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노무현 정권이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일회성 성취욕에 눈이 멀어, 나라 경제를 통째로 미국 부시 정권에 헌납한 원죄가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세상이 바뀌었음에도 신자유주의적 사대사상과 식민주의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당수 과거 여당이었던 민주당 의원들이 세계화의 허위 허세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22일 서울 명동에서 진행된 '한미FTA 비준 동의안 국회 통과 규탄 집회' ⓒ프레시안(허환주) |
그 단적인 예가 지난 21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과 시도지사 연석회의에서 송영길 인천시장이 한미FTA의 "ISD(투자자-국가소송제도)조항 폐지 주장은 자유무역협정을 하지 말자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야당만 할 게 아닌데 집권당이 될 생각으로 발언해야 한다"고 소리 높였다.
민주당이 집권당이었을 때 스스로 한미FTA의 화신(化身)인 양 TV 토론 등 각종 토론회에서 어색한 논조로 사자후하던 모습이 다시 살아났다. 송 시장은 원죄를 의식한 양 시종일관 같은 논지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차라리 그의 순진무구함이 측은하다. 그런 용감한 사고방식과 무지 때문에 국민들이 지난 대선 때 민주당 정부에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수미일관(首尾一貫)한 무지 앞에 고개 숙여질 뿐이다.
그러한 제한된 아전인수식 짧은 지식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짐짓 국정에 참여하고 있다고 착각한 분들이 아직 민주당 안에 꽤 있는 모양이다. 이른바 전직관료, 특히 노무현 정부 시절 고위관료 출신 국회의원과 호남의 주요도시 출신 민주당 의원들이 이른바 협상파들이며, 바로 그들이 한나라당의 일방적인 의회 폭거를 불러들였다고 본다.
주지하다시피, 한미FTA로 수출 산업 등 우리 경제 일반에 가져다줄 실익은 미미하고 불확실한 데 비하여 그 피해는 우리나라 농축산업과 중소상공업, 서민 노동자들이 몽땅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법, 행정, 경제, 사회, 문화예술, 의료 복지 체계는 미국 제도에 예속화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갑자기 회자되는 군사적 한미동맹 강화 효과는 이제까지 한미FTA 없이도 미국의 이익보호 차원에서 잘돼왔고 미래에도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사회주의권이 가까이 존재하는 한 더 이상 긴밀할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한미FTA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신라, 고려, 조선 왕조사를 보면 오늘날 한미 두 나라의 군사동맹만큼 끈끈한 동맹관계가 없었다. 나·당 연합군도 한미 군사동맹만큼 찰떡궁합이 아니었다.
아무튼 대기업 수출업자와 원료 수입업자 및 자동차 업계만이 재미를 보게 되었다. 고용도 제대로 창출하지 못하는 경제성장과 수출·수입 산업이 요즘 전경련과 무역협회 그리고 그들의 광고지출로 잘 먹고 사는 보수언론을 앞세워 한미FTA 비준을 위해 날뛰었다.
곧 있으면 찬양 일변도의 기사와 광고가 홍수처럼 폭주할 것이다. 그 떡고물에 기생하는 일부 국회의원들 역시 그들이 국익을 노래하는데 장단을 맞추면서 굶주린 배를 채울 것이다. 똑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들어온 데자뷰(기시감, 旣視感) 때문인가, 아무튼 옛날식 경제용어를 빌려, 한미FTA는 오로지 매판자본(買辦資本), 매판 정상배, 매판 언론만 더할 나위 없이 살판이 났다.
농어민과 중소상공인 노동자들은 ISD 등 한미FTA의 각종 독소조항에 짓눌려 숨쉬기에도 급급할 것이다. 일단 비준된 한미FTA는 발효되면 앞으로 어떤 방도로도 되돌릴 수 없게 돼 있어 고민이 더 깊어진다.
오죽했으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장하준 교수는 한미FTA를 가리켜 '이혼도 못하는 결혼'이라고 했을까. 세계적 문명비평가 촘스키 교수는 한미FTA를 한마디로 '미국 경제체제에 한국을 흡수하는 협정'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차라리 우리나라에 미국 대통령, 미국 국회의원, 미국 언론인들을 무관세로 수입하는 협정부터 추진하는 편이 훨씬 비용이 덜 들고, 국민들을 편하게 할지 모른다. 그 대신 잠자는 시간도 줄이고 일할 줄밖에 모르는 우리나라 농민과 노동자들의 미국 이민을 제발 자유화하는 FTA였으면 싶다.
