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신라 사람이다.”
“아니다, 서역 사람일지도 모른다.”
“신라 사람이긴 한데 중국에 유학해서 서역 미술을 배워왔을 것이다.”
한 예술가의 국적 문제를 두고, 한국 불교미술사 분야에서 대가로 꼽히는 세 학자가 저마다 다른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 것인가? 학자들이 문제삼고 있는 인물은 『삼국유사』 의해편 ‘양지사석’조의 주인공 양지(良志)이다.
사진 1) 국립박물관 사천왕사 팔부신중 @김대식
일찍이 양지를 주목했던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그의 기법과 양식이 새로운 양식의 시원(始源)”이라고 규정하면서 양지를 신라 사람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했던 이화여대 강우방 교수는 ”혹시 그는 신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양지의 국적에 의문을 제기했고, 양지의 작품들이 삼국시대의 미술양식과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도상(圖像), 새로운 양식,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재료를 선호한 것으로 보아 그가 외래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주장했다. 서역인으로서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신라로 귀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동국대 장충식 교수는 “양지는 젊은 시절에 분명 서역을 오랫동안 여행하였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불교미술에 대한 수련을 쌓은 인물일 가능성이 짙다”고 추정하면서 “신라 일세(一世)에 국한된 인물이 아니라 인도 서역적 조각 유풍을 지닌 국제적 인물로서 조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들에 대해 문명대 교수는 다시, “양지는 젊었을 때 혹시 중국에 유학 갔다 왔을 가능성은 전혀 배제할 수 없지만……”이라는 표현으로 양보하면서도 “양지가 외래인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못박고 있다.
양지는 『삼국유사』에서는 드물게, 예술가로 기술되고 있다. ‘양지사석’조가 의해편, 그러니까 고승들의 열전 중에 들어 있음에도 양지는 승려로서보다는 예술가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진2) 감은사 동탑 사리함 지국천왕/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감은사지 동3층석탑 사리장엄』, 2000
‘양지사석’조에는 양지가 만들었다는 작품이 여럿 열거되고 있다. 신라의 전불(前佛)시대 7처 가람 중 한 곳으로 꼽히는 영묘사의 장륙상을 비롯하여, 같은 절의 사천왕상, 전각 및 탑의 기와, 사천왕사의 탑 팔부신장, 법림사의 주불 삼존과 좌우 금강신,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 글씨, 석장사의 삼천불 전탑 등등이 그것이다. 이 목록으로 미루어 양지는 조소, 서예, 기와공예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불교미술사의 보고(寶庫)라고 일컬어지는 『삼국유사』 탑상편에도 이처럼 세세하게 작품 목록이 열거된 예술가를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이 작품들 뿐 아니다. 몇몇 학자들은, 분황사 모전석탑의 인왕상, 문무왕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의 소조상, 금속공예의 극치로 꼽히는 감은사 동서 쌍탑의 사리구에까지 양지의 손길이 미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쯤 되면 양지는 당대 최고를 넘어, 한국 역사상 최고의 예술가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이렇게 열거된 작품들 중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양지사석’조에 양지의 작품 활동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영묘사 장륙상의 경우, 양지가 선정(禪定)에 들어 삼매경에서 보았던 부처의 모습을 법식으로 하여 장륙상을 소조(塑造)할 때, 서라벌의 선남선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나르며 풍요(風謠)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은 영묘사 장륙상이 단순한 손끝 재간이 아니라 종교적 영감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해 주면서, 동시에 그의 작품활동이 일반 대중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는 구체적 정황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위대한 작품의 탄생 과정을 말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양지사석’조에 언급되고 있는 작품들 중 양지의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지는 몇몇 작품들의 파편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사천왕사 탑 팔부신중 조각들과 경주 동국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석장사 터 출토 탑상문전(塔像紋塼)들이 바로 그것이다.
