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간에 몸을 의지하면 무한강산이 다투어 발 아래에서 달리고
먼 하늘 끝으로 눈을 주면 드넓은 건곤(乾坤)이 가슴을 파고드니
가람의 승경(勝景)이 이만한 곳이 다시 없더라“
영주 부석사 안양루에 걸려 있는 “무량수전 및 여러 전각 중수기”에 나오는 글이다. 거기 안양루에서 내다보이는 경치를 이보다 더 적절히 표현한 글을 나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어느 해 겨울이던가 안양루에 올랐다가 ‘발 아래에서 다투어 달리는 무한강산’과 ‘먼 하늘 끝으로 펼쳐진 드넓은 건곤’을 마주쳤던 나는 넋을 놓았다. 그 장엄한 경치에 얼마 동안을 젖어 있었던지……, 나를 깨워 준 것은 추위였다. 나는 몸을 한번 소스라치고,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 안양루를 내려왔다. 그때의 인상은 아직도 새로워서, 부석사라는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내 혼은 허공을 날아 그 겨울의 안양루 난간에 기대서곤 한다.
그 때 안양루를 내려온 내 앞에는 또 석등이 하나, 오롯하게 서 있었다. 그 단아한 자태에 이끌려 나는 석등 주위를 한 바퀴 돌았고 그리고는 무량수전 전각을 마주하고 섰다. ‘無量壽殿’. 공민왕의 솜씨라는 현판 글씨가 눈을 끌었다. 글씨의 굵다란 획에서 느껴지는 힘이 무량수전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듯했다. 현판 아래로는 배흘림 기둥 사이 사이로 창살문들이 마치 병풍처럼 길게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서 스러지고 있던 잔양(殘陽)이 문득 애처로웠다.
나는 건축에 무지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무량수전의 기둥 때문에 회자되는 배흘림, 안쏠림, 귀솟음 같은 말도 그 건축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라 단어 자체가 주는 친근한 울림 때문에 마음이 솔깃해지는 편이다. 그런 무지에도 불구하고, 무량수전 전체는 장중함 그 자체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장중함에는 아마도, 무량수전 닫힌 문 너머에서 동면으로 좌정하고 있는 아미타불의 위엄이 덧보태어진 탓일지도 몰랐다.
안양루, 무량수전, 아미타불……. 그러고 보니 내가 서 있던 곳은 부석사의 정점이자 정수(精髓)였다. 절 초입의 일주문에서부터 내가 딛고 올라온 수많은 층계와 장대한 석단들은 이곳 무량수전 앞뜰로 나를 인도하기 위한 치밀한 준비였음에 틀림없었다.
무량수전 앞뜰이 부석사의 정점임은, 무량수전 동쪽 둔덕에 올라 서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안양루와 무량수전 사이의 공간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문득, 거기가 아미타불이 있다는 서방정토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안양(安養) 또는 극락. 그 아늑한 공간은 안양루에서의 전망과는 판이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부석사를 말하는 건축학자들은 바깥쪽으로는 안양루에서의 전망을 꼽고, 안쪽으로는 바로 이 무량수전 앞뜰을 꼽는지도 모른다.
이 풍경에서는 그러나, 어딘가 빈 듯한 느낌이 전해지기도 한다. 뜰 가운데에 달랑 서 있는 석등 하나만으로는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마도, 유명짜한 절들의 안뜰에 으례 자리잡고 있기 마련인 탑이 거기에는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석사에 탑이 없는 게 아니다. 탑은 내가 서 있던 곳 바로 뒤, 무량수전이 내려다보이는 둔덕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 탑이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나는 그 탑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탑이 왜, 여기에, 서 있는가?
그 탑이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다. 어떤 사람은 부석사가 창건되었을 때 같이 세워졌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아래쪽 범종루 앞의 쌍탑처럼, 그 탑도 부석사 인근의 절터에서 근래 옮겨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따지고 들다 보면, 탑의 위치 뿐 아니라 탑의 존재 자체가 의문으로 화한다. 이 의문을 풀어주는 열쇠가 있다. ‘부석사 원응국사비문’ 중에, 의상이 스승 지엄의 말을 빌어 했다는 귀절이 바로 그것이다.
“일승(一乘) 아미타불은 열반에 드는 일이 없으며 서방정토를 체(體)로 삼고 생멸상이 없다. …… 불타는 열반하지 않고 자리를 비우는 때도 없다. 그런 까닭에 보처불을 조성하지 않으며 탑도 세우지 않으니 이것이 일승의 깊은 뜻이다.”
부석사에는 애시당초 탑이 없었던 것이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은, 주존인 아미타불 외에 보처불, 그러니까 협시보살을 조성하지 않은 것과 그리고 탑을 세우지 않은 것을 일승 아미타불이란 말로 설명하면서 그것이 ‘일승의 깊은 뜻’이라고 강조했다.
해동화엄 초조(初祖)로 불리웠던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라는 짧은 글 속에 화엄사상을 다 담아냈다고 전한다. ‘일승’이란 화엄사상을 한 마디로 나타내는 말이다. 승(乘)은, 중생을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성불에 이르는 방편이다. 일승은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3승이 결국 대승불교의 일불승(一佛乘)에 귀일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일승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 화엄 사상에, 서방 정토를 내세운 아미타 신앙이 어우러진 것이 ‘일승 아미타불’의 경지이다. 그것은, 화엄의 연화장 세계와 아미타의 서방 정토가 원융(圓融)되는 것,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 보여주는 예는 일승 아미타불이 봉안된 부석사 외에도, 역시 의상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소백산 비로봉 아래 비로사에서도 발견된다. 비로사 적광전에는 특이하게도, 지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과 미타정인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의 양존이 나란히 봉안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우리는 화엄사상과 아미타신앙의 원융, 조화를 읽을 수 있다.
의상은 당시 최고의 철학사상이었던 화엄학과,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아미타 신앙을 원융, 조화시켰던 것이다. 신라에 화엄학이 처음 도입되던 그 무렵, 원효가 무애행(无碍行)으로 대중 속에 파고들어 화엄 사상을 전파했다면, 의상은 일승 아미타불을 내세움으로써 아미타 신앙에 열광하던 대중을 화엄 사찰로 불러들였던 셈이다. 저간의 사정을 『삼국유사』 ‘의상전교’ 조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의상은 이른바 화엄십찰로 불리우는 열 곳의 절에 교(敎)를 전하게 하였으니,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등이 그것이다. 또 『법계도서인』(『화엄일승법계도』)을 저술하고 아울러 간략한 주석을 붙여 일승(一乘)의 요긴한 알맹이를 모두 포괄하였으니, 천년을 두고 볼 귀감이 되어 저마다 다투어 보배로 여겨 지니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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