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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은 고대 이래 아시아를 멸시해 왔습니다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14> 일본인의 조선관-허동현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멸시는 제국주의나 오리엔탈리즘의 학습 결과일까요?**

박노자 교수님, 반갑습니다.

일본인의 조선인식을 논한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박 교수님께서는 일본이 "근대의 글로벌 스탠더드", 즉 자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받아들여 서구의 "스승들" 보다 더 충실히 지키려 한 "과잉 충성"을 보였으며, 그 결과 조선과 동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과 "언어적 폭력" 내지 정신적 폭력인 멸시가 행해졌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Meiji Restoration"이란 영어 표현이 웅변하듯, 메이지유신은 서구 근대 세계체제로의 편입만이 아니라 일본 고대로의 복귀도 함께 꿈꾼 것이었습니다. 메이지유신의 주도 세력은 왕정복고(王政復古)와 제정일치(祭政一致)를 내걸고 고대의 천황제(天皇制)를 부활시키고 신도(神道)를 국교로 정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서구 근대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나는 혼욕, 문신, 복수와 같은 전통요소들을 사라지게 했지만, 부처의 화신인 "아라히토가미(현인신, 現人神) 천황(天皇)"이 다스리는 "신국(神國)"을 다시 불러내었던 것입니다.

서구인들이 기독교의 여호와나 하나님 같은 서구문명 전체를 일관하는 보편종교의 신을 의지해 그들이 선민임을 상상한 것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호토케(佛陀, 부처)가 사람의 모습으로 현생에 나타난 현인신 천황이 다스리는 신성한 국가라는 특수 관념에 의탁해 그들의 우월성과 아시아 침략논리를 찾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메이지시대 이래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멸시가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에서 수입된 "마차" 때문만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멸시가 자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 이식ㆍ감염되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그런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본역사와 사회라는 특수한 경계에서 우러나온 특수한 사례일 수 있다면, 메이지 이래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멸시는 전근대 일본에 내재한 침략적 속성과 우월의식에서 발현된 측면이 큼을 지적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멸시가 근대 서구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학습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메이지 이래 근ㆍ현대 일본의 대외 침략 행위와 아시아 멸시 언설―지금도 끊임없이 지속되는 소위 "망언"과 같은―에 대해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인들이 져야 할 역사적 책임을 덜어주는 것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렇게 볼 때 1930년대 이후 일본에서 제기되는 황인종주의 내지 "미영귀축(米英鬼畜)"관과 같은 반서양ㆍ반영미 의식과 서구 멸시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전근대 일본에 내재한 침략적 속성과 우월의식이 발현**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에도시대(1603~1867) 전반에 걸쳐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교린(交隣)"이란 선린관계를 이어나갔으며, 이 때의 한국관은 메이지 이후 근ㆍ현대 일본의 한국관과는 대조적으로 우호적이고 존경의 념(念)이 넘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1719년 통신사의 수행원 신유한(申維翰, 1681~ ? )이 그의 일본기행 『해유록(海遊錄)』에서 일본사람들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저작을 널리 읽고 있으며 퇴계의 후손이나 생전의 기호(嗜好)까지도 질문을 받고 또한 일본인들이 조선의 유학자들의 이름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을 경탄하고 있는 것은 당시 일본의 조선 유학과 학자에 대한 존경이 얼마나 컸는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한국의 유교문화와 퇴계와 같은 유학자에 대한 존중은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 하야시 라젠(林羅山, 1583~1657), 야마사키 안사이(山埼闇齊, 1618~1682), 사토 오나가타(佐藤直方, 1650~1719), 타니 신잔(谷秦山, 1663~1718),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1809~1869), 토구토미 소호(德富蘇峯, 1863~1957) 등으로 이어지며 메이지 초기까지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에 대한 존중에 반하는 우월감도 에도시대 전시기에 걸쳐 이미 폭넓게 퍼져있었던 언설입니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는 도쿠가와 막부의 통신사 우대정책―통신사절이 교토에서 에도로 가는 길을 쇼군의 가솔만이 이용할 수 있는 비와(琵琶)호수 동쪽 연안을 타고 올라가는 고쇼(御所)가도를 이용하게 하는―을 트집 잡아 "막부가 이렇게 대접하는 것, 칙사보다도 후대한다면 어찌 우리나라의 체면 중시를 논할 것인가"라고 하면서 통신사절에 대한 예우의 격하를 주장한 바 있었습니다.

