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 사이는 어떤 관계인가. 서양의 주류사상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절대적 경계가 있다고 보았다. 구약성서 창세기편에서는 세상 만물이 인간의 지배를 받으며 동물도 그 일부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보았다. 근세에 와서는 데카르트가 동물을 영혼이 없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설명했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는 모든 동물이 인간과 함께 윤회의 고리들을 이루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모든 동물을 인간과 함께 진화의 흐름 속에 자리잡은 존재로 본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절대적 구분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와 통하고 지금의 인간보다 더 진화된 존재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인간제일주의에서 벗어나는 경향도 있다.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도 인간과 동물의 절대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것이든 짐승의 것이든 참혹한 시체를 보면 마음이 언짢고, 인간이든 짐승이든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괴롭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다. 인간과 덩치가 아주 차이 나거나 신체구조가 크게 다른 동물, 예컨대 곤충이나 물고기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덜 느끼는 것이 보통이나 인간과 비슷한 동물이라 하더라도 인간에게와 똑같은 동정심을 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일 뿐, 정상적인 인간의 동정심은 모든 동물에게 미친다.
서양의 주류사상에서 동물을 인간과 격리시키려 한 것은 문명단계에 들어와서 농경보다 목축에 비교적 비중을 많이 둔 때문이라고 하는 설명이 있다. 늘 잡아먹어야 하는 동물에 대해 동정심을 억누르고 살해행위의 죄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관념의 주입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미 펜실베이니어 대학의 제임스 서펠 교수는 ‘동물과 함께 하는 세상 (In the Company of Animals)’이라는 책에서 동물과의 관계는 문명 발생과 함께 인간이 가지게 된 문제라고 설파한다. 원시상태의 인간은 여러 동물들 중의 하나로서 다들 하는 것처럼 쫓고 쫓기고 치고 받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었는데, 문명을 가지고 동물을 키우게 되니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잡아먹기 전까지 내 손으로 먹이 주고 돌보면서 남의 동물 아닌 ‘내 동물’로 정을 들여 놓았는데 막상 잡아먹으려면 뭔가 내 식구 죽이는 것처럼 찜찜하고, 저항도 못하는 놈을 죽이려니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책을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법을 동원하게 되는데, 서펠 교수는 이것을 절연, 은폐, 책임전가, 왜곡의 네 영역으로 구분한다.
절연(detachment)은 관념을 이용한다. 앞에서 말한 서양 주류사상이 대표적인 예다. 어느 심리학자는 실험실의 쥐가 관념화되는 현상을 다룬 논문에서 ‘좋은 쥐’ ‘나쁜 쥐’ ‘먹이용 쥐’의 구분을 지적했다고 한다.
좋은 쥐는 실험대상으로서, 동물학대방지의 기준이 적용된다. 좋은 쥐가 도망쳐 통제에서 벗어나면 나쁜 쥐가 되므로 어떻게 잡아죽여도 상관없다. 다른 실험동물의 사료로 쓰이는 먹이용 쥐에게는 또 별도의 기준이 적용된다.
은폐(concealment)는 동물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대부분 유럽 언어에서 쇠고기, 돼지고기, 사슴고기를 가리키는 단어들이 소, 돼지, 사슴의 단어들과 별도로 쓰이는 것이 그 예다.
근대화된 세계에서 공장화된 목축장과 도살장은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게 자리잡는다. 그리고 개체로서의 동물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대량사육에도 은폐의 효과가 있다. 가공육의 개발도 같은 원리로 육류 소비 촉진에 도움이 된다.
책임전가(shifting the blame)는 문명 초기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수법이다. 기르던 동물을 잡으면서 제사 올릴 귀신들이 요구해서 부득이 죽인다든지, 동물의 수호신이 동물을 더 좋은 곳으로 보내 이승을 떠나게 하는 것이라든지, 여러 가지 핑계가 여러 종족의 풍속에서 발견된다고 서펠 교수는 소개한다. 근대세계에서 일부 동물을 ‘해로운 동물(vermin)'로 규정해 인간에 대한 죄악을 박멸의 명분으로 삼는 것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왜곡(misrepresentation)도 관념화의 일종인데, 동물의 종류에 따라 인간의 특성 중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뒤집어씌우는 수법이다. 게으르고 더러운 돼지, 비굴한 개, 음흉한 고양이, 멍청한 소(양, 당나귀), 교활한 여우, 흉포한 곰, 탐욕스러운 늑대, 등등 끝이 없다.
가축의 경우 이런 규정은 자기충족성을 가지기 때문에 딱하기도 하다. 돼지는 더러운 동물이라 해서 더러운 환경 속에서만 살게 하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만다. ‘꼬마돼지 베이브’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이런 고약한 운명을 깨뜨려 보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동물의 딱한 사정에 동정심을 느끼며 읽다 보니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런 수법이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특히 근년 미국의 대외정책에 납득하기 어려웠던 측면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절연: “미국은 다른 모든 나라와 다른 특별한 나라야. 근대세계 최초의 공화국인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루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국가니까. 미국 이외의 국가에는 무슨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있어. 그런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기네 문제니까, 미국만 흔들리지 않게 지키고 있으면 다른 나라들도 미국을 따라오게 되어 있어. 인류평등 좋아하네. 자기네 나라를 미국처럼 만들어놓은 뒤에 평등 얘기하라고 그래.”
은폐: “전쟁터에서 군인과 군인이 마주치는 일을 극력 피해야 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단추를 눌러 게임 하듯 사람을 죽여야 해. 피해자들에 대한 구체적 보도는 최대한 막거나 어렵게 해야 해. 물론 우리쪽 피해내용은 최대한 극적으로 광고해야 하지.”
책임전가: “우리는 아프간인을 좋아하고 이라크인을 사랑하지만 탈레반과 후세인 때문에 부득이 공격하는 거야. 아프간인과 이라크인이 더러 죽고 다치고 고생도 하겠지만, 탈레반과 후세인 밑에서 영원히 신음하기보다는 우리에게 감사해야지. 더러 몰지각한 자들이 우리를 원망한들 어쩔 거야. 탈레반과 후세인을 날치게 놔둔 자기들 잘못을 탓해야지.”
왜곡: “이라크가 유엔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그러니 경제제재를 풀라고? 후세인이 어떤 놈인지 아직도 모르는구먼. 두고봐, 목을 조인 채 몇 달만 지켜보면 본색을 드러낼 거야.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도 있다고 그랬다고? 그거 개발하고 있다는 얘길 거야. 걔들 얘기는 무조건 최악의 뜻으로 해석하면 돼. 악의 축이잖아? 제네바 합의를 우리 쪽에서만 어기고 있다고? 맘대로들 떠들라고 그래. 우리 나팔이 훨씬 더 크니까. 우리 말 안 듣겠다는 건 바로 세계평화를 등지겠다는 뜻이야. 그걸 우리가 증명해 보여야 해.”
히틀러의 시대를 살아 보지 않았지만 대개 비슷한 수법들이 판을 쳤을 것 같다. 우리 모두 동물을 불쌍히 여길 줄 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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