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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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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9>

굴산조사 범일의 묻혀진 유적들: 강릉 굴산사 터

『삼국유사』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ㆍ조신’조의 설화들은 의상과 원효가 관음보살 친견에 성공 또는 실패했다든가, 관음보살이 준 보주를 걸승이 결사적으로 지켜냈다든가, 조신이 관음보살의 깨우침으로 망상에서 벗어났다든가 해서 관음보살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오직 범일(梵日)과 정취보살 설화가 여기에서 벗어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관음보살 다음에 정취보살을 만나는데, 이 정취보살이 관음보살의 응현(應現)이라는 설이 있고 보면 이 설화도 결국 관음보살에 관한 것으로 귀착될 수 있지만, 관음보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범일과 정취보살 설화는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ㆍ조신’조의 다른 이야기들과는 아무래도 구별이 된다고밖에 할 수 없다. 설화의 요지는 이렇다.

범일이 당나라에 유학 갔을 때 한 쪽 귀가 없는 사미(沙彌)를 만난다. 그 사미가 범일에게 자신의 고향이 명주(溟洲) 지경 익령현 덕기방이라고 범일과 동향임을 밝히며, 범일이 귀국하면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 달라고 부탁한다. 이후 범일은 중국 각지를 두루 다니다가 귀국한 후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불교를 전교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당나라에서 보았던 사미가 나타나 전일의 약속을 일깨우고 범일은 놀라 깨어난다. 범일이 사람들을 데리고 익령 지경에 가서 그 사미의 집을 찾다가 낙산 아래 마을에서 덕기라는 여인을 만나고, 그 여인의 아들과 함께 놀았다는 ‘금빛 나는 아이’를 찾았더니 물 속에 한쪽 귀가 떨어진 돌부처가 있었는데 이가 곧 정취보살의 상이었다. 범일은 세 칸 전각을 지어 불상을 모셨다.

일연은 정취보살 설화 바로 뒤에 주석을 붙이고 있는데, “고본(古本) 기록에는 범일의 사연이 의상, 원효의 사연보다 앞서 나와 있지만 의상, 원효의 일이 범일의 일보다 170년이나 앞서므로 글의 순서를 바꾸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범일 당시의 낙산사가 창건된 지 170년이나 되어 절이 퇴락했을 가능성이 있었고, 범일이 정취보살상을 찾아내 정취전을 지어 모셨다는 설화가 낙산사 중창을 말해 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이 아마도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ㆍ조신’조에 범일이 등장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삼국유사』가 낙산사와 관련된 것 말고 범일의 활동에 관해 언급한 것이 있다면, 범일이 정취보살을 찾기에 앞서 “중국에서 돌아와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불교를 전교하였다”라는 한 문장 뿐이다. 얼핏 흘려듣고 넘길 수도 있는 이 문장 하나에는 그러나 생각 밖으로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범일은 신라 말 명주 굴산사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꼽히는 사굴산파를 개창한 고승이다. 명주 태생인 범일은 명주 도독을 지낸 김술원의 손자로, 20세에 경주에 가서 구족계를 받고, 중국으로 들어가 구법하겠다고 결심하여 831년 왕자 김의종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동행하였다. 당나라에 도착한 후에는 구도행각에 올라 선지식을 두루 찾던 중에 마조(馬祖) 문하였던 염관(鹽官) 제안(齊安)선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의 대화가 『조당집(祖堂集)』에 전해지고 있다.

“어디에서 왔는가?”
“동국(東國)에서 왔습니다.”
“바다를 건너왔는가? 육지로 걸어왔는가?”
“바다도 건너지 않고 육지로 걷지도 않고 왔습니다.”
“두 길을 밟지 않고 어떻게 왔는가?”
“해와 달이 동과 서에 있으니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동국의 보살이로다!”

이런 문답 끝에 범일이 물었다.
“어찌하면 성불할 수 있습니까?”
“도(道)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그저 더럽히지 마라. 부처란 견해, 보살이란 견해를 짓지 마라. 평상심이 곧 도이니라”

이에 범일은 크게 깨우쳐 6년 동안 제안선사 밑에서 수련한 후,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847년에 귀국하였다. 범일이 경주 인근에서 수도하다가 851년 회덕 백달산에 머물던 중 명주 도독 김공(金公)이 굴산사에 주석하며 법을 펴줄 것을 청하여, 범일은 굴산사로 가서 사굴산문을 개창하게 된다.