나카이 지쿠잔(中井竹山, 1730~1804)도 『초모위언(草茅危言)』이란 책에서 통신사의 행차의 위풍을 가리켜 "순시(巡視)의 깃발, 청도(淸道)의 깃발, 영(令)의 깃발을 세우는 것은 너무나도 무례하다. …공공연하게 우리를 욕되게 함은 너무나도 가증스럽다. …그런 불손을 못 본 척한다면야 더 이상 없는 국치(國恥)이리라"고 반발했으며, 통신사절에 대한 환대에 대해서도 "관중(館中, 숙박처)에 들어가 시문을 증답(贈答)하는 것을 관에서 금하지 않을 뿐더러 부화(浮華)의 무리들이 잡다하게 모인 것이 저자거리같고, 형편없는 문장과 시문을 갖고 한객(韓客)에게 들러붙으니 그 한심한 꼴은 한결같이 덜 떨어진 무리들의 모습이라. 100일도 더 전부터 7율(律) 1수(首)의 시를 꺼내들고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으로 기면서 한편의 화답 시를 얻으면 종신(終身)의 영광이라며 사람들에게 뽐내는 따위는 가소롭기만 하다"고 조선측의 유교적 소양 뽐내기에 대해 반감을 내뱉었습니다.

조선과 중국의 유교문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원초적 형태의 반감의 이면에는 일본 고유의 정신이나 문화를 내세우는 우월의식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 국학자(國學者) 중의 한 사람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일본정신"을 이렇게 정의했지요.

"일본 고래의 정신 즉 야마토고코로는 순수한 것이며, 자연이며, 속박되는 일이 없는 자유의 마음이다. 따라서 유교가 설교하는 도덕규범은 야마토고코로와는 대립되는 것이다. … 원래 "정(情)"이라는 것은 순수하며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것을 규칙으로 묶거나 종교로 승화시키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이처럼 이국(異國)의 가치를 척도로 한 기만과 허위는 인간의 본성에도 어긋난다. …그래서 인간의 소박한 정감을 노래한 일본 고가(古歌)의 전통 속에야말로 사물의 현상이 가장 명백히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박한 형태의 일본 우월론은 막부 말기가 되면서 일본 고대의 신화와 전설에 토대를 둔, "신주(神州)" 즉 신국(神國) 일본을 우월하게 여기며 아시아를 내려다보며 침략을 정당화하는 "팔굉일우(八紘一宇)론"이나 "정한론(征韓論)" 같은, 아시아 침략론으로 진화합니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이었던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 1769~1850)의 『우내혼동비책(宇內混同秘策)』 속에 들어 있는 다음 이야기는 국학자들의 일본 우월주의가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 낸 또 하나의 기축사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세계 만국 중에서 황국(皇國)이 공략하기 쉬운 토지는 중국의 만주보다 쉬운 것은 없다. …먼저 달단(韃靼, 몽고)을 취해 얻으면 조선도 중국도 차례로 도모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송강부(松江府), 여섯 번째로 추부(萩府), 이 두부는 다수의 군선에 화기와 차통(車筒)을 싣고 동해로 가 함경ㆍ강원ㆍ경상 3도의 여러 주를 공략할 것. 일곱 번째로 박다부(博多府)의 병력은 많은 군선을 내어 조선국 남해에 이르러 충청도의 여러 주를 칠 것. 조선은 이미 우리 송강과 추부의 강병에게 공격받아 동방 일대가 노략질에 시달림을 받는 이상 남방 여러 고을은 어쩌면 허술한 곳이 될 것임. 곧바로 진격하여 이를 치고 대총(大銃)과 화전(火箭)의 묘법(妙法)을 다한다면 모든 성은 바람을 바라보고 허물어질 것이다."

