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반도 문제에 대한 ‘워싱턴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워싱턴의 한반도 문제 커뮤니티에서 어떤 인식이 퍼지고 있고 어떤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전.현직 관리, 연구원, 대학 교수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논쟁은 미 의회와 행정부안에서 일어나는 논쟁을 반영하고 있고 반대로 정책결정과정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이 ‘워싱턴의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순수히 한국문제에 관해 높은 식견과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은 드문 것 같다. 오히려 핵이나 군축과 같은 기능적인 분야의 전문가들로 있다가 북한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바람에 ‘한반도 전문가’가 돼 버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또 지역 전문가일지라도 중국이나 일본 문제가 주 업종이다 보니 짬짬이 한국문제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정작 한국사회의 역동적인 변화를 꼼꼼히 관찰하고 분석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단적인 예로 연구활동에 걸맞는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다. 한국신문을 자주 들여다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자연히 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에서 온 전문가들로부터 ‘교육’받는 기회를 스스로 즐겨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한국인사들의 ‘워싱턴 퍼포먼스’는 워싱턴의 한반도 컴뮤니티의 인식과 담론에 상당히 중요한 투입요소가 된다. 연설과 세미나 발표가 그 주된 형태인데, 워싱턴 전문가들은 이 채널을 상당히 진지하게 여기고 정보를 얻기 위해 열심히 참석한다. 그런데 지난 수십년간 이 워싱턴 퍼포먼스를 담당해온 한국인사들이 대부분 보수층에 속해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워싱턴 전문가들이 한국 문제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의 역동적인 변화를 참신한 시각으로 설명해주는 한국인사들의 퍼포먼스가 특히 요구된다. 그러나 준비 안된 퍼포먼스는 아니한만 못한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필자가 지켜본 한국 인사들의 워싱턴 퍼포먼스 가운데 가장 실망스러웠던 유형부터 소개하겠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퍼포먼스 자체를 망치는 경우다. 세미나는 사정이 좀 다르겠지만, 연설일 경우 영어에 자신이 없더라도 연설문은 미리 준비한 것을 읽어 내려가면 되고, 질의응답 시간에는 통역을 쓰면 된다. 워싱턴 관객들도 메시지를 들으려 온 것이지 연사의 영어실력을 평가하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 연사들은 같이 참석한 한국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과시욕 때문인지 서투른 영어로 날카로운 질문들을 상대하려는 무모함을 보인다. 심한 경우 어떤 정부 고위인사는 통역을 위해 연단에 같이 선 재미 한인교수를 제쳐두고 짧은 영어실력으로 질의응답시간을 진행시키는 것을 봤다. 당연히 ‘현문우답’이 계속 터져나왔고 질문자들은 엉뚱한 답변만 들었다며 불만스러워 했다.
여러 발표자가 있는 세미나의 경우에는 통역을 붙이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당연히 발표자 개인의 영어실력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제대로 발표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주어진 짧은 시간안에 핵심만을 간단히 전달하지 못하고 준비한 원고에서 눈을 못 뗀채 줄줄 읽어나가는 경우를 많이 봤다. 청중들들과의 교감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 역시 영어에 대한 자신감 부족으로 보인다.
영어 자체 보다도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내용이 부실한 경우도 보았다. 한마디로 세미나를 핑계로 워싱턴에 놀러왔다는 것이 그대로 보이는 발표문들이 그것이다. 분석이라기 보다는 현황묘사만 잔뜩 나열한 뒤 내말을 그냥 믿으라는 식으로 결론을 맺어버린다. 당연히 질의응답 시간도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모처럼 좋은 질문이 나와도 역시 ‘믿으라’는 식의 대답이 나올 뿐이다. 만약 자기 학생이 그랬으면 단단히 야단쳤을 교수들이 워싱턴에 와서 그러고 있는 것이다. 흔히 워싱턴 퍼포먼스에서 영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그보다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우선이다. 워싱턴 관객들은 각국의 독특한 영어 액센트와 발음 그리고 서투른 영어도 참고 들을 줄 아는 여유를 지니고 있다. 내용이 알찬 발표라면 그정도 고통쯤은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부실한 발표에 청중으로 동원됐다가 시간만 낭비하고 왔다면, 금방 불평을 토로하기 마련이다.
영어에는 큰 문제가 없는데 청중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퍼포먼스도 있다. 어떤 연사는 한국정치를 논하면서 2002 월드컵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 바람에 듣는 이들의 빈축을 샀다. 한국에서야 당연히 월드컵 4강진출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대선정국의 구도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흥미로운 주제가 될 수 있었겠지만, 워싱턴에서는 이를 강조할수록 주제자체에 대한 흥미를 높이기 보다는 다소 엉뚱한 주제의 조합이라는 반응을 얻게 된다. 또 어떤 인사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가 낮게 평가되고 있는 것은 보수언론의 영향이라는 주장을 덩그러니 내놓아서 청중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이해관계와 감정을 다 빼고 한반도 상황이라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문제를 다뤘더라면 청중도 발표자가 내놓은 주제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앞 뒤 맥락 없이 마치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듯이 애기를 끌고 간다면, 그만큼 메시지 전달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실수’들을 볼 때마다 퍼포먼스 장소는 미국 워싱턴이지만, 그래서 청중도 당연히 워싱턴 관객들이지만, 실제 염두에 두고 있는 청중은 한국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워싱턴 퍼포먼스들이 모두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탁월한 식견과 통찰력을 인정받아 워싱턴의 한반도 문제 커뮤니티에서 칭찬과 존경을 받는 인사들도 있다. 그러나 청중의 흥미와 집중력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영어실력과 메시지 그리고 참신하고 통찰력 있는 시각을 두루 갖춘 퍼포먼스가 아쉽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