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경제의 질주는 과연 언제 멈출 것인가? 최근 수년간 러시아가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의 계속된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세를 이어가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하자 한국을 포함한 서방의 주요 언론들은 러시아를 가리켜 중국, 인도와 함께 세계가 주목해야 할 가장 유망한 신흥 경제강국 중의 하나라고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석유가스 산업을 중심으로 러시아 기업들의 해외진출이 적극 모색되면서 ‘공룡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는 소리도 들리고, 러시아가 WTO 가입을 앞두고 ‘세계시장 제패’의 야망을 키우고 있다는 우려 섞인 전망마저 내놓고 있다.
최근 러시아의 역동적 변화를 들여다보면 마치 반전과 반전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다. 구소연방 붕괴 이후 1990년대의 10년은 1980년대 남미의 ‘잃어버린 10년’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시대였다. 러시아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로 호칭되는 긴축기조의 안정화, 자유화, 사유화 프로그램에 따라 급진적인 체제전환을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생산감소, 산업화의 퇴행, 투자위기 등이 가속화되고, 절대대다수 국민의 생활수준이 급격히 하락하고 사회인프라가 해체되는 미증유의 참담한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러시아인에게 2000년대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아마도 체제이행의 ‘눈물의 계곡’을 벗어나 경제회생의 전기를 마련하고, 나아가 ‘성장과 도약’의 거대한 잠재력을 분출시켰던 전환기로 기억될 것이다. 실제로 최근 러시아경제는 장기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와 고공비행을 지속하고 있다. 1998년 8월 금융위기로 GDP 성장률이 -5.3%로 추락했지만, 이듬해에는 전년대비 6.4% 성장으로 급격한 회복세를 보여주더니, 이후 최근 5년간 연평균 6.8%의 GDP 성장률을 구가하며 경제대국을 향해 비상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경제의 안정과 성장 기조는 2000년에 취임한 푸틴의 ‘강한 정치적 리더쉽’으로 표현되는 대내 사회정치적·심리적 안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개방된 시장경제’를 표방하며 경제외교와 ‘친기업적 환경조성’에 주력한 푸틴의 정책 방향, 특히 권력구조 개편을 통해 경제의 발목을 잡았던 관료주의를 청산하려는 노력이 경제상황의 개선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서방 선진국들이 불황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데도 러시아 경제가 최근 수년간 ‘경제강국’을 향해 고속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유가 상승’이라는 호의적인 대외여건에 기인한다.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의 원유생산국(하루 7백34만배럴)이다. 수출의 54.6%를 차지하는 원유가격이 1999년부터 강세를 지속했고, 반면에 금융위기 이후 루블화 평가절하에 따른 수출경쟁력 향상이 러시아 경제회복의 커다란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또한 2000년 이후에는 설비투자 증가 및 러시아인들의 실질소득 증가로 인한 소비지출 증가가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2003년에는 7.3%의 GDP 성장률을 기록하여 러시아 정부는 지난 12년의 개혁기간 중 가장 성공적인 한 해로 평가했고, 2004년도의 경우에는 예전에 비해 가파른 경제성장률 증가 추세가 다소 둔화되기는 했지만 7.1%의 높은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제는 과거 체제전환기 러시아경제의 불안요인으로 지적된 문제들도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그동안 과중한 외채상환 부담이 연방정부의 재정여건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는데, 유가상승과 조세개혁으로 인한 세수증대와 긴축정책 등으로 러시아의 연방재정수지는 2000년 이후 흑자 기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나아가 지금은 넘쳐나는 ‘오일달러’로 외채의 조기 상환을 위한 방안 모색에 고민하고 있다. 물가상승률이 크게 둔화된 것도 최근의 주목할 만한 성과이다. 2000년에 20.2%에 달했던 물가상승률은 2004년에 11.7%로 떨어졌다. 러시아정부는 2005년에는 물가상승률을 한자리 수인 8.5%로 억제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또한 ‘카지노 자본주의’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주식시장이 이제는 가장 유망한 투자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체로 거시경제상황이 호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경제지표가 나타나면서 S&P, Moody's, Fitch 등 국제적인 신용평가기관은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조정했다. 게르만 그레프 경제개발통상장관은 러시아가 2005년 말경에는 세계적인 신용평가회사들로부터 투자안전 등급을 받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최근 러시아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에 힘입어 외국인직접투자(FDI)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변화들은 곧바로 러시아 경제를 바라보는 서방의 시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놓았고, 그에 따라 러시아의 투자매력도가 상승하고 있다.
