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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더불어 사는 희망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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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더불어 사는 희망을 배운다"

['더불어숲학교' 겨울방학 특강 이야기]

마지막 잎새마저 자취를 감춰버린 도심의 가로수에는 전기에 의지한, 그래서 지극히 인공적인 불빛이 행인의 눈을 어지럽힌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작은 전구들이 '더불어' 빛을 발하되, 단지 반짝이고 있는 것 뿐, 거리의 네온사인과 본질의 차이가 없음이 가볍다. 사람이 만든 화려한 불빛은 연말 분위기를 자아내는 하나의 부속물로, 순간의 눈요기로, 시간 속에 잊혀진다. 산속의 겨울나무에게서는 도심의 화려한 반짝임을 찾을 수 없다. 한 때 입고 있던 나뭇잎마저 발밑에 흐트러뜨려 오가는 길에 양탄자를 깔았다. 그러나 산속의 나무에는 하얀 잔설을 덮어쓰고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을 반기는 고즈넉함이 있다.

한반도에 한파가 몰아친 20일, 더불어 자리잡음으로 '숲'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질 줄 아는 이 자연에서 함께하는 지혜와 삶의 여유를 얻어가고자 하는 도시사람 열여섯 명이 강원도 내린천으로 모였다. 더불어숲학교 (교장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강원도 인제의 내린천 미산계곡에 자리한 개인산방(開仁山房)에서 겨울방학 특강을 연 것이다.

*** 학교 가는 길, 낯설음 몰아내기 **

통학버스에 몸을 싣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음에도 인공을 벗어나 자연에 가는 것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세 시간 여를 꼬불거리며 멀미를 일으키게 하는 지방도로는 도시사람들로 하여금 차분함을 갖추라 요구하는 듯 했다.

이윽고 도착한 미산계곡. 도로에서 가지런한 비포장길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널 때, 예전부터 이 곳을 알고 자주 찾았다는 더불어숲학교 운영위원 이승혁씨 얼굴에는 언뜻 아쉬움이 스쳤다. "예전에 이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개인산방을 가려고 도르레를 탔었는데" 과연, 하천가 한켠에는 도로대신 이용하던 도르레와 높이 다른 장대들이 서 있었다. '얌전한 다리 대신 도르레를 탔다면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마음의 벽을 보다 쉽게 낮출 수 있었을 텐데' 3시간여 버스를 동승한 급우들이건만 낯설음이 채 벗겨지지 않아 서걱거리는 등굣길에 애꿎은 다리 탓을 해 본다.

수업 횟수가 더함에 더불어숲학교에도 나름의 시간표가 자리 잡았다. 저녁을 먹기 전에는 빽빽이 들어선 나무에서 돌배가 흐드러지게 열려 '돌배나무길'이라 불리는 산길을 따라 개인산방 뒷산을 올랐다. "숲이 되는, 숲을 배우는 가장 좋은 길은 숲이 만들어준 길을 따라 숲을 직접 겪는 것" 선생님의 설명에 따라 만만치 않은 산행에서 더불어 숨쉬고, 손 내밀고, 기다려주며 도시에 두고 오지 못했던 자존심, 낯가림, 어색함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산을 오르며 올려다 본 하늘은 푸르다 못해 시렸다. 크레파스에 있는 하늘색은 내린천의 하늘에서 따온 말인 듯 했다.

*** 수업, 다른 삶을 배우기 **

더불어숲학교 겨울방학 특강은 '김수남의 사진이야기-아시아인들의 사랑&결혼&축제'. 굿에 취해 하던 기자일도 버려두고 전업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선 김수남 선생님은 아시아의 굿으로 눈을 돌려 20여년을 아시아 오지에서 보냈다. 세인들의 관심 밖에 있는 아시아 소수민족의 신(神)이 그의 작업 주제다.

그러나 김 선생님이 더불어숲학교 학생들에게 보여주겠노라 개인산방에 내려놓은 필름들은 자신의 주제에서는 한 발 비껴난 것이었다. '아시아의 신'이 아니라 '아시아의 사람'을 담은 사진들이었다. 길지 않은 인생이 물처럼 흘러갈까 마디를 지워 기념하는 아시아인들의 순간을 보며 컷에 녹아있는 삶을 살피는 시간을 가졌다.

