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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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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78>

사랑의 풍토(風土)

세밑에 하는 얘기는 필자와 알고 지내던 사람의 얘기이다. 그 분은 중국 상하이의 어느 대학에서 언어학 교수를 지내다가 갑자기 자진(自盡)으로 세상을 떠나신 분이다. 나이가 필자보다 몇 살이 위였고, 중국에 사시던 분이라 겨우 네 번의 만남에 불과했었지만, 관심사가 같고 해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의 속내를 주고받았던 분이었다.

먼저 그 분의 사주는 다음과 같다.

년 丁亥
월 丙午
일 戊辰
시 庚申

매 5세마다 변하는 대운은 아래와 같다.

45 35 25 15 5
辛 壬 癸 甲 乙
丑 寅 卯 辰 巳

필자가 그 분을 알게된 것은 1994년 처음 중국을 다녀왔을 때였다. 강남의 절경이자 명승지인 항주(杭州)에 들렀다가 식당에서 우연히 알게되었다. “길에서 만났으니 길동무나 하자”(路中相逢路中友)고, 문어체로 말을 건넸더니, “삶이란 본시 길가는 나그네”(人生本是路中客)라고 그럴듯한 화답을 해오는 바람에 마음이 통하여 나이에 관계없이 친구가 된 사이였다.

“언어학자라고 하시니 사주에 불(火)이 분명히 있겠군요, 어디 한 번 생년월일시나 말씀해 보시죠.”하면서 그 분의 사주를 받아서 펼쳐보았더니, 역시 년간과 월간에 병정화(丙丁火)가 있었고, 태어난 달도 오월(午月)로서 화기가 강하니 언어학자가 되었고, 시에 식신(食神)이 있어 재기총명한 학자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후, 서너 번 편지를 주고받았고, 기회가 되면 찾아가서 만나기도 했었고, 또 서울로 한 번 찾아오기도 했었다. 그 분은 언어학자였고, 필자 역시 고대 언어의 발생에 관해 독자적인 연구를 하던 터라 만나면 서로의 생각을 기탄 없이 털어놓다 보니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서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에 그 분의 사생활에 관해 많은 얘기를 듣게 되었다. 운명을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학문적인 호기심도 있었기에 더욱 자세히 물어보았고, 이에 그 분 역시 오래 담아두었던 심중의 얘기를 털어놓는 것이 시원했던지 선선히 그리고 자세하게 얘기를 들려주었다.

잘 하지 못하는 술이지만, 흥도 나고 해서 무리하게 마셔가며 듣다 보니 어디선가 들었던 얘기와 대단히 유사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바로 프랑스의 모럴리스트 ‘앙드레 모로아’(Andre Maurois)의 소설 ‘끌리마(Climats)'에 나오는 얘기와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사랑의 풍토‘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있다. 불어로 끌리마는 영어로 클라이밋 climate 이 되니, 기후 내지는 풍토라는 의미이고 해서 그런 제목이 붙은 것이다.

간단히 그 분의 얘기를 정리하면, 20대 중반에 대단히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 여성은 자유롭고 방임적인 성격이었던 것이 부부간의 갈등이 컸다 한다. 그 분은 대단히 내성적인 성격에 학구파였고, 성장 시에도 얌전한 모범생이었는데, 아내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 분의 사주를 보면 일간이 무토(戊土)인데, 병정화가 있고 불의 달에 태어났으니 학구적인 머리가 비상하고, 불이 언어이니 언어학자가 되었으며, 성격도 상당히 내성적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어릴 적 대운이 갑진 을사 운이라 관운(官運)이니 차분한 모범생이었다.

20대 중반에 만났다고 하기에, 혹시 1972년 무렵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면서 신기해했다. 그 분은 계묘(癸卯)운이 시작되는 1972년 임자(壬子)년, 물의 해에 그 여성을 만났던 것이었다. 만난 달이 그 해 11월 후반경이니 신해(辛亥)월이었다. 물의 해는 그에게 재운을 뜻하고, 신해월은 활발한 달이니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예로부터 중국의 항주는 미녀(美女)가 많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분이 만난 여성 또한 항주 미인이었다. 2 년여의 교제를 거쳐 결혼에 성공했는데, 결혼 생활은 얼마 안 가서 파탄이 나고 말았다. 분방했던 아내는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학자였던 그와는 성장 환경이나 생각과 기호가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필자가 항주에 갔을 때, 그 분은 헤어진 전처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곳을 들른 것이었다.

