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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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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68>

일본의 과거와 오늘

이번에는 음양 오행을 써서 심한 디플레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의 과거를 살피고 장차 일본이 택할 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주변 나라이므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일본의 근대화를 특징짓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역사가들은 대략 1867년경으로 보고 있지만, 음양 오행상으로 살펴보면 1865년 乙丑년 9월 乙酉월이라고 여겨진다. 일본은 乙木의 나라이므로 그렇게 잡은 것이다.

그러면 1865년 을축년 을묘월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해 9월, 영국은 일본에 부임해 있던 프랑스와 미국, 네델란드의 4개국 대표를 설득하여 9척의 함대를 이끌고 당시 권력자이던 막부의 쇼오군(將軍)이 머물던 진영에 몰아닥쳐 그들의 요구를 으름장으로 밀어붙인 일이 있었다.

이에 놀란 막부와 조정은 전부터 미뤄오던 통상조약에 대해 정식으로 승인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1866년 丙寅년 5월 13일에 조인식을 가졌는데, 이로서 일본은 실질적인 개국(開國), 즉 서구 열강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말이 개국이지 실은 불평등조약의 체결을 강요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개국이 시작된 乙丑년은 그에 앞서 1853년 癸丑년에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인 페리 제독이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가지고 온 이래, 12년만의 일이었다. 미국의 癸水의 나라이기에 癸丑년에 미국이 함포 외교의 힘을 발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의 개국은 도꾸가와 이에야스 이래 수 백년간 일본을 지배해 온 막부 체제의 종말을 가져왔고, 이에 지방 번주 세력들이 신격화되어 있을 뿐, 권력은 없던 황제를 중심으로 맹렬하게 서구식 체제로의 전환을 서둘렀던 것이 메이지 유신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하여 일본 황제는 1868년 戊辰년 己未월에 지금의 도쿄로 황성을 옮긴 후 자신을 옹립했던 지방 세력들을 무력화시키고 전 토지와 인민을 황제의 소유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일본은 水氣가 나무를 생하는 1873년 癸酉년에 가서 징병령을 공포하고, 그 다음 해인 甲戌년에는 형식적이나마 의회를 소집함으로써 제법 서구 국가와 유사한 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이처럼 甲이라는 글자가 붙는 해에 일본은 언제나 힘을 발휘하는데 이는 을목이 갑목을 만나면 대단히 강해지기 때문이다.

서구 열강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근대화를 달성하고 중국과 조선을 리드하는 동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인 발상을 진작부터 지녔던 일본은 1874 乙亥년에 가서 을목인 일본은 최초로 그 힘을 바깥으로 분출하게 된다. 서구 열강들이 쓰던 함포 외교 방식을 복사하여 조선을 상대로 운양호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로서 다음 해인 丙子년에 가서 그들이 당한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조선에게 강제했으니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이다. 여기서 ‘수호’란 일본이 조선을 보호한다는 뜻이니,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라는 뜻이다. 즉, 청 제국의 종주권을 밀어내고 그들이 등장한 셈이었다.

일본이 이처럼 청과 조선이 구태를 깨지 못하던 시기에 급속도의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을 음양 오행상으로 풀이하면 을목인 일본은 水氣로서 배양되니, 여기서 수기란 바로 해양 세력 내지는 영국과 미국을 의미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1875년 乙亥년부터 30년간에 걸쳐 조선 반도를 결국 손아귀에 넣게 되니 바로 1905년의 乙巳 보호조약이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1884년 甲申년에는 조선의 김옥균을 원격 조종하여 거사했다가 실패했지만, 다시 10년이 지난 1895 乙未년에는 조선 땅에서 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마지막으로 조선의 일본 세력권화에 맞서던 러시아와 1904년 甲辰년(앞서 얘기했듯이 일본은 갑이라는 글자에서 힘을 쓴다)에 전쟁을 시작해서 1905년 乙巳년에 승리를 쟁취한다.

이처럼 일본은 갑이나 을이라는 글자에 가서 일을 벌이며, 그 결과도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질이 乙木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러시아와 싸워 이긴 것은 일본으로서는 새로운 아시아의 강자로 등극한 사건이었고, 서구 열강들은 이 때부터 일본을 강자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슬슬 간이 붓기 시작한 일본은 1914년 甲寅년에 1차 대전이 발발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부터 친 러시아 성향의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이득을 챙긴다. 그리고 1925년 乙丑년에 가서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화는 1차 마무리를 보게 되었으니 1865년 을축년으로부터 60년이 지나 한 갑자의 순환을 마치는 해였다.

이 해에 전 국민이 참여하는 보통선거를 실시한 일본은 대외적으로 중국 대륙 진출이라는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로운 갑자의 순환에 들어선 일본은 재벌이 급성장하고 자신감이 팽대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앞서 일본은 언제나 갑이나 을의 해에 커다란 변화를 보였는데 이는 나라의 운기가 제대로 발전하고 뻗어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정확하다. 그러나 1925년부터, 일본은 외형상의 팽창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시련의 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1931년 신미(辛未)년에 가서 관동군내 일단의 군부 소장파에 의해 만주사변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은 핑계를 잡아 전쟁을 일으키고 만주 전역을 신속하게 점령하는 데 성공한 후, 만주에 괴뢰 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본 군국주의가 패망으로 들어가는 시발점이었다. 신미년의 신금(辛金)이 일본을 상징하는 을목을 강하게 누르는 해였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대공황 발발로 수출이 막히고 소련이 5개년 경제계획을 추진하자, 일본 경제는 분출구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에 전쟁에서 몇 번의 재미를 본 일본 군부, 그 중에서도 급진소장파들이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만주 사변은 결국 1937년 丁丑년에 가서 중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으니 신미와 정축이 만 6년을 사이에 둔 충운(衝運)이었다.