양지의 작품임이 확실한 사천왕사 출토의 팔부신중이나 석장사의 탑상문전이 그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찬탄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 아니라,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몇몇 학자들이 양지 소작(所作)으로 보는 감은사 쌍탑 사리함 조각은 신라 공예기술의 지극한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대 미술사가들의 말을 빌릴 것 없이, 『삼국유사』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조에서 당나라 황제 대종이 했다는 찬탄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는 신라 조각품 ‘만불산’을 두고 ’신라의 재간은 하늘의 솜씨이지 사람의 재주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양지의 국적에 대해 이견을 보이고 있는 미술사학자들이 한결같이 동의하고 있는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양지의 작품이 당나라의 양식과도 구분되는 '중앙아시아적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든가(문명대), '그의 뛰어난 조각 기법은 곧 서역적 수법에 능통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든가(장충식), '양지가 서역풍의 조각을 상당히 만든 조각가로서 명성이 높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강우방)는 발언들에서 보이듯, 양지의 작품에 서역풍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간다라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석가 고행상(苦行像)의 모습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석장사 터 출토의 탑상문전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작품 소재의 관점에서 양지 작품의 '서역풍'을 거들어 주고 있다. 이러한 서역풍은 양지의 소작(所作) 여부에 논란이 있는 감은사 동서 쌍탑 출토의 사리함 조각에도 여실하다.
이 서역풍과 관련하여 문명대 교수는 “그의 기법과 양식이 새로운 양식의 시원인 것, 따라서 그의 유파를 설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고, 강우방 교수 또한 “양지의 작품들이 삼국시대의 미술양식과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도상(圖像), 새로운 양식,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양지가 우리나라 고대 미술사에 있어 새로운 획을 그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사진3) 석장사출토 석가고행상 탑상문전 / 출처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석장사지』, 1994
감은사 동서 쌍탑의 사리함을 양지가 만들었는지 여부의 논란은 양지의 작품활동 시기 문제로 이어진다. ‘양지사석’조는 “양지의 행적이 선덕여왕 대에만 드러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선덕여왕 대와 감은사 탑 사리구가 만들어지는 신문왕 대와는 약 50년의 시차가 있다. 양지가 영묘사 장륙상을 만들던 선덕여왕 때의 나이를 서른으로 친다면, 감은사탑 사리구 조각은 양지의 나이 일흔이나 여든에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다소 무리한 추정이다. 그렇다면 감은사 탑 사리구가 양지의 제자나 또는 양지의 작풍(作風)에 익숙한 다른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만일 양지의 작풍을 따르는 일단의 예인들이 있어 감은사탑 사리함 조각을 만들었다면 그들이 하나의 유파를 이루었다든지 아니면 양지의 작풍이 하나의 흐름으로 성립되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의 옛그림』의 저자 동주 이용희 선생은 조선조 후기 회화사를 개관하면서,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 일으킨 문인화의 새 바람을 ‘완당 바람’이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삼국시대 말, 통일신라 초 신라에서 양지가 서역풍의 새로운 기법과 양식을 도입하여 하나의 새로운 흐름을 일으켰다면, 우리는 그 흐름을 ‘양지 바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를 털어놓자면, 나는 이러한 바람을 몰고 왔던 양지가 서역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에 끌리는 편이다. 그 이유로는, 우선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서역풍을 들 수 있겠고 여기에 덧붙여 『삼국유사』 ‘양지사석’조에서 풍기는 묘한 뉘앙스를 꼽을 수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탑상편 ‘영묘사 장륙’조에서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세우고 소상을 만든 내력은 ‘양지법사전’에 자세하다”고 하여 ‘양지법사전’이라는 글을 언급하고 있다. 일연은 양지의 전기로 추정되는 그 글을 읽고 참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양지사석’조 첫머리에 “그의 조상과 고향이 자세치 않다(未詳祖考鄕邑)”라고 쓰고 있음을 볼 때, 일연은 양지의 소종래(所從來)에 대하여 일부러 말을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양지가 신라 사람이었다면 그의 출신 또는 국적과 관련하여 일연이 그렇게 얼버무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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