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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재벌ㆍ지방세력과의 권력투쟁에서 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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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푸틴, 재벌ㆍ지방세력과의 권력투쟁에서 우위

미래전략연구원의 '지구촌, 분석과 전망' <9> 푸틴 하의 러시아 2

푸틴 집권하의 러시아에서 주요 정치세력은 크게 네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 푸틴에 대한 개인적 충성을 약속한 국가안보엘리트 그룹, 재정부장관을 비롯한 자유주의 경제개혁 관료, 옐친 시절 막대한 부를 축적한 올리가르히, 호족화 경향을 띄었던 지방 주지사들로 나눌 수 있다. 이들간의 역관계가 바로 푸틴의 정치적 장래, 러시아 시장 경제의 성격과 민주주의의 상태를 규정짓는다. 이 권력암투에서 일단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세력은 푸틴과 그의 충성파들이다.

푸틴 집권 이후 정치적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러시아 경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1년 소련의 몰락 이후 체제전환의 급물살 속에서 러시아는 부침을 거듭하여 왔다. 국가가 사회 지배세력들에 완전히 포섭되는 것처럼 보인 시점에서 발생한 1995년의 거시경제 안정화와 1997년의 제 2차 경제개혁 추진 등은 예상치 못한 개혁 동학이었다. 이와 함께 더욱 우리의 주목을 끄는 놀라운 변화는 1999년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진행된 경제회생, 국가재정의 재건 등이다. 1992년 2천% 이상의 물가 상승률을 시작으로 1998년 모라토리움 선언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러시아의 체제 전환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고, 러시아는 제3세계 군으로 떨어지는 듯이 보였다. 바로 이때부터 현재까지 러시아는 거의 연평균 5-6%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푸틴과 올리가르히**

러시아의 이러한 경제 회복은 OECD가 분석하고 있듯이 안정적인 재산권질서에 기초하고 있다. 사이프러스로 유출되었던 러시아의 국부가 회귀하였고, 이전과 달리 석유산업 등에 대한 자본투자가 급격히 확대되었다. 여기서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할 점은 이러한 발전이 법적 합리적 정당성이 미발달한 러시아 국가 제도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1999년 이후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재산권 질서가 확립된 데는 올리가르히 사이의 극심한 내분에 힘입은 바 컸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권력이 정점에 도달한 그 순간 서로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좀 더 많은 국부를 찬탈하기 위한 극심한 내부 갈등에 휩싸였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러시아 정부는 올리가르히로부터 자율성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가엘리트들과 지배적 경제 행위자들 사이의 불안정하나마 세력균형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이들 분파 간에 주요한 타협이 이루어졌다. 올리가르히가 산업 활동에 전념하고 정치과정에 개입을 삼갈 경우 정부는 이들이 기존에 비정상적으로 획득한 국가자산에 대한 재산권을 보장해주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동의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처럼 보인 인물이 바로 유코스의 하르도코프스키였다. 1999년 이후 그가 소유한 유코스 석유회사는 자본투자와 생산성 면에서 여타 석유회사를 따돌리고 러시아 석유산업의 부흥과 경제 성장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 기업은 나름대로 이전과 달리 국가재정에 상당히 기여하였다. 유코스 회장 역시 러시아의 최대 부호가 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젊고 야심에 찬, 그리고 가장 친서방적 유코스 회장이 앞서 언급한 중요한 합의를 심각히 위반하는 행위를 하였다. 그는 2003년 총선에서 자유주의 정당에 정치자금을 지원할 것을 공약하였다. 그의 결정은 푸틴 집권 1기부터 끊이지 않았던 국가엘리트와 올리가르히(구옐친파)간 소규모 갈등과는 완전히 다른 전면전을 야기하게 충분한 도전이었다. 이전 시기 발생한 갈등은 권투로 말하면 잽이었는데, 유코스 회장의 자유주의 정당 지지선언은 스트레이트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푸틴은 더 이상 견제가 아닌 카운터펀치를 날리면서, 하르도코프스키와 함께 친올리가르히 세력인 정부 내 옐친잔당들을 하나씩 제거하였다. 이 갈등의 결과, 기존에 불투명하였던 세력상태가 명확해졌다. 국가안보엘리트들이 이전에 추락했던 자신들의 자존심을 회복하였고, 올리가르히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엘리트들의 다음 공격대상으로 주목받는 시브네프트 석유회사의 소유주인 아브라모비치의 운명 역시 흥미를 야기하는 대목이다.

지난 대선에도 알 수 있듯이 이제 푸틴은 2000년 선거에서와는 달리 정권 재창출을 위해 올리가르히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올리가르히가 푸틴의 2000년 대선 승리뿐만 아니라 이후 정치적 권위의 공고화에 주요하게 이바지하였다. 사실상 1999년 이후 급격히 향상된 국가재정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푸틴이 70% 이상 높은 국민적 지지를 구가할 수 있었다. 푸틴 정권은 올리가르히로부터 조세를 징수하여 연금생활자들에게 연금을 지급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지지를 공고히 하였다.

