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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사랑' 이 낳은 '큰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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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사랑' 이 낳은 '큰 분노'

<서평> 정연주의 '서울-워싱턴-평양' 을 읽고

'정연주'란 이름을 처음 대한 것은 대학 3학년때였다. '대화'라는 잡지에 실린 '언론계 선배 동료들에게'라는 글이었다. 1977년 유신말기. 모든 제도언론이 민감한 시국사건에 대해 일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대화'는 '무등산타잔의 실상' 등 독재정권의 급소가 될 만한 사건들을 용감하게, 아니 목숨이라도 건 듯이 보도했다.

'언론계 선배 동료들에게'라는 글을 읽고 났을 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표현이나 비판의 강도가 너무도 선연해서 제도언론을 향한 필자의 울분에 몸이 뜨거워지기보다는 비판의 대상이 된 현직 언론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울-워싱턴-평양'에 재수록된 그 글 중 일부를 옮겨보자.

"그런 종교와도 같은 신문에 몸담고 있는 당신들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알량한 촌지와 뻔질난 해외여행이라는 화대 때문에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포기한 채 화간을 계속하시렵니까?"('서울-워싱턴-평양' 152쪽)

"아닙니다. 마침내 당신들은 몸을 팔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짐짓 강간당한 듯 강변을 하다 마침내는 적당적당히 주는 화대를 받아가면서, 바로 당신들 앞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는 귀닫아 버리고 눈감아 버리고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마침내 해서는 정말 안될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들은 창부라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책 158쪽)

이 글로 '대화'는 창간 10개월만에 폐간을 당하고 말았다.

1995년 신문의 날을 하루 앞두고 정연주 선배는 '기자인 것이 부끄럽다'라는 칼럼을 한겨레신문에 썼다. 94년 제네바합의를 전후해 워싱턴특파원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작문경쟁'을 혹독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당시 서울 외무부와 워싱턴 등에서는 북미관계 진전 등에 관한 보도경쟁이 벌어져 자고 나면 '특종 아닌 특종'이 지면을 장식할 때였다. 정연주 선배에 따르면 "한국언론에 보도되는 북미 관련 기사 가운데 90%가 엉터리 기사"라는 비판이 미 국무부 관리들로부터 '서슴없이' 나오던 때였다.

칼럼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언론이 권력에 재갈물려 '사실보도' 자체를 하지 못했던 70년대초의 유신암흑시절,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시위현장에서 나는 그렇게도 기자인 것이 부끄러웠다. 언론인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니라 6.29와 같은 민중의 거대한 힘으로 권력으로부터 언론자유가 상당 부분 확보된 지금의 시점에서 나는 또다시 기자인 것이 부끄럽다. 지금은 권력에 재갈물려서가 아니라 선정적 상업주의의 노예가 되어 '사실보도'를 하지 않는, 그리고 나라를 대결의 극단으로 휘몰아가고 있는 '기자'라는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언론이 이 사회에 저지르는 죄악은 엄청나다. 그래서 나는 4월 7일 '신문의 날'을 맞으면서 기자인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기자인 것이 부끄럽다' 107쪽)

칼럼이 나온 다음 날 필자는 워싱턴특파원 부임을 위해 서울을 떠났다. 워싱턴에서 3년간 정연주 선배와 함께 지냈다.

정연주 선배의 글이 다시 한번 내 머리를 내리친 것은 2000년 10월이었다. 11년간의 워싱턴 생활을 접고 그해 6월 귀국한 정 선배는 한겨레신문 10월 11일자에 '한국신문의 조폭적 행태'라는 칼럼을 썼다. 조선, 동아 등 일부 족벌신문들의 행태를 조폭에 빗대면서 "젊은 언론인들이여, 일어나 조폭적인 사주들에게 저항하라!"고 촉구한 글이었다(같은 책 159-161쪽).

칼럼을 다 읽고 났을 때의 느낌은 충격과 경악이었다. '이걸 칼럼으로도 쓸 수 있는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필자는 소속 신문사에서 격주로 미디어 관련 칼럼을 쓰고 있었다. 또 조중동 등 거대보수신문들의 행태가 조폭적이라는 생각은 늘상 해왔고 사석에서는 몇번인가 그런 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신문지면에 활자화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자기검열 때문이었을까. 어쨌거나 정연주 선배의 '거침없음'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 칼럼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시민단체 등 진보개혁진영에서는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반면 제도권 언론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한 언론계의 노선배가 필자와 함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동안 "정연주, 그 친구 칼럼을 그렇게 써도 되는 거야"라며 혀를 차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하지만 정 선배는 제도권의 평판에 귀기울일 사람이 아니었다. 첫 칼럼이 나간 지 2주후 당시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의 고대앞 술주정 사건을 소재로 '한국언론의 조폭적 행태(2)'를 썼고 이후에도 '족벌신문=조폭'을 주제로 여러 차례 글을 썼다.

