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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끔찍한 여유로움을 만끽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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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끔찍한 여유로움을 만끽해야만 했다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올림피아로 출발한 버스. 단 한 마디의 공식적인 사과도 받지 못한 채 우리 팀은 버스에 올라타야 했다. 차창 밖 그리스의 야경을 응시하다 보니, 어느 새 짜증스런 마음은 가라앉는다. 아, 올림피아! 이제 곧 너를 만날 수 있다니!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부에 있는 고대 도시 올림피아(Olympia). B.C.2000년 경부터 성역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올림피아는 B.C.1000년 경부터 제우스신을 모신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이 곳은 고대 올림픽이 시작된 곳으로 유명하다. B.C.776년 이 지방에서 시작한 고대 올림픽은 점차 그리스 전역으로 확산되다가 기독교의 보급으로 393년 마지막 올림픽이 치러진 후 제우스 신전의 파괴로 중단되었다. 그 후 지진으로 인해 무너졌던 올림피아의 성역은 오랫 동안 매몰되어 있다가, 1907년 독일 발굴대에 의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아테네에서 6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올림피아. 지루할 것만 같던 그 시간을 우리는 달콤한 잠으로 손쉽게 흘려 보낼 수 있었다. 드디어 올림피아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올림피아 시내에 있는 작은 광장에서 멈췄다. 버스에서 내려 보니, 주최측에서 나온 두 명의 여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맨디와 마리아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테네에서 출발한 버스에는 제5회 세계대학연극협회 총회(5th International University Theatre Association World Congress, 이하 IUTA)에 참석할 분들도 함께 타고 있었다. 먼저 IUTA 일행이 주최측으로부터 일정과 숙소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IUTA 일행이 숙소로 떠난 뒤에야 우리는 숙소에 대한 매우 간단한 설명을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주최측 운영위원 마리아는 우리의 숙소가 올림피아 시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숙소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버스는 1시간 후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석만 교수를 비롯한 스태프들은 마리아에게 궁금한 것들을 질문했지만, 별로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마리아는 결정적인 질문에는 자신의 부족한 영어 실력을 탓하며, 일단 숙소로 가서 기다리면 추후에 연락을 취하겠다는 대답만을 되풀이했다.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앞으로 1시간. 아테네에서 기다렸던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단 짐들을 올림피아 세계대학연극축제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초등학교에 옮겨 놓은 뒤, 조용한 올림피아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교회 앞 광장 뒤편으로 조심스레 걸어가 보니 셔터를 내린 고요한 상점들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을 연 곳은 작고 귀여운 노천 카페들과 조그마한 슈퍼마켓뿐. 이 낯선 거리 어디쯤엔가 우리의 소리와 몸짓으로 가득 메울 드루바 극장이 있으리라. 갑작스런 공연 생각에 괜시리 마음이 설렌다.

골목 탐방을 끝내고 광장으로 와 보니, 우리를 숙소까지 데려다 줄 버스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짐을 꾸린 다음 버스에 올랐다. 이번 버스는 우리 팀이 겨우 비집고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아담했다. 맘 편히 앉아서 잠을 청할 수도 없는 신세가 갑자기 처량했다. 그렇게 불편한 버스 여행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정확한 목적지도, 정확한 도착 시간도 모른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컴컴한 어둠뿐. 답답함과 피곤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덜컹. 갑자기 버스가 멈췄다. 도착. 산모퉁이를 돌아 돌아, 드디어 숙소에 도착한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보니, 언덕 아래 거짓말처럼 불빛을 가득 품은 숙소가 보인다. 결코 호텔처럼 보이지 않는 너무도 소박한 외관에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자원봉사자 알렉스에게 물어 보니, ‘유스호스텔’이란다. 이런... 호텔이 아니라 유스호스텔이라니!

안으로 들어갔더니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유스호스텔 측에서는 우리 팀이 총 몇 명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손님이 도착한 뒤에야 시트를 갈고 침대를 옮겨 놓으며 부산을 떠는 그리스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그들의 끔찍한 여유로움을 만끽해야만 했다. 숙소같지 않던 곳이 숙소로 변하는 모습을 일일이 지켜보면서 말이다.

가까스로 숙소 배정을 마친 뒤, 하루종일 무더위와 씨름했던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욕실이 남녀공용이라니!!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층에 하나밖에 없는 욕실. 한쪽에는 문 달린 샤워장이 3개, 다른 한쪽에는 세면대가 6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구석진 곳에는 양 옆으로 6개의 화장실이 있었다.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화장실 문을 연 순간. 더욱더 놀랄 만한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기 뚜껑(변기에 앉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시트 구실의 뚜껑)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너무도 영세하고 열악한 환경. 보이는 건 오직 나무뿐. 어디를 관광할 수도, 여행할 수도 없는 외딴 곳. 이런 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러야 하다니! 우리 모두는 주최측의 무성의함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날은 이미 저물었고, 피곤은 몰려 오는데... 분노도 항의도 내일로 미룰 수밖에. 그렇게 그리스에서의 두 번째 밤이 지나갔다.

참고로 ‘헤카베’ 귀국 공연을 안내합니다.
9월 4일(목), 5일(금) 저녁 8시
국립극장 하늘극장
무료 공연
공연문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공연기획실
(02)958-2556/2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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