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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개인주의를 만났을 때

김명훈의 영화, 영어, 그리고 미국 <6>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2000년 미국 인구통계국 자료를 보면 미국 가정의 25.5%가 '1인 가정(household occupied by one person)'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4가정 중 하나가 '나 홀로 가정'이다. 혼자 살고 있는 인구가 무려 2천7백만 명, 남한 땅 전체인구의 절반이 넘는 인간들이 집에 들어가도 (또 안 들어가도)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50%에 가까운 수준을 유지해 온 높은 이혼율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남의 간섭을 받기 싫어하고, 자기중심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사회 풍조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1인 가정'을 이루어 산다는 것은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배우자도 없이, 즉 나 이외에는 단 한명의 식구도 없이,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지만 또 가족처럼 진정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많은 미국인들이 선택하는 삶의 모드이다.

80년대 말 개봉된 후 단숨에 미국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부활시킨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는 이러한 '1인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빌리 크리스탈(해리)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멕 라이언(샐리)의 깜찍함(지금은 지겨운)이 너무도 잘 어우러진 덕분에 말초적 재미가 쏠쏠한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차근차근 뜯어보면 그 배경에 깔려 있는 분위기는 쓸쓸하기 짝이 없다. 인물설정과 대사 군데군데에서 제목의 '만남'보다는 '헤어짐', '우리'보다는 '나'의 개념이 그 사회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하위 텍스트임을 알 수 있다.

해리와 샐리가 10년 뒤 세 번째로 만나 마침내 친구가 되기 직전의 장면을 보자. 남자친구와 갓 헤어졌다고 말하는 샐리에게 동료 싱글인 마리(캐리 피셔 분)는 곧바로 명함철을 꺼내 샐리가 새로 사귈 만한 '후보'들을 꼽기 시작한다. 샐리가 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듣고 "그 사람 결혼했잖아" 라고 하자 마리는 "흠…결혼했다고…" 하며 주소카드의 귀퉁이를 접어 명함철에 다시 꽂는다. 그 남자가 결혼했다고 해 봤자 머지않아 그도 부인과 헤어질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장면이긴 하지만, 부부가 식은 죽 먹듯 헤어지는 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미국사회의 일상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행동이다.

짝을 찾는다는 것이 가정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영화의 모순은 그 어디에서도 '가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 중반에서 샐리는 해리와 만나 자기가 남자친구 조(Joe)와 헤어진 이유가 자신은 가정(family)을 갖고 싶은데 조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털어 놓는다. (잠깐 하찮은 영화지식 하나: 이 영화에서 조로 출연한 Steven Ford는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의 막내아들이다.) 그러나 샐리가 5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져야 했을 정도로 그녀에게 중요했던 '가정'은 이 영화에서 다시는 언급되지 않는다. 재미나는 영화의 '주제'를 흐릴 뿐 아니라, 영화의 주인공들이 대표하는 화려한 독신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개인주의적 특성은 결코 진기한 것들이 아니다. 영화의 초반부터 샐리가 보여주는 자기중심적 행동들은 미국에서 살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다이너(간이식당)에서 해리와 식사를 한 후 각자의 팁까지 따로 계산하여 자기 몫이 정확히 6달러 90센트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고급식당도 아닌 데서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애플파이(참고로 apple pie a la mode라고 함)를 주문하면서 "애플파이는 데워서, 그리고 아이스크림은 위에 얹지 말고 옆에 놓아두고, 딸기 아이스크림이 없으면 그냥 아이스크림 없이 생크림만…대신 진짜 생크림이 아니고 깡통에서 나온 생크림이면 아무것도 없이 달라…"고 하는 것도 별로 생소한 장면이 아니다. 자기중심적이다 못해 반사회적인 이러한 행동에서 미국 사회가 엄숙하게 받들고 있는 개인주의 문화의 편린을 볼 수 있다.

미국처럼 전통이나 규범의 구속력이 미약한 사회에서 개인주의의 힘은 거역할 수 없는 인생의 코드 같은 것일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면 그것은 법이나 마찬가지다. 개인주의는 미국 문화의 성역이다.

철저한 개인주의 앞에서 오래가는 사랑을 꿈꾸는 것조차 우스운 일일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라이너 감독이 중간 중간에 결혼한 지 수십 년이 된 노인 커플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인터뷰 형식으로 자신들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게 하는 것은 일종의 페인트 모션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는 '나'가 중심이 된, 나만의 만족을 위한 '짝 찾기'의 이야기일 뿐, 두 주인공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정말 늙을 때까지 서로 희생하며 여생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그러한 러브 스토리는 될 수가 없다. 라이너 감독 자신도 이 영화의 DVD판 해설을 통해 "끝에서 해리와 샐리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을 난 가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관객이 원하는 종결이라고 생각되어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사랑과 우정의 줄다리기 끝에 결국 우정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리가 연말 파티 장으로 달려가 샐리에게 너와 평생을 함께 지내고 싶다고 고백한 후, 서로 껴안고 입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는 주인공들의 머리 위에는 오색 색종이가 날리고, 흥건하게 취한 남녀들의 송구영신 노래가 울려 퍼진다.

"HAPPY NEW YEAR!"

마치 무지개처럼 새해가 드리워지고, 모든 것이 새롭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해리와 샐리는 행복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개인주의를 먹고 자란 자신들의 본성과 이혼율 50%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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