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하나님의 병사', 미군은 '하나님의 군대', 대테러전쟁을 '기독교문명 대 사탄과의 대결'로 굳게 믿는 미군 장성이 미 국방부의 대테러 담당 주요 직책에 발탁된 것으로 뒤늦게 밝혀져 물의를 빚고 있다.
미국의 군사전문가 윌리엄 아킨은 최근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지난 6월 국방부 정보담당 부차관에 임명된 윌리엄 제리 보이킨 중장은 미국의 대테러전쟁은 기독교 대 비기독교문명간의 대결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고 있는 인물로 미국과 이슬람권의 관계가 최악인 현 상황에서 이런 인물을 대테러전쟁의 고위 요직에 앉힌 것은 '경악한 말한 실책'이라고 비판했다.
보이킨 중장이 맡은 정보담당 부차관은 지난 6월 신설된 직책으로 아랍권 반미세력의 수괴라고 할 수 있는 오사마 빈 라덴, 사담 후세인, 물라 오마르 등을 색출ㆍ제거하는 것이 핵심 임무이다. 이들이 지하에 암약하면서 반미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을 우려한 럼즈펠드 장관이 지난 6월 국방부 내에 새 부서를 신설, 보이킨을 책임자에 임명한 것이다. 보이킨 중장의 임무는 중앙정보국(CIA), 국방정보국(DIA) 등 미국의 각 정보기관에 산재해 있는 국제테러 관련 정보들을 취합해 이들의 소재를 파악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킨은 지난 16일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약 한달동안 보이킨의 발언들을 추적한 결과, 보이킨은 아랍권의 테러를 다루는 데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지나치게 기독교우월주의적인 발언들을 공공연히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난 6월 국방부 정보담당 부차관에 임명된 다음날 보이킨은 오렌곤주의 한 교회에서 군복차림으로 설교대에 돌라 오사마 빈 라덴, 사담 후세인, 북한의 김정일 등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이들이 왜 우리를 미워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근원과 뿌리가 유대ㆍ기독교문명인 반면 적들은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적인 그들은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맞설 때에만 패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어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가 지금 치르고 있는 전쟁은 영적인 전쟁임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사탄은 우리나라를 파괴하려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군대를 파괴하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조지 부시가 대통령이 된 것은 유권자 다수가 그에게 투표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대통령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은 군대의 상관으로부터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요인 암살, 외국정부 전복 등 특수전 수행을 임무로 하는 미 육군의 극비부대 델타포스의 최초 요원 중 한 사람으로(13년간 델타포스 요원으로 활약) 사병으로 출발, 장성에까지 오른 보이킨은 1980년의 실패한 이란인질구출작전을 비롯, 그레나다ㆍ파나마 침공, 영화 '블랙호크다운'으로 유명한 소말리아 작전 등 지난 30년간 미국의 거의 모든 비밀군사작전에 참여한 특수전 전문가이다.
그는 지난 해 6월 오클라호마주의 한 교회에서 미군 18명의 목숨을 앗아간 소말리아 작전에 대해 언급하면서 1장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블랙호크다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를 찍은 사진이었다. 보이킨은 사진을 현상해보니 윗쪽에 이상한 검은 점이 나타났다면서 이는 소말리아인들이 사탄임을 증거하는 신의 계시라고 주장했다.
미군 내 영상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한 결과 이 검은 점은 사진 상의 단순한 얼룩이 아니라 진짜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사 숙녀 여러분, 이것이 우리들의 적입니다. 어둠의 세력이 거하는 곳입니다. 이 도시에 악마가 거하고 있음을, 그들이 우리의 적임을 알려주는 신의 계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시 미군이 추적하고 있던 소말리아 저항세력의 한 간부가 "알라가 나를 보호해 주고 있다"고 말한 데 대해 "여러분, 우리의 신이 그들의 신보다 위대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진짜 신이시지만 그들의 신은 우상에 불과합니다"라고도 말했다.
1주일에 5일을 교회에 나가 기도한다는 보이킨은 기독교 원리주의 성향인 복음주의파의 열렬한 기독교도이다. 문제는 그의 열렬한 신앙심이 아니라 이 신앙심을 대외정책 수행에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대테러전쟁은 테러와의 전쟁일 뿐,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 2001년 9.11 사태 직후 부시 대통령은 종교전쟁을 의미하는 '십자군(crusade)'이라는 말을 썼다가 황급히 취소한 바 있다. 아랍권이 미국의 대테러전쟁을 이슬람문명에 대한 기독교문명의 공격으로 오해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이후 부시 대통령은 미국 내 이슬람 지도자들을 백악관 만찬에 초청해 이슬람교를 '평화의 종교'라고 추켜세우는 등 이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대테러전쟁을 공공연히 종교전쟁에 비유하는 인물을 관련 주요 요직에 앉힘으로써 부시행정부의 이같은 제스처가 과연 진심이었는지 의심받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한편 로스앤젠레스타임스는 보이킨 중장의 일련의 발언에 대한 그의 해명을 듣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가 응답을 회피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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