러시아의 세계경제로의 편입도 보다 가속화되고 있다. 러시아 대외무역의 경우 GDP의 35%를 차지할 정도로 러시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출은 국제유가와 국제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내수시장 확대와 달러약세에 따라 수입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004년의 경우 수출은 전년대비 35% 증가한 1,834억 달러, 수입은 26.6% 증가한 963억 달러로 약 870억 달러에 달하는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러시아의 WTO 가입도 보다 앞당겨질 것으로 전망된다. 푸틴 정부의 집권 이래 꾸준히 추진된 WTO 가입은 현재 가입협상안 중 70% 정도가 해결된 상태이며, 향후 2,3년 안에 가입이 성사될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의 WTO 가입에는 현재 서비스시장 접근의 확대, 농업정책의 WTO 규정 합치, 에너지 이중가격제 폐지, 지적소유권 보호 등에서 이견이 있지만 2004년 5월 21일 러시아-EU 정상회담에서 EU와의 협상이 타결되었고, 향후 러시아는 미국, 일본, 중국과의 쌍무협상을 원활하게 타결한 뒤 WTO 가입을 종결지을 전망이다.
집권 2기를 맞은 러시아의 푸틴정권에서 핵심 키워드는 ‘경제성장’이다. 이러한 기조는 올 2월 5일에 최종 확정된 ‘2005~2008년 러시아의 사회경제발전 프로그램’에서 명확하게 읽을 수 있다. 러시아정부는 집권 2기의 경제정책 목표를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국민소득 수준을 향상시키고 빈곤층을 축소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10년 내 GDP를 배가(倍加)하고 러시아의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러시아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고, 세계 속에서 러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역할을 제고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경제성장 달성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가? 위의 프로그램에서 러시아정부는 이를 제약하는 요소로 ①행정·입법·사법제도 등 국가기능의 비효율 ②인적자원의 발전에 필요한 자극의 부족 ③낮은 경쟁수준과 비시장부분의 높은 비중 ④지방간 개혁실행 및 성과의 불균형 ⑤미흡한 러시아경제의 세계경제로의 통합 ⑥수출상품의 국제시세 변동에 취약한 대외의존적인 산업구조 ⑦교통·통신·전력 등 낙후된 인프라시설 등 크게 7가지를 지적했다. 그리고 세계화와 지식정보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현재의 국제환경에서 경쟁에 신속하게 적응하는 것만이 성공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 하에 선진국과 러시아의 발전 격차를 좁히고, 세계경제의 변화 추세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2005~2008년 러시아의 사회경제발전 프로그램’에서 러시아는 포스트산업사회로의 도약이라는 과제를 화두로 제기했다. 러시아정부는 이것이 ‘경쟁에서 생존할 것인가, 도태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인식하고, 이를 목표로 한 경제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선결조건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첫째, 단순한 성장이 아닌, 구조적이고 질적으로 향상된 경제성장을 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10년 간 경제성장 배가(倍加) 달성, 산업구조의 다각화와 국제경쟁력 향상을 통한 경제성장, 중장기적으로 안정적이고 높은 경제성장, 선진국과 같은 지식정보화 사회로의 진입을 통한 경제성장을 구현해야 한다.
둘째, 경제의 안정적인 기능은 효율적인 국가기구, 공평한 사법기구와 합당한 법집행체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셋째, 인적자원의 개발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조건이며, 특히 교육 및 보건부문의 개혁이 우선적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넷째, 경제정책은 안정적인 거시경제기반 위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다섯째, 법과 제도의 확립을 통해 각 경제주체들 간의 신뢰가 형성되어 ‘거래비용’을 낮춰야 하고, 명확하고 모든 경제주체들이 납득할 만한 ‘게임의 법칙’이 수립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국가가 그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국가의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한다는 측면만 놓고 보면 이러한 노선은 푸틴 집권 1기의 ‘국가우선주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국가의 역할’을 투사할 수 있는 능력과 개입의 방식, 집중해야 할 목표 등은 과거의 그것과 다른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고 강조하고 있다.
첫째, 신중한 경제개입을 요구하는 매우 정밀한 경제조율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최근 수년간 국가권력의 행정관리능력은 제고되었다. 국가는 공고화되어 1990년대보다 훨씬 주도적일 수 있게 되었으며, 시장의 자율적 조정기제를 이용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심화된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지식정보화 사회로의 진전이라는 새로운 국제환경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기업가적, 지적 잠재력을 발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을 창출해야 한다.
집권 2기 푸틴정권의 경제정책을 관통하는 기조는 체제전환의 혼란을 수습하고 시장인프라를 정비하는 정책에서 본격적으로 정부주도 하에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정책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고 있다. 이와 관련 러시아는 다른 국가들이 걸어온 경제개발의 성공과 실패를 교훈으로 삼겠지만 러시아는 ‘러시아의 길’을 찾아가겠다는 입장이다. 아직까지 ‘러시아의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하지만 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이 러시아를 지식정보화 사회로 진입시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데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는 원칙은 명확해 보인다.