발리섬의 성인식, 마따따하. 발리 사람들은 송곳니가 인간 마음속 수성(獸性)의 상징이라 여겨 성인식을 송곳니를 끌로 갈아내는 의식으로 갈음한다. 어엿한 공동체 구성원이 된 아이에게서 욕정, 탐욕, 노여움, 질투 등을 없애 공동체 생활을 잘 유지해 나가라는 뜻이라고 한다. 미개한 의식이라 폄훼하고 싶지 않았다. 소소한 이해 때문에 남을 밀쳐내고 공동체 규율을 흩뜨렸던 순간들을 기억해 내며 살며시 혀를 내어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느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미낭까바우 족의 결혼식. 결혼식에 남자가 없다. '아버지'라는 단어도 없다. 결혼식에 관여하는 유일한 남자는 외삼촌. 모권사회인 미낭까바우족의 남자들은 결혼을 해도 낮에는 자신의 본가에서 자기 마을을 위해 일하고 밤에만 부인 집에 와서 잠을 잔다. 관습법에 따라 여자가 문중과 가족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고 세습 재산도 어머니를 통해 딸에게 상속된다. 그러나 모권사회에도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 있다. 남자가 벌어들인 재산을 둘러싸고 누이의 자식에게 상속하는지, 자신의 자식에게 상속하는지를 두고 분쟁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결국 권력이 누구 손에 있느냐에 상관없이 권력은 분쟁의 중심이다.

또 다른 모권사회, 베트남의 라데족. 라데족의 결혼식에는 신랑, 신부의 가족들이 모여 신랑의 몸값을 의논하고 결정한다. 여자쪽에서 '밧응모'라 불리는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을 때에는 외상으로 남자를 사고 살아가며 갚기도 한다. 그런데 결혼생활을 하다가 부인이 죽어도 남자는 '팔려온 몸'이기 때문에 다른 여자와 재혼을 할 수 없다. 남자는 처제와 다시 결혼한다. 이때 남자쪽에서는 처음 결혼할 때 받았던 '밧응모'의 절반 정도를 다시 받는다. 만약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면 자신이 결혼할 때 받았던 '밧응모'의 두 배를 배상해야 다른 집안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 남자를 '재산'으로 생각하는 라데족의 풍습은 여자를 노예쯤으로 생각했던 옛 부권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역시 권력은 그 자체가 문제다.

*** 토론, 다른 나무 알아가기 **

더불어숲학교이기에 가르치고 배우는 일까지도 일방적이지 않다. 강의가 끝나고 이어진 뒤풀이에서 치열하지만 여유있는, 날카롭지만 서로를 베지 않는 토론의 장이 이어졌다. 자타가 공인하는 '굿 전문 작가'를 모신 자리니만큼 화두는 '신'이었다. 아시아 곳곳의 사람들이 믿는 신 얘기를 듣고, 자신의 신과 자기가 아는 신 얘기를 나눴다.

숲에 오기 이전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지고 살아온 나무이기에 토론에서도 쟁점마다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워 보였다. 아니, 나무들은 설익은 합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농익은 자기 생각을 뽑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들었다. 배려와 존중이 전제된 난상토론을 통해 나무들은 각자의 합(合)에 다다랐을 것이다.

*** 생활, 어우리는 법 배우기 **

더불어숲학교에서 배움을 얻는 곳은 강의뿐만이 아니다.

신영복 교장선생님이 무소유소라 이름 지었다는 재래식 화장실. 통나무로 지어진 운치 있는 모습에 화장실인지 모르고 민박을 청하는 사람이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농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무소유소(無所有所)라는 이름은 소유한 것을 내려놓는 장소라는 의미도 되지만 화장실에서 사람이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생각해 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이승혁 운영위원의 설명처럼 무소유소에서 소유와 무소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노라면 바람결에 은은한 풍경 소리까지. 과연 범상찮은 화장실이다.

밤길에 무소유소를 오가며 올려다 본 별빛 역시 숲과는 다른 말을 전해준다. 인공적인 불빛이라고는 개인산방의 희미한 불빛이 전부였던 덕분에 그 어느 곳에서보다 많은 별들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초저녁부터 '쏟아지는' 별들 때문에 그나마 알고 있던 북두칠성 윤곽을 잡는 것 조차 힘들었다. 별빛에 서려 있는 조물주의 신비한 힘을 느낀 나무들은 칼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목이 뻐근하도록 하늘을 올려다봤다.

*** 하굣길, 숲을 닮아가는 나무들 **

다음날 요가로 연 아침은 또 다른 아침이었다. 하룻밤이라는 짧은 시간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한 솥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은 나무들 사이에 더 이상의 낯설음은 없었다. 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머물던 곳을 정리한 후, 한 장의 사진을 남기고 도심으로 돌아왔다.

각자 다른 모습의 나무였던 까닭에 1박 2일의 짧은 시간동안 각자 느끼는 몫은 달랐을 테다. 하지만 더불어숲학교의 나무들은 각자 다른 모습의 나무가 모여 '숲'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며 짐을 꾸렸다. 서로 편을 나누어 아귀다툼을 벌이는, 자기 목소리를 내야 집중하는 도시에서 '숲'이라는 어울림의 이름을, 어울림의 희망을 배우고 돌아가는 나무들은 더 이상 외로운 나무 하나가 아니었다. 열여섯 그루의 나무는 어느덧 숲을 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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