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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따라 움직이는 미국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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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따라 움직이는 미국의 대통령

김명훈의 '영화, 영어, 그리고 미국' <21> 헐리우드 대통령(1) &#8211; ‘Dave’

지난 6월 5일 이승을 떠난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의 대통령이 그의 ‘사람들’이 짜놓은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는 인식을 일반인의 의식 속에 강하게 심어준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백악관의 우민정책이나 시니컬한 정치쇼가 그때 갑자기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리고 레이건이 아무 생각 없는 아둔한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았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확고했던 신념과 만만치 않았던 정치적 기지(奇智)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로널드 레이건의 모습을 언론을 통해 현지에서 꾸준히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가 대통령을 지낸 8년 동안 백악관 비서실이 그의 이미지와 메시지를 철저하고 치밀하게 관리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배우 출신이었다는 것도 이러한 인식을 보편화 시키는 데 한몫 했고, 따라서 미국의 대통령의 (표면적) 임무수행은 그의 임기 때부터 헐리우드식 ‘프로덕션’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레이건 이후 대통령과 백악관의 ‘무대 뒤’를 보여주는 영화들이 여러 편 나온 것도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작품성을 떠나, 이 중에는 음모론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Murder at 1600’(1997), ‘Absolute Power’(1997), ‘Wag the Dog’(1998) 등의 영화도 있고, ‘Air Force One’(1997) 같은 사건 중심의 일회용 액션 영화도 있으며, ‘The American President’(1995), ‘Bullworth’(1998), ‘The Contender’(2000), ‘Dave’(1993) 등 백악관 인물들의 캐릭터 묘사와 막후의 권모술수를 비교적 충실하게 다룬 영화들도 있다.

후자 그룹에 속하는 영화들의 줄거리 사이사이를 보면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사전에 짜여진 각본에 따라 국민에게 보여지고, 모든 정책과 메시지가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상품처럼 ‘출시’되는 백악관의 ‘공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의미에서 ‘헐리우드 대통령’이었던 레이건은 이제 죽었으나, 모든 것이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헐리우드 백악관’의 시대는 이제 막 전성기에 접어들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고스트버스터’(1984)로 유명해진 아이번 라이트먼 감독의 코미디 ‘Dave’는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백악관의 헐리우드식 ‘프로덕션’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영화다. 이 영화의 백악관은 주인공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연일 쇼를 벌이는 하나의 공연집단이다. 영화는 대통령과 똑같이 생긴 평범한 사람이 대통령 대역을 맡았다가 결국 진짜 대통령보다 훨씬 나은 대통령이 된다는 동화 같은 설정의 코미디이지만, 개리 로스의 잘 짜여진 각본은 그냥 코미디로 흘려버리기에는 아까운 예리한 풍자적 요소들을 갖고 있다. 영화는 평범하고 친근감이 가는 데이브 코빅(케빈 클라인 분)을 내세워 스토리를 헐리우드식 해피 엔딩으로 끌고 가면서도, 위선과 음모가 횡행하는 백악관과 워싱턴의 탁한 세계에 대한 풍자를 시도한다. 영화는 그 와중에 상ㆍ하원 의원과 방송ㆍ신문기자 등 무려 30명이나 되는 실제인물을 카메오로 등장시켜 픽션과 현실 사이의 선을 더욱 헷갈리게 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현실의 백악관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든다.

미국에서 정치용어로 자주 쓰이는 ‘handler’라는 말이 있다. 원래 개나 말 따위의 조련사를 뜻하는 말인데, 정치세계에서는 어떤 후보자나 권력자를 배후에서 관리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Dave’의 첫 장면에서 윌리엄 미첼 대통령(케빈 클라인)과 영부인 엘렌 미첼(시고니 위버)이 백악관에 돌아온 후 곧바로 대통령의 뒤에 따라붙는 백악관 비서실장 밥 알렉산더(프랭크 란젤라)와 공보수석 앨런 리드(케빈 던)는 대통령의 ‘handler’들이다. 그들은 대통령의 모든 공식적 언행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실세’들이다. 이중 알렉산더는 미첼 대통령이 혼수상태에 빠진 김에 부통령을 제거하고 자신이 부통령이 되어, 결국 대권을 잡기 위한 각본을 꾸민다. 직업소개소를 경영하던 데이브 코빅을 대통령 대역으로 앉혀놓고 알렉산더가 내뱉는 말들을 듣다 보면 그 표독함보다는 그 개연성에 새삼 놀라게 된다. (밥 알렉산더의 캐릭터는 레이건 때의 실세였다고 하는 도널드 리건 비서실장을 연상케 한다.)