그만이 아니라 사무라이 출신의 국학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남긴 『유수기(幽囚記)』에도 한국이 본래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우월의식과 침략의식이 짙게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주아이 덴노(仲哀天皇, 전설상의 천황으로 그 비인 神功황후가 죽은 남편의 신탁으로 신라를 쳐서 정복했다는 황국사관의 시원적 존재) 9년, 천황 붕어하다. 황후 스스로 신라를 정복하시다. 신라 항복…고려ㆍ백제 역시 신을 칭하고 조공을 바치다…옛날 우리의 융성하고 강력했던 이유를 알지어다. 나라를 잘 보존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 존재를 잃지 아니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자람을 불리는 데 있다. 지금 서둘러 무비(武備)를 갖추고 함정을 준비하고 대포를 늘려야 한다…류큐(琉球)를 지도하여 국내의 제후로 만들고 조선을 책망하여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게 하여 옛날의 성시(盛時)와 같이 해야 한다. 북쪽으로는 만주 땅을 자르고 남쪽으론 대만과 루손(필리핀)의 제도를 거두어 진취의 기세를 보일지어다."

이처럼 막말의 국학자들은 일본이 서구에 개항하기 이전―즉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세례를 받기 이전―부터, 고대에 일본의 신이나 천황이 한국을 지배했을 때 한국의 왕이나 귀족들이 일복에 복속했다는 망상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을 멸시하고 침략의 대상으로 보는 "초대형 마차"의 설계도를 이미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설계도는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의 "정한론(征韓論, 1873),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탈아론(脫亞論, 1885)", 타루이 토오키치(橫井藤吉, 1850~1922)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 l893)", 기타 잇키(北一輝, 1883~1937)의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 1923)" 등 일본 우월주의나 침략주의의 밑그림이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1890년대 우익 낭인들의 아시아 침략논리인 대아시아주의,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1930년대 군국주의 시대 국가주의 사상의 모토였던 고쿠타이(國體)와 고쿠수이(國粹) 등은 "서구의 스승들"이 가르쳐준 오리엔탈리즘보다 국학자 요시다 쇼인 같은 내부 스승들의 교시―일본이 동양문화의 전수자이며 결정체라는 국수주의적 발상―를 충실히 따른 것이 아닐는지요? 그렇다면 근ㆍ현대 일본의 아시아 멸시와 침략은 오리엔탈리즘과 자본주의의 이식의 결과가 아니라 전근대 일본에 내재한 우월의식과 침략적 속성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개화파만이 자국 우월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노자 교수님의 지적처럼 개화기 우리 지식인들의 세계관이 일본의 우월주의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의 "재복제"에 지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조선의 얼과 정신을 강조한 우리의 민족주의 사관은 일본 국학자들이 말한 "야마토고코로"라는 일본 정신을 중시하는 "황국사관"을 복제한 것이고, 서재필의 멸시적 아시아 인식은 구미 오리엔탈리즘 따라하기인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대 아시아의 지식인들 중 동일한 심판의 잣대로 재어보았을 이 같은 비난과 질책을 면할 사람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지 않을까요? 저는 이들 개화파나 민족주의 사가들의 한계가 그들만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보지 않기에 역사법정에 오른 이들의 과오가 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변호해 볼까 합니다.

박노자 교수님께서는 중국 근대 지식인들이 우리 선비들과 동등하게 사귀었고, 일본의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도 진심으로 우리의 독립을 도우려 했다고 보셨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한 세기 전 중국과 일본 사람들의 한국 인식을 살펴보면 마음속 깊이 우리를 사랑하고 도우려 했던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듯합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이 우리 나라에 대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은, 자국에 대한 측면공격의 우려, 즉 "후고(後顧)"가 없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한 세기 전 일본이 조선을 넘보자 중국인들은 자국의 안위를 염려해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점령한다면, 동삼성(東三省: 봉천ㆍ길림ㆍ흑룡강)의 근본 중지(重地)가 울타리를 잃게 되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염려가 있어 후환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1875년 운양호사건에 대한 중국 최고 실력자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의 논평입니다. 그 후 1879년 들어 일본이 류큐(오키나와) 왕국을 병합하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중국인들은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욱 크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조선이 멸망하면 우리의 왼팔이 끊기고 울타리가 모두 없어지게 되어 후환은 더 말할 것이 없다."