그런데도 정부 여당 사람들은 물론, 야당 내 협상파들, 주로 전라남·북도과 광주 도시 출신의 일부 국회의원들은 장차 식량과 농업문제의 쇠퇴가 가져올 가공할 현재와 미래의 사태에 대해서 애써 눈을 감는다. 심지어 야당 출신의 일부 시·도지사들마저 한미FTA가 장차 지방자치제와 지방의 중소상공업을 크게 위축시켜 취약한 지방 경제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친미, 종미 사대주의적 몸 사리기 일변도이다. 누가 그러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야당 출신의 전라도 협상파 의원들은 대부분 지역구가 도시라서 그런지, 비준 불가피론을 되뇐다. '때리는 신랑보다도 말리는 시어미가 더 미운 격'이다. 어리석게도 국민들의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 내재한 식량과 농업 및 중소상공업에 대한 경시 및 무시 성향에 안주하고 있다.
▲한국 농민들의 FTA 반대 시위 ⓒ프레시안(최형락) |
역대 정부가 체결한 FTA들은 그런대로 중요 농축산물 등 기초 생산품들을 관세 철폐의 예외 품목으로 인정받았다. 한·칠레 FTA에서는 29%, 한·싱가포르 FTA는 33.3%, 한·EFTA(유럽자유무역연합) FTA에선 65.8%, 한·아세안 FTA는 30.9%를 예외 품목으로 인정받았다. 유독 이 정부 들어 강력히 밀어붙인 한·EU와 한미 FTA에서만 1∼2% 정도의 예외 품목을 두었는가 싶더니 그나마 한미 FTA의 경우 쌀과 30개 월령 이상 쇠고기마저 곧 관세가 폐지될 것이라는 소문이 미국 쪽에서 솔솔 불어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평지면적 기준으로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아 농가인구당 경지면적이 아주 협소하고 땅값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나라에 속한다. 그 결과 생산비가 높아 평균 가격비용 면에서는 도저히 미국·유럽산 농축산물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이른바 가격 면에서는 국제 경쟁력이 턱없이 낮다. 미국 측의 계산만으로도 미국은 12조 원 가까운 수출 흑자를 해마다 구가할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로선 소농·가족농의 특성을 살려 품질과 안전성(安全性)을 높여 비가격 면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땅의 환경 생태계와 농촌 공동체를 지키면서 농축산업을 살려 나가기 위해서는 유기농업 말고는 대안이 없다. 그 유기농업에도 미국 등 강대국은 품질인증의 동등성(equivalence)을 요구하며 유기농의 무관세 자유무역 통상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 무농약 이상 유기농업의 57%를 생산해 내는 전라남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성실한 지도자와 착한 농부, 그리고 좋은 정책만 있으면 우리나라 농업을 15년 내에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일이 힘들지언정,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유기농업은 과거에도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을 먹여 살려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가 있다.
범지구적으로 유기농업을 육성하는 것은 환경 생태계 오염과 기후 온난화에 대처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WTO(세계무역기구)도 유기농업에 대한 정부보조(직접 지불제)를 금지하지 않고 있다.
그 유기농 축산물을 육성하여 마을마다 두세 개 품목을 골라 발효 가공식품으로 키워나갈 경우 농촌 주민의 부가가치 소득을 배가시킬 수 있다. 한미 FTA를 계기로 비준 후의 대책이라도 제대로 세워서 환경을 살리고 소비자도 살리며 농업농촌을 살려야 한다. 한미 FTA로부터 국민의 식량 주권을 보전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식량 자급률이 25%(그중 쌀을 제외할 경우 4.5%에 불과)로서 세계 최하위권인 우리나라가 농사를 짓지 않고도 국민의 생존권을 확보할 수 있을지, 풍전등화 그대로이다. 지구 생태계 붕괴와 기후변화, 식량부족사태 하에서 한미FTA로 날개를 달게 된 신자유주의 세계 다국적기업들이 호시탐탐 대한민국의 식량 주권을 넘보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