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교사(巧詐)는 졸성(拙誠)보다 못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교사(巧詐)는 졸성(拙誠)보다 못하다”

신영복 고전강독<144> 제12강 한비자(韓非子)-12

'한비자'에는 법가사상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세사(世事)와 인정(人情)을 꿰뚫는 많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이야기를 읽게 되면 한비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냉혹한 마키아벨리는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한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 인간적 면모를 조사한다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비자의 인간적 면모를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한두 가지만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악양(樂羊)이라는 위(魏)나라 장수가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하였습니다. 때마침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에 있었습니다. 중산국 왕이 그 아들을 인질로 삼아 공격을 멈출 것을 요구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중산국 왕은 드디어 그 아들을 죽여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냈습니다. 악양은 태연히 그 국을 먹었습니다.

위나라 임금이 도사찬(堵師贊)에게 악양을 칭찬하여 말하였습니다. "악양은 나 때문에 자식의 고기를 먹었다." 도사찬이 대답했습니다. "자기 자식의 고기를 먹는 사람이 누구인들 먹지 않겠습니까?" 악양이 중산에서 돌아오자 위나라 임금 문후(文侯)는 그의 공로에 대하여 상은 내렸지만 그의 마음은 의심하였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악양식자(樂羊食子)의 이야기입니다.

악양식자와 반대되는 이야기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노나라 삼환(三桓)의 한 사람인 맹손(孟孫)이 사냥을 나가서 사슴새끼를 잡았습니다. 잡은 사슴새끼를 신하인 진서파(秦西巴)를 시켜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미사슴이 따라오면서 울었습니다. 진서파는 참을 수 없어서 새끼를 놓아주었습니다.

맹손이 돌아와서 사슴새끼를 찾았습니다. 진서파가 대답하였습니다. "울면서 따라 오는 어미를 차마 볼 수 없어서 놓아주었습니다." 맹손이 크게 노하여 그를 쫓아내어 버렸습니다.

석달 뒤에 맹손이 다시 진서파를 불러 자기 아들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맹손의 마부가 말했습니다. "전에는 죄를 물어 내치시더니 지금 다시 그를 불러 아드님의 사부(師父)로 삼으시니 어쩐 까닭이십니까?" 맹손의 답변이 다음과 같습니다. "사슴새끼의 아픔도 참지 못하거늘 하물며 내 아들의 아픔을 참을 수 있겠느냐?"

이 이야기의 말미에 달아 놓은 한비자의 멘트가 있습니다.
"악양은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고, 진서파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임을 받았다.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한 법이다."(巧詐不如拙誠)

교사(巧詐)가 졸성(拙誠)보다 못하다는 의미를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나는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로 이 구절을 읽습니다. 아무리 교묘하게 꾸미더라도 결국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나는 한비자의 이 한 구절 때문에 한비자는 매우 정직하고 우직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문장은 뛰어났지만 말은 더듬었다는 기록도 그러한 면모를 뒷받침해 줍니다. 동문수학 친구인 이사의 속임수에 빠져서 죽임을 당하는 것만 보아도 그가 펼치는 이론과는 반대로 한비자는 오히려 우직한 졸성(拙誠)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전편(問田篇)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계공(堂谿公)이 한비자에게 충고합니다.

"오기(吳起)와 상앙(商鞅) 두 사람은 그 언설이 옳고, 그 공로 또한 대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기는 사지가 찢겨 죽었고 상앙은 수레에 매여 찢어져 죽었다. 지금 선생은 몸을 온전히 하고 이름을 보전하는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걱정된다."

이 충고에 대한 한비자의 대답이 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보게 합니다. 동시에 법가사상의 의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한비자의 답변은 그 요지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선왕의 가르침을 버리고 (위험하게도) 법술을 세우고 법도를 만들고자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지럽고 몽매한 임금(亂主暗上)의 박해를 꺼리지 않고 백성들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한 몸의 화복(禍福)을 생각하여 백성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것은 탐욕스럽고 천박한 행동입니다. 선생께서 저를 사랑하여 하시는 말씀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저를 크게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림이든 노래든 사상이든 나는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魂)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비자의 이러한 인간적 면모가 적어도 내게는 법가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