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한 파전 냄새, 은박 접시에 만두와 부침개를 얹어 여기저기서 나누어 먹고 있는 사람들...
'무슨 행사라도 하나보지' 칼바람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이고 무심히 종종걸음 치던 정명숙(56)씨를 기어이 잡아 세운 것은 앞치마 두른 '남정네'들의 제법 야문 손놀림. 영등포 역 입구에서 '나잇살이나 먹은 양반'이 솜씨 좋게 부침개를 부쳐내고 '웬 젊은 양반'들이 벌겋게 얼은 손으로 만두를 잘 빚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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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게 뭐하는 거여?"
아까부터 유심히 보고 있던 남편 이진섭(59)씨가 오히려 한마디 한다.
"아, 명절 때 남자들도 일하자고 부치미 지지고 저러는 거 아녀~"
***민주노동당, "부패정치로 '으악', 음식준비로 '으악'"**
민주노동당은 20일 귀성객들로 붐비는 서울 영등포 롯데백화점 앞에서 여성들의 '명절후유증' 없는, 온 가족이 즐거운 '평등명절'을 호소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날 천영세 총선 선대위원장, 노회찬 선대본부장 등 당 지도부와 서울지역의 남성 출마자들은 양복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직접 만든 부침개와 만두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남녀 구분 없는 음식준비'와 '시댁·친정 가리지 말고 방문하기',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놀이하기', '소외된 사람들과 음식 나누어 먹기' 등을 권해 지나가던 행인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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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됐는데도 낡은 명절문화가 강요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이런 행사를 마련했어요. 호응도 좋습니다. 부침개 드시던 한 아주머니께서 남자들이 이런 것 좀 잘해서 여성들이 마음 놓고 사회에 진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나이 드신 여성분들도 속에 눌러놓은 불만과 욕구들이 대단한 거죠."
노회찬 선대본부장은 캠페인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정치하는 사람들, 설 때마다 세배 받는 그런 식상한 이벤트만 하지 말고 생활 속의 실천에 신경 좀 썼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에 집안일은 좀 잘하십니까?"라는 의구심어린 질문에 그는 "오늘 아침밥도 제가 했는걸요. 이 손가락도 김치 썰다가 다친 겁니다"라며 베인 자국이 있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도 했다.
동작 갑 지구당에 출마하는 김학규씨는 "여태껏 사회 민주화만 외쳤지 집안 민주화는 생각도, 실천도 못한 자신이 부끄럽다"며 "이번 명절은 남성들만 편하고 여성들은 스트레스 받는 양성불평등한 명절이 안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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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정치가 분하고 '여성홀로' 음식준비가 지겨운 사람들**
충남 예산으로 고향 길을 떠난다는 이기홍(59)씨는 한참 동안이나 행사장을 떠나지 못하고 기어이 부침개에 '정치개혁'소망을 담았다.
"이런 시기에 저런 것(캠페인)을 하는 것은 부침개 부쳐 먹으면서 부정부패도 다 쓰러뜨려 지져 먹자는 것 아뇨?"
얼마 전부터 민주노동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이씨는 "지난 대선 때는 XX당을 지지했지만 요즘 하는 것 보니 영 글렀다"며 "민주노동당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쓸만한가'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명절 때 음식준비 같이 하실 거에요?"라고 묻자 "해야죠"라고 답해,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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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러니 참 보기 좋네"**
독산에 사는 김미숙(60)씨도 행사장을 뜨지 못했다.
"저러니 참 보기 좋네, 보기 좋아. 그래도 요즘 젊은 애들은 조금 다른 것도 같아요. 음식준비까지는 같이 안해도 설거지라도 하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 같애."
대학생인 윤새롬(20)씨는 "(이 캠페인이) 굉장히 새로운 느낌이네요. 멀리 있는 사람들(정치인)이 가까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 그런데 캠페인 취지는 좋지만 집에서 여성들만 일하는 명절문화는 워낙 굳어진 터라 막상 집 안에서 바꾸자고 하기가 참 어려워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각 정당은 역대 어느 선거때보다 '여권 신장'을 앞세워 여성표 잡기에 부심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민주노동당 남성 당원들이 이날 영등포 역전에서 보인 '솔선수범'은 진정한 여권 신장을 위해선 정치적 구호에 앞서 '생활속 실천'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의미있는 행사라는 평가를 받을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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