[미첼 대통령이 바람을 피우던 중 뇌졸중을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에, 공보수석 앨런이 부통령에게 연락해야 한다고 하자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며]

- 이건 내 꺼야, 앨 – 다 내 꺼…. 내가 그를 만들었어. 어느 잡놈이 단지 자기가 부통령이라 해서 여기에 들어와서 그걸 나한테서 뺏어가는 건 어림없네!
(This is mine, Al – all mine…. I made him. And no cocksucker is gonna come in here and take it away from me just because he happens to be Vic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대통령 역할에 사명감을 느끼기 시작한 데이브가 계획에 없었던 기자회견을 갖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통령 집무실에 박차고 들어가서 데이브에게 해대는 말]

- 기자회견은 네가 소집하는 게 아니야. 기자회견은 내가 소집하는 거야!
(You don’t call a press conference. I call a press conference!)

[각료회의에서 데이브가 직접 나서서 예산을 재편하고 난 후]

밥: 그 놈을 죽여버릴 걸세.
(I’m going to kill him.)

앨런: 대통령은 죽일 수 없어.
(You can’t kill a President.)

밥: 걔는 대통령이 아니야! 걘 보통사람이야! 난 보통사람은 죽여도 돼…. 난 보통사람을 백 명은 죽여도 되네.
(He’s not the President! He’s an ordinary person. I can kill an ordinary person…. I can kill a HUNDRED ordinary people.)

(곁가지: 앨런과 밥 두 사람의 대화 중에 밥이 “I just hope this yutz can pull it off” – 그저 이 멍청이가 이 일[대통령 대역]을 제대로 해낼 수 있었으면 좋겠네 – 라는 말을 하는데, ‘yutz’는 유대인들끼리만 쓰는 이디시 말로 ‘바보’ 또는 ‘천치’를 뜻하는 말이다. 시나리오 작가 개리 로스는 유대인이며, 그가 ‘handler’로 등장시키는 앨런(Alan Reed)과 밥(Bob Alexander)은 둘 다 유대인 성(姓)을 갖고 있다. 이것은 헐리우드와 워싱턴에서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 또 그들이 스스로 갖고 있다고 자신하는 – 대리권력의 단면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 속의 백악관 비서실장이 하는 이런 말들이 권력의 밀실에서 실제로 오가지 않는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밥 알렉산더의 이 같은 대사는 ‘Dave’의 전반적으로 구수한 코미디에 톡 쏘는 맛을 첨가해준다. 근본이 선한 보통사람 데이브 코빅이 그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대통령의 임무를 인간적으로, 그러면서도 훌륭하게 수행해내는 모습이 특별히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알렉산더와 같은 악인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끝에 가서 보기 좋게 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부도덕한 진짜 대통령도 결국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사망하고, ‘좋은 사람’이라 표현되었던 부통령(Gary Nanceㆍ벤 킹슬리 분)이 새 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물론 여기에 헐리우드의 함정이 있다. 권선징악과 해피 엔딩은 대부분이 허상이지만, 헐리우드는 이것을 선호한다. 착하고 평범한 사람이 권좌에 오르게 되는 클리셰(cliché)를 바탕으로 한 ‘Dave’는 그 설정상 모든 것이 꿈처럼 해결될 수밖에 없다. 악인들은 모두 벌을 받고, 처음엔 제법 예리해 보였던 정치와 권력에 대한 풍자는 보통사람과 대통령 영부인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점잖게 양보를 하고 만다. 요술처럼 모든 것이 깔끔히 마무리되고, 마지막 장면에 두 남녀의 입술이 만나는 것을 흐뭇해 하며 일어서는 이들의 마음은 잠시나마 따스하고 뿌듯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비록 가짜 대통령이었지만, 그를 통해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가능해 보이지 않았는가....

레이건의 사망 후 한 주일 동안 내내 들어야 했던 그에 대한 칭송의 문구 중에 “그는 미국이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라는 얘기가 수도 없이 반복됐다.

“He made America feel good about itself.”

그렇다. 레이거노믹스야 어쨌든, 이란콘트라 스캔들이야 어쨌든, 현실과는 상관없이 국민이 뿌듯함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 그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국민이 너무도 헐리우드식 ‘프로덕션’에 길들여져 있고, 영화에서처럼 선이 악을 물리친다는 프랭크 카프라 식의 순진한 믿음과 소망이 있기에 이런 평가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믿음과 소망의 정체를 알고 싶다면 카프라 감독의 1939년 작 ‘Mr. Smith Goes to Washington’을 보시라.) 막후에서 어떤 음흉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미국인은 무대 위에 올라 서 있는 사람이 그저 듣기 좋은 얘기를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설사 가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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