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한 친구가 검찰을 떠난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란 일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 천재로 날렸던 이 친구의 재능이 새로운 유형의 검사로 자리잡는 데 쓰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고, 통상적 정치이념에 초연한 세계관이 그를 정치바람에서 보호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구상진 변호사를 만나 옷 벗은 경위를 설명듣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친구의 수학적 감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단순명쾌한 문제였던 것이다.
반공법인지 보안법인지에 걸린 한 피의자가 자신은 "초등학교 때부터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젊은 구 검사가 보기에 이것이 피의자의 혐의를 뒷받침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는 무혐의 불기소 결정을 내렸고, 얼마 후 옷을 벗었다.
"유죄를 뒷받침하는 유일한 증거가 피의자의 자백일 때는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형법 원리가 80년대초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구 검사가 무혐의 결정을 내린 이유였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구 변호사는 그 결정이 인권을 위한 것이었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법률의 정확한 적용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할 뿐이다.
10월 초 켈리 대사가 방북했을 때 북한의 핵 개발 자백을 받아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북한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고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른 중유 공급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은 그 대응으로 기본합의의 자기 쪽 이행사항인 핵시설 봉인을 풀겠다고 나서고 있다.
북한은 켈리 대사에게 핵 개발을 시인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개발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제네바 기본합의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의 핵 개발에 대해서는 자기네가 하건 말건 남에게 확인해 줄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중유 공급 중단이 형식상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결정이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의지에 따른 것임이 명백하다. 그 결정을 앞두고 한국의 통일부 장관이 이에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다고 같은 나라 외무부 관리가 바로 반박하고 나서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 벌어지지 않았던가.
중유 공급 중단은 북한의 핵 개발 혐의에 대한 판결의 의미를 가진 결정이다. 개인이 법률을 통해 사회 속에서 신분과 권리를 보장받듯 국가는 조약을 통해 국제사회 속에서 위치와 권리를 보장받는다. 북한의 위치와 권리를 보장하는 기제의 일부인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기하거나 보류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공민권을 제한하는 형벌을 내리는 것과 같은 조치다.
이 제재가 타당한 것인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겹겹이 안고 있는 결정이다. 북한이 "할 수도 있다"고 하는 범위의 핵 개발이 정말로 국제질서에 벗어나는 것인가? 그런 사업을 추진한 사실을 북한이 인정했다고 하는 켈리의 증언에 절대적 증거능력이 있는가?
미국은 상식과 합리성을 벗어난 북한 압박정책을 강행하면서 '북한의 의도'를 들먹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북한은 상식과 합리성을 지키고 있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봉인해제를 정중히 요청함으로써 이것이 미국의 제네바 기본합의 위반에 대한 대응조치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긴장사태 해소를 위한 열쇠가 미국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지금의 상황을 왜 만들고 있는가, '미국의 의도'가 더 궁금하다.
인도양의 북한 화물선 나포가 이 궁금증을 많이 줄여 준다. 미국은 북한을 '불량국가'로 각인하고 싶은 것이다. 켈리 한 개인의 증언으로 일방적 선전은 할 수 있지만 설득력이 없다. 이것을 꼬투리로 중유 공급을 중단하면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기본합의가 깨어지면 북한의 핵 위험성을 제한 없이 선전할 수 있게 된다.
북한을 위험한 나라로 만들면 미국에 무슨 이득이 있는 것일까? 테러전쟁의 세계화를 바라는 것일까? 군수산업의 호황을 바라는 것일까? 동북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바라는 것일까? 이런 것들을 바라는 미국인들도 있겠지만 정말 미국 전체를 위해서라면 잘못된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부시의 공화당 정권을 위해서는 큰 이득이 있을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 뿌리깊은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 하더라도 미국의 국익을 고려해 줄지언정 부시와 공화당의 당파적 이익에 한국의 정책이 얽매여서는 안될 것이다. 더구나 부시의 강경책이 관철될 경우 이 나라에 몰고 올 장기적 파장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지난 연초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은 북한이 아무런 꼬투리를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테러전쟁의 분위기에 편승해 나온 언어폭력이었다. 아무 근거 없이 적개심을 보이는 상대가 다시 몰상식하고 불합리한 압박을 가해 온다 해서 무조건 발가벗고 두 손 들 것을 북한 아니라 누구한테도 기대할 수 없다.
제네바 기본합의가 파괴되면 북한은 국제통제에서 벗어난 핵 개발로 나아가게 되고 이 지역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게 된다. 이것이 한국에게 바람직한 길인가?
KEDO에서 한국이 미국의 의지에 굴복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중유 공급 중단이라는 제네바 기본합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행위를 결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는지, 한국이 따지지 않는다면 누가 따질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 제네바 기본합의 파기로 가장 크고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북한 다음으로 한국인데.
20년 전 구상진 검사를 질곡에 빠뜨린 형법 원리로 되돌아가 보자. 자백이란 유사 이래 재판관들이 가장 편리하게 이용해 온 증거다. 이것을 얻어내기 위해 고문이란 것도 생겨났다. 자백의 증거능력 약화는 피의자 인권 보호를 위한 획기적 조치였다.
미국이 켈리 대사를 통해 자백을 받아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KEDO의 중유 공급 중단을 요구한 것은 북한의 국권을 철저하게 무시한 행위다. 그 결과가 제네바 기본합의의 전면파기에까지 이를 것을 내다보게 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국익을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 눈치만 보며 'business as usual', 놀던 대로 놀아도 되는 걸까? 제네바 기본합의가 날아가든 말든, 북한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이어 3번타자가 되든 말든, 미국 주둔군만 치외법권으로 모시고 지내면 평화와 번영의 길이 보장되는 걸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미국에게도 "NO"라고 말할 줄 아는, 북한의 비핵 보장을 미국보다 앞장서서 주선해 줄 수 있는 정권이 한국에도 들어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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