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어렵다’는 말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하루하루 가정의 식단을 책임지고 있는 전업 주부들 사이에선 ‘시장바구니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투덜거림이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새 거덜 날 지경에 이르렀다는 원성으로 바뀌고 있다.
이들 주부들은 최소한 생필품만이라도, 농수산물만이라도 가격 안정이 이뤄지길 소망하고 있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공산품은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농수산물 가격만큼은 지금보다 현저히 떨어져주길 원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 소비층의 이런 볼멘소리를 듣는 농심(農心)에는 피눈물이 그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밑바닥까지 꺼져버린 농촌에 도시민들의 이러한 요구는 아예 농삿일을 포기하라는 압박으로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언론에 ‘농업’은 없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6.7%로, 프랑스(222%) 영국(125%) 스웨덴(103%) 이탈리아(80%) 등 유럽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쳐지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세계 2차대전을 겪으면서 식량안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고, 이에 따라 민족의 장래와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항구적인 대비책의 하나로 식량자급률을 높여나가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 정부는 정 반대로 ‘개방농업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농림부는 개방농정의 하나로 이미 전국의 186만ha의 농지 가운데 80만ha에 대해서는 ‘전용’을 허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특히 논 면적 114만ha 가운데 30%를 줄이겠다는 입장이어서 일부에서는 앞으로 수 년 안에 쌀 자급시대가 막을 내릴 것으로 관측하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한국의 농정이 이렇듯 개방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 데에는 이른바 ‘경쟁력’이라는 명목이 내세워지고 있다. 박철현 농민신문 논설실장은 “한국의 기업들은 다국적 기업들과 손잡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방농정을 부추기고 있지만 정부 주무부처인 농림부는 농촌의 피폐된 삶은 뒤로 하고 기껏 농수산물 가격을 떨어뜨리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다”며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정부정책의 잘못된 부분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언론의 직무유기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김영호(전 세계일보 편집국장)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지난 10년 전에 비해 신문 지면량은 3~5배 정도 늘어났고, 방송 또한 공익성과 공영성이 크게 신장된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농업 관련기사는 비할 바 없이 축소됐고, 심지어 이제는 개방농정에 편승해 농업을 공격하는 양상까지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라고 비판했다.
김 대표는 이러한 언론의 변화에 대해 “이는 언론환경이 그만큼 치열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언론 또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이상 ‘돈 안되는’ 농촌 실정을 살피기보다 이익 극대화를 위해 기업의 편에 서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또 “무엇보다도 한국 농업을 살리는 길은 농촌이 처한 현실을 언론이 공론화하는 것”이라며 “이는 언론이 다루지 않으면 국민의 관심도 멀어지고, 더불어 정치인이나 관료조직 또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개방 대세론’에 부추기는 언론보도**
그나마 신문·방송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농업 관련보도가 오히려 농촌 피폐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모니터 보고서도 잇따르고 있다.
윤석원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1일 언론개혁시민연대, 농민신문 등이 주최한 농업관련 토론회에서 주요 신문사의 5개월치 쌀 관련 보도를 모니터한 결과 “쌀 농업, 농촌, 농민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문제의식이 미약하거나 피상적이었고, 더군다나 개방만능주의,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사고의 틀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윤 교수는 “올해 1월 1일부터 5월 25일까지 경향 동아 문화 조선 중앙 한겨레신문 등 6개 주요 신문의 쌀 관련 보도총수는 모두 1백93건으로, 한달 평균 38건, 1개사당 6~7건에 불과했다”며 “올해가 ‘쌀의 해’이고, 또 쌀 재협상과 도하 아젠다 개발(DDA)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언론이 쌀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비판했다.
윤 교수는 또 “특히 한겨레신문을 제외한 문화(5건) 동아(4건) 조선(3건) 중앙(4건)은 쌀 시장 개방을 기정사실화하는 경향이 강했다”며 “동아 조선 중앙은 쌀 산업과 농업문제의 본질에 대한 이해도가 극히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고 덧붙였다.
윤 교수는 앞으로의 보도방향과 관련해 “WTO 체제 아래에서 시장개방은 대세일 수 있으나 필연은 아니며, 그것이 모든 산업분야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쌀 산업의 중요성과 다원적 기능에 대한 보도 확대 △쌀 농업 위기 문제의 본질과 정확한 현실 인식에 대한 심층보도 △세계 식량 사정과 위기 기능성에 대한 객관적 사실 보도 △선진국의 농업 지원 정책 소개 △농민들의 삶과 고민, 애로에 대한 심층보도 등을 제안했다.
방송보도 또한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박웅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은 지난 2003년 1월 1일부터 현재까지 지상파 방송3사의 저녁 메인뉴스에 보도된 농업개방 관련 보도를 분석한 결과 “농업 관련보도는 전체 보도의 0.2%에 불과했으며, 보도된 내용도 대체적으로 피상적이거나 연관성 없는 파편적인 정보의 나열에 그쳤다”고 평가했다.
박 연구원은 “지난해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한 이경해씨 사건의 경우 방송보도는 이씨가 사망에 이르게 된 구조적인 원인과 농민시위의 핵심적인 주장을 심도 깊게 탐색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의 비극, 감정적인 대응이라는 잣대를 통해 사건을 단순화시키려는 의도를 곳곳에서 드러내기도 했다”며 “이처럼 심층보도가 되지 않는 것은 기자의 전문성 부족과도 일정정도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탁명구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사무총장은 “한-칠레 FTA 비준과 관련해 농민들은 지난해 120여일 동안 이른바 ‘아스팔트농사’를 지었지만 언론은 국익을 이유로 농민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심지어 생산자인 농민과 소비자인 도시민을 이간질하기도 했다”며 “이쯤 되고 보니 농민들 사이에선 차라리 언론이 무관심해 주길 바라는 심정까지 들고 있다”고 성토했다.
탁 총장은 또 “사회적 갈등 해소는 언론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임무가 아니겠느냐”며 “그러나 우리 언론은 갈등 해소가 아니라 갈등 증폭에 매몰돼 있어 약자입장에 서 있는 농민들을 더욱 절망에 빠뜨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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