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장소에서 뜻밖의 아름다움을 마주치는 수가 있다. 예컨대, 어쩌다 다니는 산책길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미인을 마주쳤던, 그래서 가슴이 뛰었고 그리고는 그것만으로 끝이었던 그런 경험.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 마주쳤던 여인의 모습은 잊혀져도 그 장소는 추억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추억은 가끔씩 우리를 그 장소로 이끌기도 한다.
나에게는 갈항사터 쌍탑과의 만남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장소는 서울 시내 한 복판인 경복궁, 민속박물관 입구이다. 갈항사터 쌍탑의 첫인상은 희고 고운 피부를 한 미인이었다. 불탑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갈항사터 쌍탑을 늘 미인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올린다.
아름다움으로 탑을 꼽자고 든다면 갈항사터 탑들보다 앞서는 탑들이 많다. 우선 그 이름이 천하에 뜨르르한 불국사 석가탑이 있고, 그보다는 덜 유명해도 아는 사람들은 아는, 예컨대 경주 나원리의 5층탑 같은 탑도 있다. 그럼에도 갈항사터 탑들이 그에 못지 않게 나를 끄는 이유는 희고 곱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첫인상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첫인상에 이끌려 나는 가끔씩 경복궁을 찾는 편인데 그런 나에게 갈항사터 쌍탑은 추억이 아니고 현실이다. 탑들이 거기 있음에 나는 행복한 것이다.
갈항사터 쌍탑은 원래 경북 금릉군 남면 오봉리, 금오산 서쪽 기슭의 갈항사 옛터에 동서로 서 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것이 일제 때인 1916년 도굴범들에 의해 파손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두 탑이 쇠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세워져 있다. 갈항사 탑은 그 동탑의 상층기단 면석에 새겨진 이두문 조탑명(造塔銘)으로 유명하다.
이 두 탑은 천보 17년 무술(758년)에 세워졌다. 세 남매의 업(業)으로 이루었는데 오래비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며 언니는 조문황태후 군이(君妳)이며 동생은 경신대왕의 이(妳)이다
이 글에서 군이 또는 이에 대한 해석이 불확실하지만 조문황태후는 경신대왕 즉, 제38대 원성왕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탑을 세운 세 남매는 원성왕의 어머니 쪽 친족으로, 이 탑의 건립자들은 국왕과 지근한 왕족이 된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하여 갈항사를 신라 왕실의 원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탑이 신라 왕족의 발원으로 세워졌음을 알고 들여다보면, 갈항사터 쌍탑에서 심상치 않은 흔적들이 눈에 뜨인다. 두 탑의 첫층 탑 몸돌 네 면에 희미하게 무언가가 얕게 부조된 흔적이 남아 있고, 또 탑 몸돌과 지붕돌에 못 구멍들이 있는데 이 구멍은 탑 표면에 별도의 장식물을 부착했던 흔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네 개의 사천왕 또는 보살상 부조 주위를 금동판으로 장식했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두 탑에 호화로운 금동 장식들이 매달려 쩔렁거렸다면 이 탑들은 그 장식만으로도 호사(豪奢)를 극했다는 얘기인데 이쯤 되면, 이 탑에서 희고 고운 피부의 여인을 연상했던 내 빈약한 상상력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갈항사가 애초부터 왕족들의 후원으로 세워져서 지극한 호사를 누린 것 같지는 않다. 삼국유사 의해편 승전촉루조를 보면 갈항사는 승전(勝詮)이라는 승려가 돌로 해골을 만들어 돌 해골에게 화엄경을 강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일연은 가귀(可歸)라는 승려의 말을 인용하여 "승전 법사가 돌 무리들을 데리고 강연과 토론을 하였는데 그 머리 해골 80여 개가 지금까지 절 소임에 전해져 있으니 영험과 이적이 자못 있다"라고 적고 있다.
승전촉루조에는 승전이 중국에 유학하여 의상의 동료이기도 했던 현수 법사 문하에서 공부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고, 인연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여 고국에 돌아와서는 바로 상주 개령군 경계에 절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승전이 중국에서 귀국할 때 현수가 화엄 관련 경전들을 추려 베끼게 하여 의상에게 전하게 했고 의상은 이를 읽고 탐구하여 널리 강연하였다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살피건대, 이 원융(圓融)의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널리 퍼진 것은 바로 승전 법사의 공이다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승전은 당시 화엄학에서 이름을 드날렸던 의상이나 원효에 가려진 숨은 실력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화엄학승의 계보가 화엄초조인 의상과 십대제자들로 시작되는 의상 계파가 주류로 인식되고, 화엄학 저술이 상당했던 원효마저도 방계로 인식되던 당시에 승전이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했음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승전이 금오산 서쪽 기슭에서 돌로 만든 해골들을 졸개 삼아 외롭게 화엄경을 강론했던 사정과 승전의 쓸쓸한 심정을 엿볼 수도 있다.
갈항사의 창건 연대는 승전이 중국에서 귀국한 효소왕 원년(692년)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고 갈항사에 쌍탑이 세워진 것은 그 조탑명에서 보이듯 758년이다. 그러니까 쌍탑은 절이 창건된 지 60여 년만에 세워진 셈이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아마도 승전이 죽은 다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언적법사 세 남매가 갈항사에 탑들을 세운 데에는 그곳에서 외롭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승전을 기려서 그랬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그 탑들이 아직도 남아 갈항사를 기억하게 하는 것도 승전이 끼친 유덕(遺德)이리라고 보는 것이다.
돌 해골도 없어진지 오래고 쌍탑도 서울로 옮겨간 지금, 갈항사 터에는 석불 하나가 전각 속에 안치되어 있을 뿐이다. 갈항사가 자리하고 있던 금오산 서쪽 기슭의 풍경도 많이 변해 버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윽하고 조용했던 골짜기가 지금은 고속철도의 고가 선로가 절 앞 풍경을 길게 가로지르고 있어 시속 300킬로미터의 고속철이 화살처럼 오가고 있다.
나는 이제 그런 갈항사 터를 찾지 않는다. 대신 생각날 때마다, 아직도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미인으로 생각하는 갈항사 탑들을 찾아 경복궁으로 가곤 한다. 국립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사를 가면서 경복궁 뜰의 탑들도 하나씩 옮겨지는 모양이다. 만일 갈항사 쌍탑도 옮겨지게 된다면, 바라건대 쇠울타리로 가로막힌 채 남북으로 놓여 있는 두 탑이 아늑한 곳에 원래의 향(向)을 찾아 동서로 나란히 세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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