사랑했지만 갈등도 많았던 부부 생활은 결국 아내에게 다른 연인이 생기면서 이혼하게 되었다. 아내에게 연인이 생긴 것은 1979년 기미(己未)년이었고, 이혼에 합의한 것은 그 다음 해였다. 무토 일간인 그에게 기미의 해는 다른 라이벌에게 아내를 빼앗긴다는 암시가 있는 해인데,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그 분은 혼자 지내다가 1983년 계해(癸亥)년, 다시 물의 해라 아내가 생기는 해이니, 이번에는 중매로 새로운 여성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두 자녀를 두고 남이 보기에는 대단히 순탄한 가정을 꾸려나갔지만, 사실 문제가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그 분은 전처가 지녔던 강렬한 매력을 마음 한 구석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성 관계에 있어 전처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적극적이어서 처음에는 남자인 본인이 당황할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에 교양도 풍부해서 당시(唐詩)를 아주 영롱한 목소리로 읊어대곤 했는데, 그 기억을 지우지 못해 괴로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원래 나는 무척이나 보수적인 성격인데, 내 속에 있던 무엇을 그녀가 촉발시켰던 모양이오.”라고 얘기하는 장면에서 필자는 순간 눈을 반짝이면서, ‘아!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다.’라고 생각했고, 얼마 안 가서 앙드레 모로아의 소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바람에 이번에는 얌전하고 보수적인 여성을 만나 잘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좋아했던 생각이 자꾸 어긋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아내에게 짜증을 내고, 구박하는 일이 잦았으며, 그 결과 이제 현재의 아내는 풀이 죽었고, 아주 서먹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동시에 그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이렇게 변했나!’하고, 놀란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학문적인 정열도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그 얘기를 들은 것이 재작년인 2000년이었는데, 당시 대운은 辛丑운이고 년이 庚辰년, 금의 해라 그로서는 활발한 운이기도 하지만, 반면 중년의 수운(水運)을 만나 원 사주에 있는 화(火) 기운을 누르면서 타고난 인내와 학구열, 보수적인 성격이 많이 지워지고 있었던 탓이었다.

사실 필자는 작년 그 분이 왜 스스로 생을 마쳤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냥 연락을 취했더니 답장이 없고 해서 구체적으로 전화를 해 보았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제자가 전화를 받았는데, 상하이 방언이 섞인 억양 탓에 자세히 물어보기가 어려웠지만, 직장에서는 전혀 무슨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어떤 격정적인 동기가 있었는지, 아니면 늘 마음에 품고있던 비관적인 무엇이 있었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당시 털어놓았던 심중의 고민이 일부분이나마 동기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다만, 작년 2001년 辛巳년 9월 丁酉월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충동적인 우울증이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정유의 화운(火運)이 들어와서 금 기운을 누르니 갑자기 우울해지고 착한 아내를 괴롭혔다는 자책이 원인일 수 있을 것이다.

앙드레 모로아의 소설도 그 분의 스토리와 근본적으로는 동일하다. 조용한 성격의 남자, 그리고 분방한 성격의 여자가 결혼했지만, 구속을 싫어하는 여자가 결국은 다른 남자와 애정 관계를 만들면서 오는 파탄. 그리고 이번에는 보수적인 성향의 여자와 재혼했지만, 이미 분방한 전처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남자가 새 아내와 갖게 되는 갈등 구조가 소설 ‘사랑의 풍토’의 기본 줄거리이다.

틀린 것이 있다면, 소설에서는 분방한 전처가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남자도 마침내 병들어 죽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사실 이런 얘기는 우리 주변에서도 대단히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얘기이기도 하다.

필자가 그 분의 삶과 죽음에서 많은 감개(感慨)를 가지게 되는 것은 존경하던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물론이고, 예전에 읽었던 소설의 줄거리가 현실에서 거의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는 묘한 감정도 작용하고 있다.

아울러 더 기묘한 것은, 어릴 적에 그 소설을 읽었을 때는 그저 재미나고 유익한 책이다 싶던 것이, 이제 와서는 운명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명리학의 차원에서 한 사람의 내면과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분석하고 있다는 묘한 현심감 때문이었다.

당시 그 소설을 읽었을 당시, 그 소설 속의 얘기를 현실에서 조우(遭遇)하게 되리라는 점도 알 수 없었고, 앙드레 모로아가 던지는 메시지를 명리학과 연관지어 해석하게 되리라고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겉보기에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남녀의 애정이란 실로 어려운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받은 명(命)과 맞이하는 운(運)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결혼은 두 남녀 사이에 한 때 존재했었던 애정의, 그러나 흘러간 과거의 서약이기에 부단히 도전 받고 흔들리는 것이다.

앙드레 모로아의 소설이 더욱 인상깊었던 것은 그 속에 나오는 시 한편 때문이었다. 남자 주인공의 분방했던, 그러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처가 애송하던 시였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것으로서, 고인이 된 친구의 명복을 빌어본다.

From too much love of living,
From hope and fear set free,
We thank, with brief thanksgiving.
Whatever Gods may be,
That no life lives forever,
That dead man rise up never,
That even the weariest river
Winds somewhere safe to sea.

너무 강한 삶에의 애착과
희망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빠져 나와,
우리는 신들에게 짤막한 감사기도 드리노니,
그 신들이 어떤 신이든간에,
어떠한 삶도 영원히 살지는 못하고,
죽은 자 다시 일어나지 못하며,
가장 느린 냇물일지라도
바다로 흐르고 말게 할 것을.

(그럼 2002년이여, 안녕! 새 해에 다시 뵙겠습니다. 올해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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