭없이 놀라 달아나는 것이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아서, 놀라 자빠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자는 그 수효를 모를 만큼 많았다.
6월에 왕흥사(王興寺)의 중들이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또 들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수 언덕에 와서 대궐을 바라보고 짖더니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으며, 성안에 있는 뭇 개들이 길 위에 모여들어 혹은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얼마 후에 흩어졌다.
또 귀신 하나가 궁중으로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하다가 이내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니 석 자 깊이에 거북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새 달과 같네.' 이 글 뜻을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은 '둥근 달이라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차면 기우는 것입니다. 새 달은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은 노해서 무당을 죽여 버렸다. 누가 말하기를, '둥근 달은 성(盛)한 것이옵고, 새 달은 미약(微弱)한 것이오니, 생각컨대 우리 나라는 점점 성하고 신라는 점점 미약해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고 하니 왕이 기뻐했다."
망조 기사 중에 『삼국사기』에는 실려 있으나 『삼국유사』에 빠져 있는 항목이 셋 있다. 그것들은 의자왕 17년 조의 "8월에 여자 시체가 생초진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라는 기사와 의자왕 20년 조의 "5월에 폭풍우가 불고 천왕사와 도양사 두 절의 탑에 벼락이 떨어졌으며 백석사의 강당에도 벼락이 떨어졌다."라는 기사와 "검은 구름이 용과 같이 공중에서 서로 나뉘어 싸웠다"라는 기록이다. 3국의 망조에 관해 여러 편의 글을 쓰고 있는 조수학 교수(前 영남대)는 이와 관련하여, 의자왕 20년 조의 두 기사는 불교와 관련된 것이어서 『삼국유사』에 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자왕 17년 조의 기사는 『삼국유사』 권 제2의 첫머리 기사인 '문무왕 법민'조 첫머리에 다소 변형되어 등장한다.
"왕이 처음으로 즉위한 용삭(龍朔) 신유(辛酉, 661년)에 사비수 남쪽 바다에 여자의 시체가 있었는데 몸 길이가 73척이요, 발 길이가 6척이요, 생식기 길이가 석자나 되었다. 혹은 말하기를 몸 길이가 18척이요, 건봉(乾封) 2년 정묘(丁卯, 667년)라고도 한다."
이 기사는 대단히 느닷없다. 우선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 백제의 망조로 등장한 기사가 『삼국유사』의 문무왕조 기사 첫머리에 다시 등장한 점이 그러하거니와 여기에 대해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아무런 설명도 않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러한 느닷없음에 대하여 조수학 교수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많은 도움이 된다. 조수학 교수는 이 기사에 대해 『삼국유사』의 저자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일연 선사(禪師)가 기이 권 제2의 서두에 거녀시(巨女尸)로 압권(壓卷)"한 이유를 '삼국유사 기이 권제2의 설정 이유'라는 글에서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이 거시조(巨尸兆)는 고려말 묘향산에 나타난 비숫한 크기의 남자형 거물 이야기와 부합한다. 이에 대하여 정포은(鄭圃隱)의 해석을 인용한 풀이에 의하면 이를 '우(禹)'라고 하였다. '우조(禹兆)'는 천지자연의 운행은 음양의 조화에 의하는 것인데 이 음양의 조화가 순조로우면 만물의 생성도 순조롭지만 이 음양도 항상 순조로울 수만은 없다. 때로는 양기도 음기도 과잉과 결핍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때 과잉된 양기가 응집되면 양우조(陽禹兆)가 발생하고, 반대로 음기의 과잉이 일어나면 음우조(陰禹兆)가 발생하는데 이 고려말에 발생한 것은 양기의 과잉에 의한 양우조이다. 그런데 이 양우가 심산유곡에 그대로 존속했다가 다시 음기의 과잉이 발생했을 때 용해가 된다면 세상에는 다시 음양이 조화가 되어 태평세월이 존속할 수 있지만 고려말의 양우는 스스로 200석의 소금을 먹고 자기 몸을 녹여버린다. 그것이 녹게 되면 그 순수한 양기는 세상에 퍼져서 허다한 영웅호걸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영웅호걸이 태어나면 세상은 난세가 되므로 이를 판단한 정포은 선생께서 "3기(紀)가 못되어 고려가 판탕(板蕩)이 난다!"