특히, 선진산업국과 비교하여 보건, 교육, 연금, 사회보장 체계가 위기 상황에 다다른 국면에서 그 무엇보다도 국가가 효율적인 법집행을 제공하고 인적자원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전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러시아 정부는 ①인적자원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교육체계 및 교육프로그램 개혁 ②보건체계 운영의 효율성 향상 ③빈곤층 축소 ④행정개혁과 공공개혁을 통한 국가 서비스 기능의 효율성 제고 ⑤첨단과학기술 및 지식정보화 등 혁신부문의 발전 ⑥지역경제의 균형발전 ⑦교통·통신 등 인프라 확충 및 개발 ⑧공공부문의 경쟁력 강화와 독점 완화 등을 향후 사회경제정책의 핵심과제로 설정했다.
러시아는 과연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지속할 것인가? 최근 스위스 금융그룹 UBS 투자연구센터는 향후 20~30년 동안 러시아가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경제성장률 3위 자리를 놓고 브라질과 치열한 각축을 벌일 것으로 전망했으며,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경제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03년 1.2%에서 2025년이면 3.0%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미 골드만삭스는 러시아가 2028년 독일을 추월, 세계 5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 예측한 바 있다. 이러한 낙관적 전망에는 러시아가 석유, 천연가스 등 풍부한 에너지자원과 세계적 수준의 기초과학 및 우주항공 분야의 기술을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권력 하에 정부주도의 성공적인 시장개혁을 추진해나갈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어떤 전망도 낙관할 수 없는 상태이다. 러시아 정부에는 시장의 자율적 조정기제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진영과 국가의 경제조절기능을 강조하는 국가개입주의 진영이 ‘강한 러시아’라는 깃발 아래 동거하고 있다. 이들 사이의 세력균형이 유지되고 불안한 공존이 연장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푸틴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가 높고, 그 기저에는 고유가시대 자원수출을 통한 달러 유입과 실질국민소득 향상이라는 안전판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것이 지속되겠는가? 최근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었던 석유·가스 생산 증가율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노후시설의 교체 및 생산확대를 위한 설비투자도 감소하고 있다. 설사 고유가 추세가 장기간 지속된다 하더라도 자원수출에만 의존하여 경제 강대국이 되기에는 한계가 명확해 보인다. 국가의 규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러시아는 결코 ‘쿠웨이트’가 될 수 없다.
현재의 추세만 놓고 본다면 러시아의 경제 강대국화는 결코 실현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그러나 그저 단순한 경제규모의 팽창이 아니라 그 경제체제를 구성하는 사회경제적 제도의 발전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경험한 반주변부 자본주의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러시아 경제도 성장하고 있었다. 세계 산업생산에서 러시아의 비중은 1881~85년 간 3.4%에서 1896~1900년에는 5.0%로 증가하고, 다시 1913년에는 5.3%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 시기 러시아의 경제구조는 전통적인 부문과 현대적인 부문으로 나뉜 ‘이중구조'(dual structure)를 갖고 있었고, 이들과의 연계는 매우 약했다. 농민경제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부문은 여전히 임노동이 아닌 가족노동에 기초하고 있었고, 점진적인 성장을 했지만 후퇴와 변동을 자주하는 정체된 부문이었다. 빠르게 성장한 곳은 현대적인 공업부문이었다. 이 부문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고, 세계경제에 통합되어 있었으며, 그 역동적인 변화는 내부적 요소가 아닌 외부적 요소에 의해 결정되었다. 결론적으로 당시 산업화의 지속적인 발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하는 확대재생산 구조는 국내의 생산요소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세계경기 변동에 의해 좌우되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경제발전 전략은 사회경제적 제도는 바꾸지 않은 채 생산을 증대하려는 행태로 표출되었고, 이것은 전통적인 제도와 현대적 기술을 결합시키려는 모순적인 시도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외형적으로는 서구의 현대적 기술과 조직을 차용하고 서구로부터 자본을 도입하여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산업화를 모방하려 했지만 그것은 자연경제와 상품경제를 결합시키려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파국’과 ‘혁명’이었다.
만일 현대 러시아가 과거와 같이 국제 노동분업 구조에 편입되어 가공되지 않은 원료의 공급지이자 산업제품의 소비지로 고착화된다면, 그리고 절대 대다수 국민의 빈곤을 바탕으로 외연적 성장을 추진한다면 그러한 성장은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러시아가 경제의 ‘이중구조'(dual structure)를 넘어 진정한 경제 강대국으로 도약하려고 한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경제발전 과정에 드리워진 ’역사의 구조적 제약‘을 깨고 나가는 혁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부작용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