졍연주 선배는 그런 사람이다. 나이는 이순을 바라보지만 10대의 순수함과 20대의 열정을 갖고 있다. 고혈압에 당뇨, 관절염까지, 본인의 표현을 빌면 '움직이는 종합병동'으로 육신의 고통이 가실 날이 없지만 세상에 대한 낙관과 천진스러움을 결코 잃지 않는다. 그러나 불의와 위선을 보면-특히 언론의-온몸으로 달겨든다. 세상의 지혜를 무시하고, 나이답지 않게 격렬하게 대항하고 집요하게 공격한다.

본래 뜨뜻미지근한 성격인 필자는 정 선배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뾰족하게, 너무 가파르게 사는 게 하는 생각을 가끔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낸 첫 저서 2권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같았다.

'정연주의 워싱턴 비망록1'이라는 부제가 붙은 '서울-워싱턴-평양'의 앞부분 약 3분의 2는 1970년 동아일보 입사후 80년대초까지 언론자유운동과 관련하여 겪었던 온갖 고통들이 기록돼 있다.

예컨대 80년 5.17 군사쿠데타 직후 전두환 정권의 수배를 피해 철산리에서 은신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정말 막막했다. 나는 골목길을 정처없이 걸으면서 영빈, 웅세와(저자의 두 아들-편집자) 자주 불렀던 '마징가 제트'를 부르며 혼자 많이 울었다. 그리움은 끝이 없었다."('서울-워싱턴-평양' 103쪽)

"그날 밤 나는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질 않았으며, 목이 메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몇 번이고 길가에 주저앉았다. 그날 밤 나는 강남 사거리에서 영등포 역까지 걸어서 갔다. 나중에는 지쳐 더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미국에 이민가는 아버지를 6개월만에 한증탕에서 만나고 헤어진 뒤-같은 책 108쪽)

"나는 점심시간쯤에 아파트 앞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왔다갔다 했다. 그렇게 며칠을 버스를 타고 내가 살던 아파트 앞을 오가던 어느날, 아파트 모퉁이 길에 서서 손자를 기다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길가에서 손자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 그 모습이 생전에 뵌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같은 책 108쪽)

이 대목들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또 교도소에 보내온 부인의 편지들까지 공개하는 등 자신과 가족들이 겪었던 내밀한 고통까지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온몸으로 언론자유를 실천하려 했던 실천적 지식인의 온몸의 기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자신이 겪은 개인적 고통 때문에 세상의 불의와 위선에 대한 분노를 키웠다면 그 사람은 범부(凡夫)에 불과하리라. 정연주 선배의 분노의 밑바탕에는 개인적 고통 이상의 것이 있다. 바로 세상을 바로 보는 안목이다.

리영희 선생의 지적대로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세계국제정치의 중심인 '와싱톤'에서 장기간의 특파원 활동으로 지식을 축적한 정연주씨는 국제관계의 안목과 식견에서 한국언론계의 제1인자"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워싱턴특파원 시절 내내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놓고 씨름했다고 한다. '서울-워싱턴-평양'에 6쪽(282-288쪽)에 걸쳐 옮겨 놓은 도날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의 북핵 위기에 대한 연설 기록을 읽으면서 한반도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한미관계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설은 제네바합의가 타결되기 3개월전인 94년 7월 20일 행해진 것이었다. 8년전의 연설문 기록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고 8년전 그레그의 분석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사실도 놀랍다. 특히 주한 대사 시절(92년) 초대 주한 중국대사 장팅옌과의 대화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는 나에게 분명히 말했다. 남북한 사이의 경제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했으며, 한반도가 다시 통일된다면 그것은 남한이 주도하는 그러한 통일이 될 것이라는 점을 중국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관심은 그 중간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북한이 구석으로 몰려 비이성적인 행도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이미 10년전에 미국이나 중국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한반도의 앞날을 남한 사람들만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우리들만 냉전시대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미국은 언제나 좋은 나라'이고 '북한은 때려잡아야 할 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특히 세상물정 모르고 한반도 남쪽 절반이 세상의 전부인 양, 시대착오적 고정관념과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 고취에만 열을 올리는 한국언론의 맹목성과 우둔함에 저자는 더욱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8년간의 미국생활에 얻어진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 아니 그 이전에 인간다운 삶에 대한 뜨거운 애정으로 무장된 저자에게 한국언론의 시대착오적 맹목성은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매 한국언론에 대한 정연주의 큰 분노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커다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덧붙여 그 큰 분노가 큰 사랑으로 바뀔 날이 될수록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사족: '정연주의 워싱턴비망록'이 앞으로 몇번까지 진행될지 저자도 모른다고 한다. 다만 저자가 워싱턴에서 갖고 온 관련자료가 10상자나 된다고 하니 최소한 10번까지는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나올 책에서는 '빨갱이 목사' 패리스 하비나 '빨갱이 제독' 진 라로크처럼 사랑하고픈 사람들을 많이 보았으면 한다. 특히 그가 만난 북한 사람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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