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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만한 가슴을 앞세운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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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풍만한 가슴을 앞세운 페미니즘

김명훈의 '영화, 영어, 그리고 미국' <22> ‘Erin Brockovich’

포크록 그룹 이글스(Eagles)의 ‘Lyin’ Eyes’(거짓의 눈빛ㆍ1979년 발표)라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City girls just seem to find out early
How to open doors with just a smile
A rich old man and she won’t have to worry
She’ll dress up all in lace and go in style

도시의 여자들은 그냥 일찍 알아채는 것 같아
미소 하나만으로 문이 열리게 하는 방법을
돈 많은 노인네 하나 잡으면 걱정할 것 없지
레이스로 잘 차려 입고 멋지게 [시집] 갈 테지

미모를 갖춘 여자는 그 미모를 담보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얘기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사실 첫사랑을 저버리고 돈 많은 늙은이와 결혼을 한 여자가 옛 남자를 못 잊어 쓸쓸한 나날을 보내는 모습을 그린 애달픈 발라드이다. 이어지는 다음의 가사처럼, 미모로 무엇이든 얻어지는 것 같지만 그렇게 얻은 것은 항상 공허하고 적막함을 얘기한다.

Late at night the big old house gets lonely
I guess every form of refuge has its price

늦은 밤이면 오래된 저택은 쓸쓸해 지지
어떤 형태든 보호 받는다는 것은 대가가 있는 거겠지

비교적 단순한 가사지만 이를 들으면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자신이 남성의 ‘성적 대상(sex object)’임을 스스로 의식하면서 이것을 신분상승 내지는 ‘인생역전’에 이용하는 여성은 대부분 근본적으로 참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여성의 성(性)이 상품처럼 거래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바, 필자가 이에 대해 새삼스레 경악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정한 남녀평등을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기치 중 하나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게 하는 매개체인 성의 표현과 그 도구화를 결연히 거부하는 것이라면, ‘Lyin’ Eyes’에서 이글스가 노래하는 여자는 모름지기 여성해방론의 견지에서 지탄의 대상일 것이다. 실제로 현대 페미니즘은 이러한 ‘여성 노예화’에 대한 거센 저항으로 일관해 왔다. 어떻게 보면, 여성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공격의 대상이었다. 1968년, 아틀랜틱 시티에서 개최된 미스 아메리카 대회에 대한 시위를 벌이던 여성해방주의자들은 행사장 바깥의 나무판자길(boardwalk) 위에 ‘해방의 쓰레기통(Freedom Trash Can)’을 설치해 놓고 그 안에 하이힐, 브래지어, 거들 등 소위 ‘노예화’의 모든 상징물을 내던지고 이에 대한 화형식까지 치렀다. (그래서 극단적 페미니스트를 일컬어 ‘bra burner’라고 하기도 한다.) 여성의 성(性)을 돋보이게 하는 모든 것은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ㆍ2000)’를 보면 이러한 ‘브래지어를 태우는’ 페미니즘은 이제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든다. 줄리아 로버츠에게 2001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이 영화는 페미니즘을 직설적으로 표방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이 성(性)을 무기로 휘두를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준다.

실제인물의 성공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이 영화는 페미니즘의 기본적 ‘태도’는 충실하게 유지한다. 주인공 에린 브로코비치는 입이 거칠고, 공격적이며, 수줍어하거나 어려워하지 않으며, 불이익 앞에서 절대로 가만 있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그녀는 페미니즘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전형적인 미국형 여성이다. 실화지만 그녀의 스토리도 전형적이다. 영화는 사회로부터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성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엄청난 성공을 이루는 스토리의 틀을 갖고 있다. 페미니즘이 이만한 스토리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터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수자나 그랜트는 헐리우드에서 한몫 하는 페미니스트 작가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페미니즘의 화신 에린 브로코비치(줄리아 로버츠)의 모습은 ‘정통파’ 페미니스트들이 본다면 진저리 칠 법한 모습이다. 스틸레토 힐을 신고, 쫄티에 핫팬티를 입고, 쫄티 안으로 살짝 보이는 화려한 색상의 브래지어를 걸친 팔등신의 에린 브로코비치. 그녀는 30여 년 전 아틀랜틱 시티에서 페미니스트 시위자들이 내던지고 불 태웠던 ‘여성 노예화’의 바로 그 상징물들을 자랑스럽게 걸치고 다니는 것이다. 그뿐인가. 그녀는 처녀 때 지방 미인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까지 있다.

