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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뗏목 타고 발해로 떠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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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뗏목 타고 발해로 떠나는 이유는..."

[인터뷰] 방의천 대장 "죽은 친구를 위해, 역사를 위해"

지금으로부터 1천 3백여년 전이었던 서기 698년, 중국 동북지방에 고구려 장군을 자칭하는 대조영에 의해 진국(震國)이라는 나라가 창건됐다. 당시 중원의 패자였던 당(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아 오다가 결국 자신들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7년 뒤인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했다.

그로부터 다시 8년이 지난 뒤 당은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작을 수여했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진국은 발해라는 이름으로 218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1997년 12월 31일, 한국해양대 동문 등으로 구성된 4명의 한국 젊은이들은 발해 건국 1천 3백년을 기념하기 위해 물푸레 나무로 만든 뗏목에 몸을 싣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출발했다. 그들은 <일본서기>에 무려 34차례나 기록돼 있는 대로 발해와 일본 사이의 무역항로를 재현하기 위해 차가운 겨울바다에 몸을 던졌다.

예정대로라면 그들은 이듬해인 1월 24일쯤 일본 니가타현에 도착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타고 있던 뗏목은 1월 23일 일본 도고섬 부근에서 성난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다. 며칠 뒤 장철수 탐사대장을 비롯한 4명의 젊은이들은 차디찬 주검으로 인양돼 한 맺힌 귀향 길에 올랐다.

***친구를 위해, 자랑스런 역사를 위해**

두 번째 발해뗏목탐사에 도전하는 방의천(46세) 탐사대장은 고 장철수 탐사대장의 친한 선배이다. 98년 당시 설악산의 한 산장에서 후배의 죽음을 알게 된 방 대장은 그 뒤부터 발해뗏목탐사가 평생의 숙원이 돼 버렸다고 한다.

"온갖 고생 끝에 일본까지 도착했지만 하늘은 끝내 그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친구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듣던 순간 제 머릿속으로 이런 말이 떠오르더군요. '아, 이제 할 일이 생겼구나'."

사실 방 대장의 꿈은 이에 앞서 지난 2000년 성사되는 듯 싶었다. 지금은 대통령이 된 노무현 당시 해양수산부장관까지 명예추진위원장을 맡아준 덕분에 모금운동도 잘 진행되는 듯 싶었다. 국내 언론들도 그런 그들을 도왔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방 대장은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생계 수단이었던 카페도 팔아 대원들과의 훈련비용으로 충당했던 터라 숙식은 시민단체들의 사무실을 전전하며 해결해야 했다. 결국 그는 자발적인 '반 노숙자'가 됐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푸른 동해바다에 가 있었다.

"올해 들어 마음이 점점 급해지더군요. 특히 요즘처럼 중국의 '동북공정' 음모가 노골화되는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고요? 역사까지 왜곡하는 마당에 만약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민간인들이 이번 탐사를 선점하지 말라는 법 또한 없는 거 아닙니까."

다행스럽게도 방 대장은 요즘 든든한 후원자들을 만났다. 전국언론노동조합과 몇몇 인터넷언론사들, 그리고 사회 저명인사들이 발해뗏목탐사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모금운동을 함께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추진위원회는 오는 20일 서울 태릉에 위치한 이스턴캐슬(국제종합사격장)에서 7일 동안 기금마련을 위한 전시회를 갖는다. 이번 전시회에는 방 대장의 뜻에 공감하는 작가들의 그림 5백점과 도자기 1천 5백점이 전시되며, 수익금은 모두 발해뗏목탐사비용으로 사용된다(문의: 019-377-1915 발해뗏목탐사대).

다음은 방 대장의 발해뗏목탐사를 보다 자세히 소개하기 위해 일문일답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1백편의 관련 논문보다 행동이 중요한 때"**

- '탐사대'는 국내에서 아직 생소한 이름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탐험가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분명 다르다. 하루하루 진보하고 발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민족사적으로 연관된 부분을 찾아 탐사에 나서고 있다. 지난 86년에는 도보로 해안선 9천 8백리를 탐사했고, 또 2000년에는 뜻 있는 이들과 함께 뗏목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탐사하기도 했다. 사실 20여년 동안 주로 우리의 산을 탐사해 왔으나 친구의 죽음 이후 바다로 눈을 돌렸다."

- 최근 중국의 고대사 왜곡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을 텐데.
"학자들은 학문적 견해로만 얘기를 한다. 그래서 아직도 발해는 온전한 우리의 역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답답한 현실이다. 하지만 난 학자도 아니기에 소신대로 행동하려고 한다. '동북공정'은 거꾸로 우리가 해야할 일 아닌가."

- 발해탐사가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면.
"중국은 오래 전부터 역사왜곡을 시작해 왔다. 거기에도 순서는 있었다. 우선 쉬운 것부터 왜곡을 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티벳의 역사가 그런 식으로 바뀌었고, 지난 75년에는 우리가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발해 또한 중국의 지방정부로 전락했다. 이번에 탐사에 나서는 발해 무역항로는 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서기>에도 발해와의 무역항로가 고구려 때부터 열려 있었다는 기술이 있다. 만약 지금 고구려와 발해를 지켜내지 못하면 중국은 '조선'의 역사까지 내놓으라고 할 지도 모른다."

- 추운 겨울에 뗏목탐사에 나서는 이유가 있나.
"일정대로라면 2차 탐사대는 내년 1월 1일 출발해 1월 28일쯤 일본 니가타현에 도착하게 된다. 니가타현에는 지금도 발해 사신들이 머물렀던 유적들이 남아 있다. 지금은 러시아땅이 된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겨울 북서풍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일본에서 다시 발해로 귀향하기 위해서는 6월 남동풍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발해 사신들은 니가타현에서 겨울과 봄을 나고 초여름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이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이다."

- 발해 때도 범선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왜 하필 위험한 뗏목인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범선이 더 위험하다. 겨울 동해바다는 4일에 한번씩 초속 18미터의 폭풍이 몰아친다. 범선은 한번 들어온 물을 가둬두기 때문에 침몰 위험이 높다. 하지만 뗏목은 주위에 장애물만 없다면 뒤집히거나 침몰하지 않는다. 가장 원시적인 배가 가장 안전하다."

- 이 자리를 빌어 프레시안 독자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탐험의 역사는 실패한 사람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성공한 사람 또한 빛이 나질 않는다. 1백편의 논문을 기다리기보다 몸소 행동으로 우리 역사를 지켜야할 때다. 나 또한 이를 실천하려던 먼저 간 친구가 있었기에 이번 탐험에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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