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부처와의 인연이 지극한 땅이다. 과거부터 부처와 인연이 있었으며, 현재에는 여러 불·보살이 상주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있고, 미래에도 불·보살들이 수적(垂迹)할 영원한 불국토가 우리나라라는 것이다. 그러한, 부처와의 인연은 전국 각지의 산 이름에 가장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예를 들자면 비로봉이란 비로자나불이 상주하는 곳이며, 용화산, 미륵봉 등은 미륵이 성도할 곳이며, 문수봉, 보현봉, 세지봉 등등은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세지보살의 상주처임을 상징하고 있다.
금강산은, 불교식 이름으로 장엄되어 있는 매우 화려한 예가 되고 있다. 산 이름 자체를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불교 경전에서 따온 금강산은, 곳곳의 봉우리며 계곡, 기타 명승들이 불교식으로 작명되어 있다. 봉우리들로는 최고봉인 비로봉을 비롯, 외금강에 관음봉, 세존봉, 세지봉이 있고 내금강에는 법기봉, 석가봉, 지장봉, 시왕봉 등이 있다. 산중 곳곳의 명소도 중향성, 불정대, 명경대, 마하연, 천불동, 금강문, 극락문, 지옥문 등등으로 되어 있음에, 금강산은 산 전체가 하나의 불국을 이루고 있는, 불국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강산이 불교식으로 장엄된, 아마도 최초의 사례를 우리는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탑상편 ‘대산오만진신’조를 보면 자장(慈藏)이 강원도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상주처로 삼게 되는 얘기가 실려 있다.
자장이 당나라로 유학 가 있을 때 태화못 가에서 이름 모를 승려를 만났는데 그 승려로부터 “너희 나라 동북방 명주(溟州) 지경에 있는 오대산에 1만이나 되는 문수보살이 항상 머물러 있으니 그곳에 가 보아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상주처라는 믿음은 화엄경 보살주처품에 의거한 것인데, 자장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 신라의 동북방 변두리 일대를 돌아다녔다. 이 과정에서 자장은, 오대천 하류에 수다사를 세우고, 지금의 월정사 터에 움막도 짓고, 다시 정선 쪽으로 가서 정암사를 세우기도 했지만, 정작 문수보살이 나타났을 때에는 미처 알아보지 못함으로써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사실이 의해편 ‘자장정률’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자장이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상주처로 비정(比定)한 이래, 후대로 내려오면서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뿐 아니라 5만이나 되는 다른 불ㆍ보살들이 상주하고 있다는 본격적인 오대산 신앙이 등장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일연은 ‘대산오만진신’조와 ‘명주오대산 보질도태자 전기’조의 두 기사에서 다소 중복되는 기록을 싣고 있는데 그중 ‘대산오만진신’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 보천(寶川)ㆍ효명(孝明) 두 형제가 하서부(河西府, 지금의 강릉)에 와서 세헌(世獻) 각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큰 고개를 넘어서 각각 무리 1천명을 거느리고 성오평에 도착하여 여러 날 유람하였다. 하루 저녁에는 두 형제가 속세를 벗어날 뜻으로 남몰래 약속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다. 그들을 따르던 무리들은 형제의 행방을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서라벌로 돌아갔다.
두 태자가 산중에 이르렀더니 푸른 연꽃이 홀연히 피어나, 형 되는 태자가 거기에 암자를 짓고 머물어 보천암이라 하였다. 거기서 동북 쪽으로 6백여 보를 가서 북대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어 아우 되는 효명 태자가 또 암자를 짓고 머물었다. 두 형제는 각자 부지런히 공부를 하였다.