1880년 주일 공사 하여장(何如璋, 1838~1891)의 말입니다.

중국이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청일전쟁(1894)으로 한반도에서 축출되기까지, 중국인들 중에 우리의 발전을 가로막은 패권주의에 반대하거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을 보태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러했으니 동시대 일본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 없겠지요.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 반제 전선에 조선인들의 힘을 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중국인들도 한국을 진정으로 도우려 했다기보다는 일본과의 싸움에 우리의 선열들을 이용한 면이 큽니다. 국민당은 의열(義烈)투쟁 등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일본이 항복하기 전까지 우리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한 바 없으며, 공산당도 조선의용군을 자신들의 팔로군 휘하에 두어 써먹었을 뿐 중국 내에서 한국인의 독자적 투쟁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저명한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 궈모뤄(郭沫若, 1892~1978)가 지은 항일소설 『목양애화(牧羊哀話)』(1919)는 당시 중국인들의 본심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양반 민숭화(閔崇華)와 민패이(閔佩荑)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우리 민족에 대한 동정을 표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중화를 숭상한다"는 뜻인 "숭화"와 "(일제에 항거하는) 오랑캐에 탄복했다"는 의미인 "패이"에 알 수 있듯이, 20세기 들어서도 중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여전히 중국 중심의 우월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식민지시대 일본의 우파들은 기껏해야 자치론을 내비칠 뿐, 한국인의 독립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천황제와 군국주의를 비판한 일본 최고의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2~1996)까지도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재일동포 문제 등에 대해 침묵할 정도였지요.

물론 박노자 교수님 말씀대로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극소수의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반제투쟁에서 한국인들과 연대를 모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말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방침에 따라 일본 내에서 한국인들의 독자 단체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인의 반제 투쟁은 일본인의 그것을 대신하는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선사연구회"를 만들어 황국사관 비판에 앞장섰던 하타다 타카시(旗田巍, 1908~1994)의 고백은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모멸적 인식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잘 보여줍니다.

"일본의 공산주의운동ㆍ노동운동의 강령 속에 한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 명문화되어 있기는 했으나, 일본인이 해야 하는 운동에 한국인을 동원하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많은 희생이 예상되는 곤란한 투쟁의 경우 한국인에게 선봉을 맡기는 일이 많았다."

한 세기 전 우리는 오리엔탈리즘과 중화주의를 표방한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자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약자였습니다. 심지어 일제 침략에 맞서 계급적 연대를 도모하던 중국이나 일본의 사회주의자ㆍ무정부주의자들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우리 선열들을 동원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멸시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요즘은 예전에 우리를 짓밟은 사람들이 다시는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지 못하도록 와신상담(臥薪嘗膽)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어둠이 내리는 연구실 창을 바라보며...

허동현 드림

***더 읽을 만한 책**

강창일.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 역사비평, 2002.
고병익 등. 『일본의 현대화와 한일관계』. 문학과 지성사, 1992.
김석근 역. 마루야마 마사오 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한길사, 1997.
강진철, 「정체성 이론 비판」, 『한국사 시민 강좌』1. 1987.
권석봉. 『청말대조선정책사연구』. 일조각, 1986.
박영재 등. 『(한길역사강좌 9)오늘의 일본을 해부한다』. 한길사, 1987.
박재우. 「중국현대 한인취재소설의 발전추세 및 반영된 한인의 문화적 처경(1917-1949)」. 『동아문화』34, 1996.
송병기. 『근대한중일관계사연구』. 단대출판부, 1985.
장인성 역. W. G. 비즐리 저. 『일본 근현대 정치사』. 을유문화사, 1999.
하타다 다카시 저, 이기동 역, 『일본인의 한국관』. 일조각, 1983.
西川長夫ㆍ松宮秀治 編. 『幕末ㆍ明治期の國民國家形成と文化變容』. 東京: 新曜社, 1995.
H. D. Harootunian. 『Toward Restoration: The Groth od political Consciousness in Tokugawa Japa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0.

***<이번 글로 19세기 우리의 대외 인식과 열강의 한국관을 살펴보는 순서를 마칩니다. 필자들 사정에 따라 다음 연재는 9월에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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