범일의 고명이 널리 알려지면서 871년에 경문왕이, 880년에 헌강왕이, 그리고 887년에 정강왕이 각각 사신을 보내어 국사(國師)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범일은 응하지 않고 굴산사에 머무르며 40여 년을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하였다. 범일의 법맥을 이은 제자로는 개청(開淸), 행적(行寂) 등 10성(十聖) 제자가 있으며 고려 시대에는 순천 정혜사의 혜소(慧炤)와 그 제자 단성 단속사의 탄연(坦然), 그리고 고려 중기에 선(禪)을 크게 중흥시킨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있다.

이쯤 되면, 일연이 참고했다던 고본(古本) 기록에 왜 범일의 사연이 의상, 원효의 사연보다 앞서 나와 있는지 그 이유를 되새겨 볼 필요가 생긴다. 이 대목에서는 명지대 신천식 교수가 1980년에 발표한 ‘한국불교사상에서 본 범일의 위치와 굴산사의 역사성 검토’라는 글이 참고된다.

“범일의 법통은 오늘날 불교의 정맥으로 연승(連承)되고 있으며 적어도 영동지방에 관한 한 그의 업적은 의상, 원효보다도 위대하였다. 범일과 그의 문도들은 굴산사를 본종지(本宗旨)의 주본사(主本寺)로 하면서 전국적으로 사굴산파 선문을 전교하였다. 특히 영동지방 일원에는 그의 행적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삼척의 삼화사, 강릉의 신복사, 명주군의 보현사, 양양군의 낙산사, 평창군의 월정사 등은 범일 또는 그의 문도들에 의해 개창 또는 중창된 사찰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범일의 행적은 설화의 형식으로 영동지방에 구전되고 있으며, 특히 강릉 지방에는 신격적(神格的) 존재로 승화되어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봉사(奉祀)되고 있다. 음력 5월 5일의 강릉단오제도 이와 유관한 전설을 모체로 전승되고 있다.”(『영동문화』, 1980)

굴산사는 지금의 강릉 근교 구정면 학산리에 있었으며 절터의 면적은 약 50만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굴산사 터에는 몇 가지 유물들이 남아 있어 옛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해 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당간지주인데, 다듬지 않은 듯한 두 개의 커다란 돌기둥으로 서 있는 굴산사 당간지주는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오래 전부터 관심 있는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왔다. 당간지주 인근에는 또 얼굴이 깨어진 비로자나불 석상도 전각 속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에서 북쪽으로 가면 나지막한 언덕받이의 인가 곁에 범일의 것으로 전해지는 부도탑이 있는데, 아름다운 주악상이 새겨진 이 부도탑은 다른 석질의 부재들로 이루어져 있어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다. 신천식 교수에 의하면 이 부도는 근처에 있었던 또 다른 부도의 탑재가 뒤섞여 조립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유적 말고도 범일의 탄생 설화가 깃든 석천(石泉)이라는 우물도 있다. 강릉읍지 『임영지(臨瀛誌)』에, 굴산의 한 양가 처녀가 그 물을 먹고 잉태하여 14개월 만에 옥동자를 낳았는데 그가 곧 범일이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석천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앞에 있었는데 재작년인가 영동지방을 휩쓴 폭우로 토사에 휩쓸려 묻혀서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굴산사 터에서 강릉 시내 쪽으로 머지 않은 곳에는 굴산사 말사였던 신복사 터가 있어, 공양 보살상이 3층 석탑을 마주하고 있는, 탑상을 겸비한 얌전한 유적이 남아 있다. 강릉에서 대관령 쪽, 새로 뚫린 영동고속도로의 높다란 교각들 사이로 산을 오르다 보면, 보현사에 범일의 수제자 개청의 부도탑과 탑비가 있고 또 대관령 근처 성황당에는 범일의 영정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이처럼 적지 않은 유적들이 남아 있음에도 범일은 강릉을 중심으로 하는 영동 지역에서만 이름이 알려져 있을 뿐 이 지역을 벗어나면 알아주는 사람도 드물다. 범일이 『삼국유사』에서조차 사굴산파의 개창자로서가 아니라, 의상이 창건한 낙산사의 중창자로서 스쳐지나가듯 언급되고 있음을 보면, 범일과 관련된 유적들이 새삼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신라 말 구산선문 중에 가장 번성했던 선문 중의 하나였으며, 역대 왕들이 범일을 국사로 모시고자 잇달아 사신을 보내곤 했던 사굴산문의 옛 영화(榮華)가 유난히 서글퍼지는 곳이 바로 굴산사 옛터이다.

사진 제목입니다.

01 굴산사 터 당간지주와 그 세부
02 굴산사 터 부도탑과 부도탑의 주악상
03 신복사 터 3층탑과 공양보살상, 공양보살상의 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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