하루는 두 형제가 함께 오봉에 올라 예배코자 하니 동대 만월산에 1만 관음보살이, 남대 기린산에는 8대 보살을 필두로 한 1만 지장보살이, 서대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필두로 1만 대세지보살이, 북대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필두로 5백 대아라한이, 중대 풍로산은 지로산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비로자나를 필두로 1만 문수보살이 나타났다. 형제는 5만의 진신 불ㆍ보살에게 일일이 예배를 하였다. 그후 매일 새벽이 되면 문수보살이 36가지 형상으로 화하여 나타났는데, 두 태자는 함께 예배하고, 날마다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에는 각자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이때 정신왕의 아우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매 나라 사람들이 왕을 폐위시키고 장군 네 명을 보내서 오대산에 와서 태자를 맞아 오게 하였다. 그들이 먼저 효명암 앞에 와서 만세를 부르니 오색 구름이 일어 이레 동안 그곳에 드리웠다. 나라 사람들이 구름을 따라 그 곳에 다다라서 수레를 벌여 세우고 두 태자를 맞아가려고 했으나 보천은 울면서 사양하므로 효명만 모시고 돌아와서, 효명이 왕위에 올랐다. 효명이 나라를 다스린 지 몇 해만인 신룡 원년(705년) 을사 3월 4일에 진여원(眞如院, 지금의 상원사)을 처음 세웠다.“
이 기사의 주석에서 일연은 효명을 신라 32대 효소왕이라고 고증했으나, 학계에서는 효명을, 효소왕이 아들 없이 돌아간 후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33대 성덕왕으로 보고 있다. 아무튼 이 기사는, 자장에게는 문수보살의 주처로 이해되던 오대산이, 후대에 이르러 문수보살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불ㆍ보살들이 오대산에 상주하고 있다고 이해되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오대산에 대한 불교식 장엄이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오대산의 오방불 신앙은, 중국에서 오행사상과 밀교 신앙이 혼합되어 이루어졌던 것으로 이것이 신라에 유입된 것이다. 중국의 경우, 오방불 신앙이 성립되면서 지금의 산서성에 위치한 청량산에 동, 서, 남, 북, 중 다섯 대(臺)를 세워 오대산으로 삼았는데 신라에 오대산 신앙이 유입되면서 오대산 자체도 그대로 신라 땅에 ‘복제’되었던 셈이다.
신라가 중국의 오대산 신앙을 받아들임에 있어 중국의 예를 답습하지 않고 신라의 신앙 실정에 맞도록 변형하기도 했는데, 중국 쪽에서는 동쪽, 남쪽 방위에 설정되었던 아축불과 보생여래가 신라에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로 바뀐 점 등이 그러하다. ‘대산오만진신’조 말미에는 보천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써놓은 ‘나라에 도움될 일’이 수록되어 있어 오대산신앙 의례가 비교적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장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자취를 뒤쫓던 중 잠깐 머물렀던 자리에 월정사라는 절이 들어서게 되는 경위가 ‘대산오만진신’조와 ‘대산 월정사 오류성중’조에 중복되어 등장하는데 그 내용을 추리면 이렇다.
“공주 사람으로 효자로 알려진 신효(信孝) 거사가 어머니를 모시려고 경주와 하슬라주를 거쳐서, 자장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움막을 짓고 머물렀던 곳에 이르렀을 때 오대산에 상주하는 석가, 관음, 문수, 대세지, 지장 등 다섯 성중(聖衆)의 화신들이 나타나서 신효는 거기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후 구산선문 사굴산파 범일의 제자 신의(信義)가 거기에 암자를 지어서 살았고, 뒤이어 수다사의 장로 유연(有緣)이 와서 살면서 점차 큰 절이 된 것이 지금의 월정사이다. 절에 있는 5류성중과 9층 석탑은 모두 거룩한 유적들이다. 풍수의 말로는 국내 명산 중에서 그 자리가 가장 좋아 불교가 길이 흥왕할 자리로 알려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 오대산에는 산 입구에 월정사가 있고, 안쪽 깊은 곳에 상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 동대 관음암, 남대 지장암, 서대 수정암, 북대 미륵암이 방위에 따라 흩어져 있고 그리고 중대에는 사자암과,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오대산 초입 월정사에서부터 산길을 걸어서 상원사, 중대를 거쳐 정상 비로봉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면, 남쪽으로 서대 호령봉, 북쪽으로는 북대 상왕봉, 동쪽으로는 동대산이 보이고, 월정사 방향으로 멀리 남대 쪽이 보인다. 그리고 이들 동ㆍ서ㆍ남ㆍ북 네 곳의 대에 에워싸인, 한 가운데 화심(花心)에 해당하는 곳에 적멸보궁이 자리한 중대가 보인다.
그 너르면서도 아늑한 풍경을 마주하고 서 있노라면 내 머리 속으로, 천 몇백 년 전에 이 곳을 문수신앙의 성지로 만들고 나아가 이 땅 전체를 불국토로 만들어 나갔던 선인들의 지극한 신심이 아련하게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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