다시 일본은 미국의 봉쇄를 벗어나기 위해 이번에는 해군이 주도권을 쥐고 대형 사고를 치게 된다. 바로 1941년 신사(辛巳)년의 태평양 전쟁이다. 주목할 것은 이번 전쟁 역시 辛이라는 글자가 붙는 해에 시작한 일이니 결과가 좋을 수 있겠는가.

결국 1931년 신미년에 시작한 전쟁이 신사년의 태평양 전쟁을 불러 들였고, 1945년 을유(乙酉)년에 가서 무조건 항복으로 매듭을 지으면서 일본의 군국주의는 사라지고 말았다. 을유(乙酉)의 의미는 乙木을 밑의 유금(酉金)이 베어내는 형국이니 괴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일본이 탄생하는 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일본은 미국의 통치하에 들어갔고, 자위대라는 애매한 개념의 방위력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일단 강자를 만나면 엎드리는 음유(陰柔)한 기질의 일본인들은 미국의 통치를 달게 받아들이더니 1950년 경인(庚寅)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기화로 새로운 성장의 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일본이 그토록 갈망해오던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은 경이라는 글자에 가서 국민들이 단합하고 순종하게 된다.

말 잘 듣고 근면성실한 일본인들은 부지런히 미국의 보호 아래 수출 시장 개척에 나섰고, 꼼꼼한 일본인들이 만든 제품은 전 세계를 뒤덮어갔다. 게다가 월남에서 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더욱 신이 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런 축적(reserve)이 1964년 갑진(甲辰)년에 가서 일본을 선진 경제의 훈장인 IMF 8조국의 반열에 들게 했으며, 동시에 도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또 다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의 장점은 1974년 갑인(甲寅)년을 전후해서 밀어닥친 오일 쇼크라는 세계적 위기를 오히려 발전의 기폭제로 삼을 수 있었다. 갑인년은 을목인 일본에 있어 가장 강력한 기운이라, 이 해를 기점으로 ‘메이드 인 재팬’은 품질에 관한 한 두말 할 것 없는 으뜸 상표가 되었고, 급기야는 1985년 을축(乙丑)년, 즉 메이지 유신의 시발로부터 60년을 두 번 순환한 해에 가서 일본의 경제력은 최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 후 일본은 미국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미국인들은 일본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순의 벚꽃놀이였다. 일본의 엄청난 스탁(stock)은 증시의 거품을 불러 들였고, 엔화가 대거 절상되면서 근검성실하던 일본인들은 방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신기루 또는 환시(幻視)현상 앞에서 맥주 거품에 취해버렸던 것이다.

특히 소련의 붕괴는 결정타가 되었다. 소련이 붕괴된 것은 1991년 신미(辛未)년이었으니 그 뜻을 독자들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신금이 을목을 극하는 해라, 이로서 지난 120년간을 지탱해오던 일본의 다이나믹은 상실되고 말았던 것이다. 미국은 더 이상 원조자로서의 미국일 수 없었고, 일본은 더 이상 미국에 순종하면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되는 일본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을목인 일본은 갑이나 을의 해에 힘을 쓰면 성공하지만, 신(辛)이라는 글자가 붙는 해에 일을 도모하면 결과가 안 좋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작년은 신사년이니 일본의 어려움은 최근 10 년 사이에 최고조에 달했던 해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60년 순환을 두 번 끝내고 이제 세 번째의 순환을 맞이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나아갈 방향이 뚜렷하지가 않다. 현재 일본은 방향을 잃고 표류중이다.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이들도 있고, 그 바람에 과거 일본제국 당시의 군복을 입고 할복한 사내도 있다. 또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이 빅 히트를 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제 보통국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과거 미국 통치하의 좋았던 시절을 잊지 못하는 향수병도 만만치 않다.

그러니 작년 2001년 신사(辛巳)년에 들어서는 전 세계가 일본을 우습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처럼 일본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나 경외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그저 무기력한 일본, 제로 금리의 일본, 금융 개혁도 하지 못하는 일본을 야유하는 글들만 신문지상을 메우고 있다. 한편으로, 일본은 여전히 과거의 침략 행위에 대해 아시아인들에게 솔직 담백한 사과도 하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에 급급해 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일본인들은 지금 침묵하고 있다.

왜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은 지난 1865년부터 두 번의 대외 팽창을 통해 활력을 유지해왔었다. 한 번은 무력을 통한 대외 진출이었고, 한 번은 시장을 통한 대외 진출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두 번의 시도가 가졌던 의미에 대해 일본인들은 스스로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무력증에 빠진 일본의 나아갈 길을 핵심적으로 제시한다면, 갑목인 한국과 힘을 합치는 길이 유일한 길이다. 구원을 씻어내고, 진정으로 사과를 한 후,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한국과 일본은 진정 강자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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