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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그리고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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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그리고 오늘은?

김민웅의 세상읽기 <88>

어느 새 30년에 이르는 지난 청년의 시간에 밤을 새며 열독(熱讀)했던 고은 선생의 <1950년대>가 재출간되어 책방에 두꺼운 장정본으로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습니다. <1950년대>라는 굵은 활자는, 그 시대가 이제는 하도 아득해서 마치 고서본(古書本)의 제자(題字)와 같은 인상을 줄 수 있기도 했지만, 여전히 낡지 않은 힘으로 눈에 와 박혔습니다.

70년대의 절망과 낭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50년대의 슬픈 그림자를 보았고, 그 음산한 폐허를 딛고 일어서려 했던 가난한 청춘들의 처절한 기록을 아프게 읽었던 기억이 순간 고스란히 살아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너무도 바쁘게 지낸 나머지 어지간히 노력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었던 우정어린 벗을 우연히 길에서 기쁘게 마주친 느낌을 주었던 것입니다.

고은 선생은 자신의 재출간 발문에 그 시절의 책을 다시 내는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면서 "무엇보다 나는 지난날이나 돌아다보는 시간의 낭비를 싫어한다. 향수란 때때로 삶의 전위성에 대한 범죄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따금 냉전시대의 흔적이 글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자화상을 그린 그의 솜씨는 오늘날에도 더욱 경탄할 만하며, 그러면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고백해야 마땅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해서 그 책이 다시 서고(書庫)에 올려진 것은 전혀 낭비가 아니며 지금은 상투적 비유의 위치조차 잃어버린 말이 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위력까지 발휘하고 있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고전(古典)은 그래서 시간의 격류(激流)를 이기고 살아남아 당대에는 혹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지 모를 후대에게도 홀연 동시대의 육성처럼 다가오는 법입니다.

고은 선생의 <1950년대>는 그에게 다 찌그러져가는 가건물(假建物) 속의 삶처럼 초라한 향수로 남아 다시 돌아보기에는 그 무슨 어긋남으로 그의 심사에 쓸쓸하게 잔류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읽는 이의 가슴에는 '전쟁과 폐허의 시대'가 한 탁월한 영혼의 소유자를 통해 탄생시킨 퇴색할 수 없는 보석이 됩니다.

그는 "아마도 다른 시대에 태어나거나, 다른 시대에 무엇을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이 1950년대만치 기이한 동물들의 생태학이 낯선 것은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고 우려하고 있으나 그가 드러내 보이는 아픔들은 시간을 넘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적군도 죽으면 적군이 아니고 동포가 되는 그 뼈저린 죽음'을 체험한 세대의 현실을 그는 이렇게 토로합니다. "모든 곳은 전장이었고, 전쟁 속의 시장이었다. 생활은 무너진 집터와 참호 속에서 가능했다. 참호의 아들로서, 바라크의 아들로서 1950년대의 실향세대는 태어났던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전후세대의 비극적 낭만에 대해 그는 또한 이렇게 하나의 오래 전 사멸해버린 풍경화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시대의 다방은 겨우 판자로 메운 것들이라 바닥도 계단도 삐걱거리기 일쑤였다. 그런 다방 엠프레스의 문을 키 작은 이철범이 실존적으로 쓰윽 열고 얼굴을 내민다. 다방 안을, 저 자신이 천재가 되는 것 같은 인상파의 표정으로 훑어보고 그 무렵의 얼마동안을 라이벌이 된 이어령을 찾다가 없으면 아는 얼굴에 까닥하고 나가기도 했다. 그것이 실존주의적 전후문학의 표정이었다.

이런 조작된 문학적 표정에 끝까지 참다가 참지 못해서 저녁 6시의 명동은 참아 온 실존적 스트레스가 폭발해서 이미 술 취한 실존주의로 절규하고 떠들고 왁자지껄해지는 것이 밤의 명동 그러나 암울하고 시끄러운 명동이었다. 그리고 명동의 술은 밤뿐이 아니었다. 대낮에도 술을 마셔야 했다. 비만 뿌려도, 비바람만 지나가도 술의 이유가 되었다. 전쟁을 체험했다, 전쟁을 목격했다는 것만으로 오늘 하루의 이유가 되었다...."

삶의 생동감 넘치는 목적을 상실해버린, 이른바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 그래서 폐허와 퇴폐와 실존주의적 허세와 현실적 체념과 문학적 우수와 기어코 술 취함으로 시대의 실패에 대한 최소한의 반란행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가련한 청춘들이, 때로는 어설프게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비극적으로 통과해 온 시대를 다시 대면하는 것은 이 속도감 충만한 현재의 속성으로 볼 때 더 이상 듣지 않는 축음기의 노래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청춘들은 과연 얼마나 풍족한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차가운 폐허와 허무를 문학의 자본, 문학의 체온으로 삼았던 세대의 정신적 내면과 비교해볼 때 날로 놀라운 디자인을 선보이는 첨단의 문명을 일상으로 알고 지내는 세대는 그에 비해 얼마나 부유하고 뜨거울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말입니다. 도리어 그래서 잃어버리는 것이 많은 역설을 미처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우리는 세월에 추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고은 선생이 기록한, 신화의 빛깔을 지닌 <1950년대>만큼이나 이 시대를 정직하고도 가열차게 그러면서도 시대의 보이지 않는 경락을 명확하게 짚어 고백할 수 있는 그런 행운을, 오다가다 스치는 길에서 또다시 만날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는 갈망이 여전히 식지 않은 여름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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