유코스 석유회사 사태는 이제 올리가르히와 안보엘리트 사이의 세력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이 사태에서 안보엘리트의 승리는 정치영역에서 푸틴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권위주의적 경향을 더욱 재촉할 것이다. 이제 언론인들뿐만 아니라 올리가르히 역시 저자세로 몸을 낮추지 않으면 유코스 회장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하지만 만약 안보엘리트가 천연자원 추출 산업 등 사유화된 전략산업을 전면적으로 재국유화시키고자 한다면, 이는 정치적 반란을 감행한 석유회사 사장을 처리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안보엘리트는 푸틴이 집권한 이후부터 재국유화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가시화될 경우, 2000년 이후 러시아가 이룩한 경제발전은 한 순간에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재국유화 시도로 인해 재산권 질서가 혼란에 빠질 경우 자본투자가 중단되어 경제성장이 후퇴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푸틴은 유코스 사태가 2000년의 올리가르히와의 합의-그들의 재산권을 인정한다는 합의-의 파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푸틴과 지방엘리트**

1990년대 초 공산정권이 혼란스럽게 무너지는 틈을 타서 지방에서도 중앙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와 권력을 독점한 강력한 엘리트 그룹이 발생하였다. 이들 지방엘리트는 1990년대 줄곧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지방엘리트들은 종종 중앙의 규칙과 법에 어긋나는 규정을 제정하고, 중앙의 조세행정을 방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러시아 비화폐경제 수립을 주도하였다. 1998년의 경우 전체 경제 거래의 51% 정도가 루블이 아닌 다른 교환수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방엘리트는 비화폐경제를 수립하고 중앙과 분리된 독자적인 경제운용체계를 수립하였다. 바로 지방엘리트의 도전은 기본적인 국가의 통치력을 위협하는 정도로 발전하였다.

푸틴은 집권 초기부터 이러한 지방엘리트의 분권화 경향에 강력히 도전하였다. 푸틴은 집권 1기 동안 행정기구 및 의회기구 재편을 비롯하여 정당법과 선거법 등을 개정하여 지방 주지사의 정치적 제도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제도적 개편과 함께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의 하나는 2000년대 들어 비화폐 경제거래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가재정분야에서 중앙이 지방에 대해 승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화폐수단을 통한 불투명한 뒷거래가 점차 어려워졌고, 지방은 재정적 자율성을 상실하였다. 최근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는 최 정점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지방선거를 철폐하고 크레믈린이 직접 주지사를 선출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중앙의 공격에 대해 지방은 분명히 공공연한 반대를 삼가고 있다. 올리가르히와 마찬가지로 몸을 낮추고 푸틴의 선별적인 공격대상에 지목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중앙이 눈에 띄게 지방을 옥죄어가지만, 중앙이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는 공산당-국가와 옐친 정부로부터 상당히 약한 하부구조 권력을 지닌 국가를 물려받았다. 따라서 중앙정부가 여러 가지 구체적인 명령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지방이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푸틴과 의회**

옐친과 달리 푸틴은 강력한 의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다. 옐친이 개혁 초기부터 의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경제개혁은 파행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옐친의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은 의회의 집단적 도전으로 인해 완전히 파산하였고, 1992년 물가상승률이 2천%를 넘었다. 옐친은 집권 내내 의회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의 강력한 도전에 부딪히면서, 초대통령제의 헌법적 권한에 의지하여 통치하였다. 의회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옐친은 강력한 권력당을 창출하는 데 흥미가 없었다.

이와 달리 푸틴은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권력당으로 통일당을 중심으로 통치하였다. 특히 2003년 총선 결과 통일당이 과반수를 훨씬 넘어서는 안정 의석을 확보하면서, 심지어 개헌가능성까지도 이야기되고 있다. 이와 함께 공산당과 극우 민족주의 야당(Liberal Democratic Party라는 당명과 정반대의 정강정책)은 더 이상 효과적인 반대세력이 아니었다. 이제 푸틴은 의회를 넘어서가 아니라 의회를 통해서 통치하고 있다. 최근 전체 의원을 모두 비례대표제로 선출하자는 크레믈린의 제안은 권력당인 통일당의 패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결론**

옐친의 러시아는 국가 붕괴의 위험까지 논할 정도로 중앙권위의 약화를 경험하였다. 이에 대비할 때 푸틴 집권 하에 보여준 러시아의 변화는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최근 국가엘리트들이 권위주의적 권력을 신속하게 공고화하는 양상을 관찰하면서, 1990년대가 러시아 국가제도사에서 극히 예외적 시기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분명 푸틴 집권 1기만 하더라도 아직 푸틴 대통령의 개인적 권위가 공고하지 않았고, 국가엘리트는 경제엘리트로부터 조건적 협동(conditional cooperation)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조세율의 대폭 인하 등 다양한 자유주의적 개혁 조처를 입안 추진하였다.

하지만 유코스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제 2기 푸틴정권에서는 대통령을 둘러싼 국가엘리트들이 올리가르히에 대해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 초등학교 인질극 해결과정을 목도하면서 뿌리 깊은 러시아 국가주의를 실감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뿌리 깊은 국가주의 전통이 러시아의 초대통령제와 만나고 있다. 헌법적으로 강력한 대통령이 10년 동안의 혼란에 환멸을 느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다양한 권위주의 조처를 취하는 과정에서 효과적인 정치적 반대는 쉽게 발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푸틴과 그의 안보엘리트 그룹이 경제적 제도적 제약을 쉽게 극복하기 힘들다. 재산권 제도가 전면적으로 개편될 경우 경제적 혼란과 경제성장의 둔화가 예상되며, 이는 푸틴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허물게 될 것이다. 또한 국가 하부구조권력이 미발달한 상태에서 지방엘리트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이와 더불어 그루지아, 우크라이나, 키르키즈스탄의 민주혁명이 러시아가 완전히 권위주의로 이행하는 것에 강력한 제동을 걸고 있다. 종합하면 푸틴이 정치적 반대자를 선별적으로 억압 배제하면서 권위주의를 강화할 것이지만, 헌법개정을 포함한 전면적 권위주의로의 선회를 시도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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