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주말 오후, A씨는 거실에 누워 TV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줄 프로그램 사냥에 나섰다. 지상파 방송은 이 시간 때면 온통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독무대가 되기 때문에 그는 케이블 채널까지 넘다들다 마침내 한 곳에 채널을 고정했다. 속칭 '잘 나가는' 연예인들이 대거 출연해 '까불대는' 모습을 보던 A씨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로 흘러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A씨는 아내의 "수준 낮게 그걸 보며 웃고 있냐"는 질책 섞인 말 한마디에 웃음을 지우고 겸연쩍은 듯 급히 채널을 돌렸다. A씨는 왠지 자신이 잠시 무언가에 홀려 바보가 됐던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봤다.
***"오락은 즐거움, '유치하다'는 기존 담론부터 바꿔야"**
A씨와 같은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 꾸준히 TV를 '바보상자'로 반복학습 받아온 입장에서 '가벼움'의 대명사인 연예·오락프로그램은 때로는 즐거움의 대상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이 되고 있는 게 요즘 TV의 현실이다.
이처럼 '미운털'이 박힌 연예·오락프로그램에 요즘 들어 '새 옷'을 입혀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총대'는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연, 공동대표 김영호·이명순)가 멨다.
언개연은 지난 29일 오후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TV 연예·오락프로그램에 대한 시각교정'을 주제로 언론학자, 방송 현업인, 시청자단체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한번쯤은 비평단체와 현업자들이 속내를 터놓고 얘기해 보는 것이 서로간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게 주최측의 의도였다.
우선, 발제를 맡은 박근서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오락은 역사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반대편에 서서 권력을 교란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다소 생소한 주장을 펼쳤다.
박 교수는 "오락은 즐거움이자 재미이며, 즐거움은 곧 수용자인 시청자들의 욕망과 맥이 닿아 있다"며 "누구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재미라는 것이 기존 질서에서 일탈했을 때 느끼게 된다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TV도 이와 마찬가지로 애초 출발 선상에서는 교양과 보도 기능 등이 중요시되는 등 줄곧 기존 권력의 통제 아래 놓여왔다"며 "그러나 변화된 사회환경 속에서 TV도 탈규범과 탈규칙을 갈망하는 수용자들의 요구에 의해 오락의 기능이 추가되기 시작했다"고 부연했다.
박 교수는 또, "하지만 TV 오락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은 '동일한 존재의 다른 얼굴', 다시 말해 TV 오락의 제작자가 곧 통제자가 되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시청자가 스스로를 유치하다고 느끼게 되는 이중성을 갖게 되는 등 교묘한 담론의 교란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이제는 TV 오락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담론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TV 프로그램에 '서열' 안될 말, 오락은 오락다워야"**
박 교수의 이같은 주장은 TV 프로그램 전문 비평가도 동의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문화비평가인 김종휘 하자작업학교 교사는 "TV 연예·오락 프로그램은 흔히 '저질'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면 오락의 질을 높고 낮음으로 과연 구분할 수 있는가"라며 "이는 사회통념적으로 재미와 웃음은 무익한 것으로, 정보와 교양은 유익한 것으로 봐온 고정관념의 왜곡 현상"이라고 규정했다.
김 교사는 "현재의 TV 오락은 어찌됐든 사회구조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대중에 의해 선택되고 변형돼 온 형태"라며 "따라서 이를 무시하고 비판을 가하게 되면 제작진은 정작 고쳐야할 점이 있어도 아파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 교사는 또 "TV 오락을 비평하기 위해서는 개별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다원화돼 있는지, 또는 시청자의 참여가 민주적으로 보장돼 있는지에 시선이 맞춰져 있어야 한다"며 "이제 각 방송사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제작진들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즐거움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명확히 밝힐 때가 됐다"고 제안했다.
***"방송사 예능PD는 '사농공상' 가운데 '상' 직업"**
연예·오락 프로그램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자는 학계와 비평가의 제안에 제작주체인 각 방송사 예능PD들은 크게 환영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박정규 MBC 예능국 PD는 "프로그램 개편철이 다가오면 예능PD들은 '반공익적'이라는 멍에를 쓰고 항상 비율 축소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며 "솔직히 '저질'이라는 평가를 받아도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공익이 아니겠느냐"고 따져 물었다.
오강선 KBS 예능국 부장은 "TV 연예·오락 프로그램은 각 방송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효자상품이지만 현실에서의 대접은 조선시대 '사농공상' 개념으로 보면 '상'에 해당할 정도로 낮게 취급되고 있다"며 "먼저 대중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보는 방송사 안팎의 시각부터 시급히 교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경수 KBS 교양국 PD는 "TV 연예·오락 프로그램에 있어 늘 제기되는 빈곤한 상상력, 다양하지 못한 즐거움, 지나친 스타 의존, 떨어지는 완성도, 과도한 편성비율, 지나친 선정주의 등은 단순히 예능PD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청자와 사회 기득권을 가진 통제자 사이에 끼어버린 구조와 연관돼 있는 문제"라며 "현실의 우리들에게 TV 연예·오락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가 이뤄지면 거기에 걸맞은 인정과 평가, 그리고 아낌없는 지원이 부여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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