라고 탄식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이 '거녀시(巨女尸)' 사건은 장차 신라 통일의 태평시대가 열릴 음우조(陰禹兆)에 해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음우는 무슨 계기에 의하여선지 사비수 남쪽 바다에 빠져 죽었으므로 바다의 소금물에 녹을 것이고, 녹은 순음(純陰) 정기(精氣)는 그후 신라를 정벌하러 오던 당군(唐軍)을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에 의하여 수장하여 버렸으니 이 바다에 수장된 당군의 양기(陽氣)와 중화되어 버렸다고 가정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뭍의 인간세상에는 다시 평온을 회복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백제에 이 음우가 발생한 원인은 앞에서 나타난 허다한 백제 망조의 요기(妖氣)가 모두 음기의 소산이기 때문에 이 음기의 응집체로 보여진다"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조수학 교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림으로써, 일연이 백제의 망조 속에서 신라의 길조(吉兆)를 찾아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 기이 권 제1의 첫머리에는 '고조선' 즉 이른바 단군신화로부터 시작하였고, 기이 권 제2의 첫머리에는 '문무왕 법민'의 거대한 여시(女尸) 즉 '음우조(陰禹兆)'로 권수(卷首)를 삼았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크게 다르다. 첫째는 나라 역사의 통사적(統史的)인 면에서 전자는 조국신화(肇國神話)이고 후자는 신라 통삼(統三)의 조짐이며, 둘째는 이교의 수용 면에서 전자는 도가적(道家的) 천신하강(天神下降)이며 후자는 유가적(儒家的) 천의(天意)의 서징(瑞徵)에 속한다."
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열거하고 있는 백제의 망조를 일종의 상징 조작으로 보고자 한다. 예컨대 이들 망조 중의 일부는 신라 쪽에서 조작하여 백제에 퍼뜨린 유언비어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그럴 수 있다는 느낌이 짙게 든다.
『삼국사기』 또는 『삼국유사』 중에서 김유신 관련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유신이 심리전에 매우 능란한 지략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군사들의 사기를 매우 중시한다. 그가 압량주 군주로 있을 때 내심 대야성의 패배를 복수하려고 벼르면서도 겉으로는 전쟁에 전혀 관심없는 듯 술을 마시고 풍악을 잡히며 보름 가까이 지냈다.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하다고 비방하며 "편히 지낸 지 오래 되어 한번 싸워 볼 만한데, 장군이 게으르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할 정도로 사기(士氣)가 올랐다. 이에 유신이 왕에게 나아가 출병을 허락 받고 출전하여 백제 장수 8명을 생포하고 20여 성을 빼앗고 백제군 3만명의 목을 베는 전적을 올렸다. 황산벌 전투에서 관창을 내세워 전군의 사기를 드높인 일화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가 하면 군중에서 백제 첩자에게 거짓정보를 흘려 백제군을 속이기도 하였다. 심지어, 선덕여왕 말기에 비담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져 반란군이 선덕여왕이 패할 징조라고 소문을 퍼뜨리자, 유신이 허수아비를 만들고 불을 붙여서 연에 실어 날려놓고는,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고 선전했을 정도이다. 이런 예로 미루어 김유신이 백제 관민을 상대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심리전을 벌였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다 백제 쪽에는 이런 심리전이 먹혀들 만한 충분한 바탕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 이듬해에 이른바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 생각되는 고명지인(高名之人) 40여명을 귀양 보낸 바 있는 의자왕은 17년에 41명에 달하는 왕서자(王庶子)들을 대거 좌평으로 임명하여 말하자면, '물타기'를 시도하여 좌평 직을 독점하고 있던 대성팔족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이들이 왕권에 등을 돌리게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임자(任子)라는 이름의 좌평은 신라 조정과 내통하여 신라 측으로 하여금 '백제를 병탄(倂呑)할 모의를 급하게' 진행시키기도 했음이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는 백제, 특히 왕도(王都)인 부여 관민을 상대로 하는 선전전을 펼치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의자왕 말기, 특히 19년, 20년 경에 쏟아져 나온 이른바 망조 중에서 그러한 심리전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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