이 화려한 미인은 그 사이 두 번 이혼하고 아이 셋을 키우는 통에 제대로 된 직장을 가져보지 못해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길 돈이 없고, 식당에서 아이들 저녁을 사주면서 자신의 음식은 시킬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한 처지에 빠져 있다. 그녀가 이렇다 할 직장을 구하는 데 거듭 실패하는 것은 경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경력이 부족한 것은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홀몸으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여성의 딜레마다.

당연히 영화는 시작부터 에린이 봉착해 있는 이런 난관을 사회의 탓으로 돌린다. 시나리오는 우선 그녀가 아이 셋을 두 전 남편의 아무 도움 없이 키우고 있는 상황을, 단 한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두 전 남편의 잘못으로 알고 있으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첫 장면에서 간결하게 보여주는 인터뷰는 그토록 적극적이고 똑똑한 에린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비정한 사회를 욕하도록 유도한다. 개인병원에 면접을 보러 가는 여자가 초미니스커트에 가슴이 패인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는, 다시 말해 상식적 규범을 무시한다는 것이 결격사유가 될 소지도 충분히 있건만, 영화는 이 같은 질문을 비굴하게 만든다.

줄거리상으로만 보면, ‘에린 브로코비치’는 경험 없는 법률사무소의 여성 보조원이 거대 전기회사를 굴복시키는 ‘다윗과 골리앗’의 얘기지만, 자신의 미모를 너무도 잘 활용할 줄 아는 그녀는 처음부터 약자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녀는 때와 임자를 만나지 못했던 것일 뿐 항상 외모에 자신감을 갖고 살았으며, 필요에 따라 자신의 만만찮은 외모를 이용해 왔음을 은연중에 드러내 보인다. “미소 하나만으로 문이 열리게 하는 방법”을 일찍이 터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 [변호사 에드 매스리(앨버트 피니 분)가 다른 여직원들이 에린의 의상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Erin : Is that so? Well, it just so happens, I think I look nice. And as long as I have one ass instead of two, like most of the “girls” you have working here, I’m gonna wear what I like if that’s alright with you?
(그런가요? 글쎄, 공교롭게도, 난 내가 멋져 보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기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소위 여자들처럼 내 엉덩이가 두개가 아니고 하나인 이상, 난 내 가 좋은 대로 옷을 입겠어요, 괜찮으시다면 말이죠?)
추가설명 : “one ass instead of two” - 에린이 자신의 엉덩이를 겹이 질 정도로 살이 찐 다른 여자들과 비교한 것이다.

2. [에린의 미모에 첫눈에 반한 옆집 남자 조지(애론 에크하트 분)가 아이들을 기꺼이 봐 주겠다고 진지하게 얘기하자]

Erin : This isn’t gonna get you laid, you know.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나랑 잘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알죠.)
추가설명: 속어인 ‘lay’라는 말은 ‘섹스’를 뜻하는데, 동사로는 ‘get laid’의 형태로 쓰인다. 수동태로 쓰이는 이유는 ‘섹스를 운 좋게 얻다’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섹스를 말할 때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3. [자료관리가 엉망진창인 수도국 자료실에서 필요한 자료를 무슨 수로 눈치 보이지 않고 찾아 내겠냐는 에드의 질문에]

Erin : They’re called boobs, Ed.
(에드, 그걸 젖가슴이라고 한답니다.)

1번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몸매에 대한 에린의 자신감이고, 2번이 말해주는 것은 섹스를 담보로 한 남자와의 거래에 익숙한 그녀의 몸짓이다. 그리고 3번에서 에린은 웬만한 남자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으로 녹여버릴 수 있음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수도국에서 당직을 맡고 있는 남자직원은 에린의 미모에 홀려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말미에서, 에린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 한 변호사에게 다음과 같이 쏘아 붙인다.

4. [주민 634명의 서명을 도대체 어떻게 다 받았냐는 질문에]

Erin : I just went on up there and performed sexual favors. 634 blowjobs in five days. Boy, am I ever tired.
(그냥 거기에 가서 몸로비를 좀 했죠. 5일 동안 오럴섹스 634명. 야, 피곤하기도 해라.)

이 말에는 도구화된 성(性)의 위력에 대한 에린의 체험적 이해와, 최소한 이번에만은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해방감과 희열이 동시에 담겨 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일진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그러나 섹스의 가능성을 당근처럼 지니고 다니는 한 여성의 온갖 자태를 보여주고 나서, 이 여성이 이룩한 일은 그녀의 육체미와는 전혀 무관함을 믿어달라고 한다.

과연 에린 브로코비치의 초인적 성공 스토리는 그녀의 성(性)을 배제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아마도 개개인이 갖고 있는 페미니즘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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