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만의 국민투표 문제를 둘러싸고 미중관계가 급격히 더 가까워지고 대만이 외톨이 신세가 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북핵문제에도 이런 ‘새로운’ 미중관계가 반영되지 않겠냐는 시각마저 일부에서는 제기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대만문제로부터 실타래를 풀어 북핵문제로까지 연결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은 일 같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12월 9일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하나의 중국’ 정책을 재확인하고, 미국은 중국에 의해서건 또는 대만에 의해서건 양안관계의 현상유지에 변화를 가할 어떠한 일방적 결정에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대만의 지도자’가 보여준 언행은 그가 현상유지를 변화시킬 결정을 일방적으로 내릴 뜻이 있을지 모른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데, 미국은 이에 반대한다” 라고 말했다. 사실 이 발언은 닉슨 대통령 이래로 미국 대통령들이 견지해온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으며 양안관계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고수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현상유지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사용한 표현만큼은 미국의 양안정책에 변화가 생긴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격’했었다. 부시는 천수이볜 대만 총통을 중국식으로 ‘대만의 지도자’라고 호칭했고, 대만의 움직임을 공개적으로 ‘반대’한다고 밝혔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부시 대통령은 자신이 대만 독립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해주었다는 원 총리의 발언을 옆에서 그대로 눈감아 줌으로써 대만측에 대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사실 부시 대통령은 원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천수이볜 대만 총통에게 비밀서한을 보내 국민투표 실시에 대한 명확한 ‘반대’의사를 전달한 바 있다. 부시는 이 서한에서 비록 천 총통이 추진하고 있는 국민투표가 대만을 겨냥한 중국의 미사일 증강 배치에 대해 찬반을 묻는 ‘방어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를 기화로 대만내에서 대만독립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있음을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안관계의 현상유지를 건드리는 것이라면 그것이 대만의 민주주의적 정치과정일지라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워싱턴에서는 이 일련의 사건을 두고 상당한 논란이 일었었다. 국무부쪽에서는 백악관이 국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대 (oppose)'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양안문제에 대해 미국이 견지해온 ‘전략적 모호성’을 해치고 말았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지지하지 않는다’와 ‘반대한다’는 상당히 다른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양안관계에 관한 한 전략적 모호성을 표방함으로써 중국이나 대만 어느 한쪽에 의해 ‘이용’당하는 것을 차단해 왔는데, 대통령이 이런 중요한 정책기조를 흔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한편 ‘무슨 일이 있어도 대만을 방어해 줄 것’(이 역시 전략적 모호성을 해치는 발언이었다)이라는 부시의 취임 초기 발언을 지지하는 네오콘과 국방부쪽에서도 야단이 났었다. 특히 대표적인 네오콘 멤버인 위클리 스탠더드 (Weekly Standard)의 윌리엄 크리스톨 편집장은 백악관 안전보장회의 아시아 담당인 제임스 모리어티가 대통령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다며 그를 맹비난하면서, 이는 부시의 정책이 아니라 ‘모리어티의 정책’이라고까지 폄하했다.
일부에서는 이를 단순명료하게 상황을 바라보려는 부시의 개인 성향과 테러와의 전쟁에 지나치게 골몰해 있는 그의 입장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부시의 노골적인 친대만정책이 스스로 빚어낸 산물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만을 방어해주겠다’는 부시의 발언을 믿고 천 총통이 자칫 양안관계의 현상유지를 깰 수도 있는 국민투표를 밀어붙이고자 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사실 미국은 지난해 11월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 총통이 파나마 방문길에 미국을 경유하도록 허락했었고, 파나마에서는 콜린 파월 미 국무부장관이 천 총통과 회동해 두 나라간 단교 이후 최고위급 접촉이 이뤄졌었다. 여기에 더해 미 국방부에서는 대만 방위력 증강 지원 계획을 계속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천 총통이 부시 대통령을 자신의 ‘수호천사’로 여길 만도 하다는 얘기마저 나왔었다. 이 모든 것들이 천 총통으로 하여금 미국의 지지를 과신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국민투표라는 정치적 모험을 감행하도록 부추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악관은 이에 적잖이 당황했다는 설명이다.
이런 분석들을 종합해 볼 때 결국 최근의 사태는 미국과 대만간의 열렬한 사랑이 빚어낸 의도하지 않았던 ‘사고’였다는 게 더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들린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윌리엄 크리스톨의 비판도 부시의 이런 정책적 실수를 모리어티 개인에게 책임 전가하려는 의도가 깃든 것 아니었냐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이같은 점들을 고려해 본다면 부시 행정부의 양안정책이 친중국 성향으로 변했다고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또 미국이 대만의 국민투표 문제에 관해 중국의 손을 들어줬으니, 그 다음은 중국이 북핵문제에 관해 미국 편에 서 주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냐는 시각도 미중 협력관계의 맥락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상당수 중국전문가들은 미중간에 북핵 협력관계가 굴러가고 있는 것은 양안관계의 현상유지에 대해 양국간 양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대만의 국민투표 문제는 이 틀을 깨고 싶어하지 않는 미중 양국에게는 위협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백악관에서는 외국의 정당한 민주주의 절차를 반대한다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양안관계가 불안해져 북핵문제에 관한 중국과의 공조가 무너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시-원 공동기자회견은 이 틀을 더욱 공고히 하는 사건이었다는 게 더 정확한 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이 이 틀을 얼마나 미국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 줄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사실 미국내에서는 중국이 이 틀을 십분 활용,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만 관심이 있고, 정작 북한의 핵폐기에 대해서는 미국만큼 적극적이지 않은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북한의 핵폐기와 관련된 우선순위 문제와 정책수단에 있어서 미국과 중국이 어느 수준까지 협력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 미중관계가 어디까지 진전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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